78.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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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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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2022.06.28.
그날 밤늦게 태하를 돌려보내고 나서도, 수연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러 준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고, 한편으로는 지금쯤 병원에 누워 있을 그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 사람은 대체, 어쩔 셈인 걸까…….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수연은,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혹시 태하인가, 하고 생각하고 얼른 일어나서 문을 열자 서 있는 것은 커다란 상자를 든 퀵서비스 배달기사였다.
“이게 뭔가요?”
“윤태하 씨가 보내셨습니다.”
배달기사가 돌아가고 나서, 수연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어 올리는 수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내 아들이 보내준 꽃.
향기를 맡자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며칠 전에 꽃다발 때문에 봉변을 당한 억울함까지도 한순간에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들뜬 나머지, 수연은 상자 속에 꽃다발 말고도 하얀 봉투가 들어 있는 것은 한참 후에야 겨우 눈치를 챘다.
혹시 편지인가 싶어 두근거리며 열어 보자 안에서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수표였다.
금액을 보고 한참 입을 다물지 못하다, 수연은 떨리는 손으로 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머니!
반가운 목소리가 금세 전화를 받았다.
-꽃은 잘 받으셨어요?
“응, 잘 받았어. 그런데…… 이 돈은 뭐니?”
- 용돈 드린 거예요.
태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용돈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수연이 한 달 동안 일해서 버는 것의 몇 배나 되는 돈이었다.
- 다음 달에도 그만큼 드릴 거예요. 그다음 달에도, 또 그다음 달에도요. 그러니까 아끼지 마시고 어머니 쓰고 싶은 데 마음껏 쓰세요.
“이럴 필요 없어. 엄마는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그러나 태하는 마치 못 들었다는 듯이 딴소리를 했다.
- 이따 퇴근하고 또 뵈러 갈게요. 시현 씨하고 같이 갈 테니까 맛있는 거 해주세요.
태하가 이따 봬요 어머니,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바람에 수연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수연은 가게를 열 채비를 시작했다. 장을 보러 나오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아 서고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놀라서 올려다보자 슈트를 잘 차려입은 남자가 아침 해 같은 얼굴로 눈부시게 미소를 지었다.
“왜 이래요, 정말?”
수연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레온을 노려보았다.
“나는 정희선이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알아요. 수연 씨가 예뻐서 꼬시는 거예요.”
수연은 입을 벌리고 레온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한국말을 어디까지 잘하는 거야?
“잊어버렸어요? 말했잖아요, 난 결혼했다고!”
어젯밤에 같은 말을 듣고 쓰러지기까지 했던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수연 씨 남편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게…….”
수연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각나거든 말해줘요.”
레온이 쿡쿡 웃어서, 수연은 거짓말이 들켰다는 것을 알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데, 레온이 수연이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빼앗았다.
“장 보러 가나 봐요. 나하고 같이 가요.”
“이리 줘요!”
얼른 도로 뺏으려고 했지만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장사해야 하는데 장을 보러 안 갈 수도 없어서, 결국 수연은 그의 뒤를 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이쪽으로 갈까요?”
그는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시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얼마 전에 시장 상인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을 떠올리고, 수연은 허둥지둥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거긴 못 가요!”
“왜?”
“하여튼 못 가니까 그렇게 알아요.”
결국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늘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서 장 보러 다니는 거예요? 무거울 텐데.”
수연이 대꾸하지 않았더니 그는 제멋대로 지껄였다.
“내가 매일 와서 같이 가줘야겠다.”
“꿈도 꾸지 말아요.”
훨씬 키가 작은 수연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레온은 물었다.
“그동안 나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었어요.”
거짓말이다. 매일, 매시간, 매분마다 생각했다.
“나는 늘, 당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설레기 시작하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수연은 몰래 이를 악물었다.
그를 만나러 호텔에 갔던 날, 수연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이 사람은 그녀가 사랑했던 가난한 화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같은 얼굴로 웃고,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결국 나만 또 상처 입을 뿐이다.
수연은 입을 꾹 다문 채 걸었다.
마트에 도착해서도 레온은 카트를 밀고 수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갈색 털을 가진 커다란 개를 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장을 보는 두 사람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양파 살까요? 감자는 필요 없어요?”
수연이 대꾸는커녕 쳐다봐 주지도 않는데도,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빙긋 웃으면서 미소를 날리는 바람에 여러 여자들이 얼굴을 붉혔다.
꼭 필요한 재료 몇 가지만 사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레온이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저기 좀.”
그는 베이커리 코너로 수연을 데려가더니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좋아하잖아요, 케이크.”
스무 살 때의 그녀는 단 것을 좋아했었다. 특히 생크림 케이크를 무척 좋아해서, 레온이 설거지를 해서 번 돈으로 가끔씩 조각 케이크를 사주곤 했다.
[같이 먹어요, 네?]
수연이 아무리 권해도 레온은 한 입도 먹지 않았다.
[나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로즈가 많이 먹어요.]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그녀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로, 수연은 케이크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빵집에 가도 케이크가 진열된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케이크를 보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싫어서.
