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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마트 차려주는 남자 (79/181)


#79. 마트 차려주는 남자
2022.07.01.



 


“혹시 태하 어머니가 저 싫어하면 편 좀 들어 주세요, 네?”

수연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태하가 다가와서 시현의 어깨를 껴안고 싱긋 웃었다.


“어머니. 제 여자친구예요. 예쁘죠?”

 

*



“…….”

두 사람에게서 설명을 듣고 나서도 시현은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수연 이모가, 태하 친어머니라고?


“진작 사실대로 말 못 해서 미안해.”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현을 보고, 수연이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처음엔 정말 몰랐어.”

한참 만에야 시현은 겨우 조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언제 알게 되신 거예요?”

“시현이가 태하 아버지 이름을 얘기해 줬을 때, 그때 알았어.”

그렇다면 정말 얼마 안 된 일이었다. 수연이 태하의 아버지 성이 궁금하다고 해서, 레온의 풀네임을 말해 줬던 기억이 난다. 어쩐지 그때 이모가 한참 말을 잃고 있더라니…….


“그럼 태하 너는? 언제 알게 된 거야?”

“어젯밤에.”

태하가 설명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헛것을 보신 것 같지가 않았어. 생각해보니까 마침 그날, 어머니가 호텔에 오셨었잖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생각했지.”

미소를 짓는 수연을, 태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태하가 저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 외에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제야 시현은 두 사람이 진짜 모자 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얼마 전, 술에 취해 찾아와서 태하를 안고 울던 수연이 떠올라서 시현은 뒤늦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랬던 거구나.

시현은 새삼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이모. 제가 태하 만나는 거, 혹시 싫지는 않으시죠?”

“무슨 소리니?”

수연이 정색을 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시현의 손을 감싸듯 꼭 잡았다.


“나는 여태 엄마라고 해준 것도 없는 사람이야. 태하를 다시 만난 것도 시현이 덕분인데, 싫어하다니.”

일찍 거칠어진 시현의 손을, 수연은 안타까운 듯이 어루만졌다.


“어제 태하한테 자세하게 얘기 들었어. 태하 키우느라 시현이는 대학교 때 친구들하고 놀러도 한번 못 갔다며. 한창 예쁠 나이에 새 옷 한 벌을 못 사 입고, 데이트 한번 못 하고 매일매일 아르바이트에 쫓겨 살았다고.”

말하다 말고 수연은 목이 메었다.


“정말 미안해. 엄마라는 사람이, 내 대신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눈물을 쏟는 수연을 보고 시현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 어릴 때 이모가 저한테 어떻게 해주셨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수연이 작은아버지 댁에 가정부로 들어온 것은 시현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작은어머니가 저한테 설거지시키면 이모가 몰래 대신해주셨어요. 아현이가 잘못한 거 제가 뒤집어쓰고 혼나고 있으면, 시현이 잘못 아니라고 편들어 준 것도 이모예요. 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생리하고 무서워서 울었을 때, 괜찮다고, 시현이도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안아줬던 사람도 이모였고요. 이모가 없었으면 저 그 집에서 못 버텼을 거예요.”

그때부터 쫓겨날 때까지 7년 동안 수연은 시현에게 엄마나 다름없었다. 수연이 있어 주어서,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버틸 수 있었다.


“태하를 봤을 때, 이모 생각이 났어요. 저한테 엄마 대신 이모가 있어 줬던 것처럼, 저도 태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시현아…….”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아이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마음. 모두 수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저는 이모한테 받았던 사랑을 돌려줬을 뿐이에요.”

말끝에 결국은 시현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울고 있는 동안, 태하는 조용히 유리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울어.”

잠시 후, 태하가 두 여자에게 각각 티슈를 뽑아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도요. 어머니 울린 거 아시면 아버지가 절 죽이실걸요.”

시현은 울다 말고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지만, 레온의 얘기가 나오자 수연은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레온 아저씨하고는 얘기 좀 해보셨어요? 아저씨 말로는 쫓겨났다고 하시던데요.”

태하가 건네준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수연은 시선을 피했다.


“딱히 할 얘기도 없잖니, 이제 와서.”

“왜 할 얘기가 없어요.”

시현은 조심스레 말했다.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아저씨는 이모를 계속 그리워하셨던 것 같아요.”

순간 수연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지만, 금세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어.”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태하 엄마. 그 사람은 태하 아버지. ……그냥 그뿐이야.”

 

*

수연의 가게를 나와서 집을 향해 걸으며, 태하가 불쑥 중얼거렸다.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은 당신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아버지를 찾고, 이제 어머니까지 찾았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고.”

그제야 말뜻을 알아듣고 시현은 웃었다. 자기가 부모를 찾아서 내가 소외감이라도 느낄 줄 알았던 건가. 그 부모라는 게 레온이고 수연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문득 장난기가 일어서 시현은 물었다.


“만약에 수연 이모랑 나랑 싸우면, 너는 누구 편 들 거야?”

“당연히 당신 편이지.”

농담으로 한 말에, 태하가 더없이 진지하게 대꾸하는 바람에 웃음이 났다.


“어쩜 그렇게 딱 잘라 말해? 이모 들으면 서운하시겠다.”

“어머니한테는 아버지가 있잖아.”

태하가 작게 한숨을 지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셔.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 만나러 가신다고 거울을 열 번도 더 보셨다고. 그런데 어머니는…….”

“사실