이 사람도 여태 기억하고 있었구나. 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케이크 같은 거, 안 먹은 지 수십 년은 됐다고요.”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크를 카트에 넣었다.
“그럼 먹어 봐요, 오랜만에.”
결국 케이크까지 사서 마트를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시장 어귀를 지나는데, 마침 모여 있던 상인들이 이쪽을 보고는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어머, 카레집 여자 아냐?”
“재주도 참 좋아. 이번엔 또 외국인이네.”
“그럼 민우 아빠는 어쩌고?”
“어디 남자가 한둘이겠어? 저런 여자가.”
“아유, 내가 영어만 좀 할 줄 알면 가서 확 말해주고 싶네.”
문제는 이 외국인이 한국말을 기차게 잘한다는 거였다.
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히 다 들었을 게 틀림없는데, 왠지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앞까지 와서야 레온은 수연에게 장바구니를 돌려주었다.
“미안해요. 내가 급하게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네요.”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간다고 사과까지 한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레온은 한술 더 떴다.
“보고 싶어도 좀 참아요.”
“누가……!”
순간 이마에 따뜻한 것이 닿는 바람에 수연은 숨을 멈췄다.
재빠르게 그녀의 이마에 도둑 키스를 한 남자가, 웃으며 돌아섰다.
“그럼, 또 봐요.”
*
하루아침에 태하에게 어머니가 생겼다.
물론 태하를 위해서는 무척 기쁜 일이지만, 갑자기 만나 뵐 생각을 하니 시현으로서는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시현은 레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조심해야 할 부분 같은 게 있으면 미리 알고 싶었다.
“저기, 태하가 그러던데요. 어머니를 찾았다고요.”
- 응.
딱 한 음절만 들어도 레온이 한껏 들떠 있는 게 느껴져서, 시현은 조금은 입맛이 썼다.
이래서 수연 이모 얼굴도 안 보고 거절하셨던 거구나. 이모는 첫눈에 레온 아저씨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태하랑 오늘 저녁에 찾아뵙기로 했거든요. 혹시 어떤 분이세요?”
대답 대신에 소리 죽여 쿡쿡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그제야 레온은 대답했다.
-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 오늘도 날 보더니 썩 꺼지라고 하지 뭐야.
레온은 진심으로 무섭다는 듯이 시현에게 신신당부했다.
- 나는 세상에서 태하 엄마가 제일 무서워. 그러니까 시현이도 절대 태하 엄마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레온과 통화하고 나자 시현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우진의 어머니에게 한번 당해 본 시현에게는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있었다. 사실 어떤 면으로 보나 자신이 우진보다 못할 게 없는데도 마치 왕자비 간택하는 왕비처럼 굴지 않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태하의 어머니가 자신을 탐탁하게 여길 것 같지 않았다.
일곱 살이나 많은 여자가 아들과 사귄다는데 어떤 어머니가 좋아할까. 게다가 태하는 저렇게 멋지니까,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기회도 많을 텐데. 나라도 마음에 안 들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키웠다는 걸 알면 좀 예쁘게 봐주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시현은 도리어 시무룩해졌다. 나쁘게 보자면 키워서 잡아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퇴근 후 태하의 차에 탔을 때쯤에는 너무 긴장돼서 곧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부담되니까 나중으로 미루자고 말을 바꾸면 뵙기도 전에 눈 밖에 날 것 같다.
“왜 나한테 말도 없이 약속을 잡고 그랬어.”
답답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태하에게 투정을 부리게 되었다.
“미리 말해 줬으면 옷도 좀 차려입고, 화장도 신경 쓰고 뵈었을 거 아니야.”
하지만 태하는 뭘 그런 걸 신경 쓰느냐는 식이었다.
“지금도 예쁜데 뭘.”
더 탓할 기운도 없어서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하긴 네가 뭘 알겠니.
그가 아직 어려서, 갑자기 연인의 부모를 만나게 되는 부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태하가 차를 멈춘 곳이 수연의 가게 앞이어서, 시현은 놀라 물었다.
“어머니, 여기서 뵙기로 한 거야?”
“응.”
시현은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태하의 어머니에게 물벼락을 맞더라도, 수연이 곁에 있으면 편들어 주지 않을까.
“왔니?”
가게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수연이 반색을 하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시현은 얼른 달려가서 숨넘어가게 물었다.
“이모, 저 어때요? 옷 이상하지 않아요? 화장은요? 괜찮아요?”
“우리 시현이야 언제나 예쁘지. 갑자기 왜?”
“저 오늘 여기서 태하 어머니 뵙기로 했거든요!”
“응?”
수연이 무척 당황한 얼굴을 해서, 시현은 얼른 설명했다.
“태하 어머니가 살아 계셨대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저기, 시현아.”
수연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잔뜩 긴장한 시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혹시 태하 어머니가 저 싫어하시면 이모가 편 좀 들어 주세요, 네?”
수연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태하가 다가와서 시현의 어깨를 껴안고 싱긋 웃었다.
“어머니. 제 여자친구예요. 예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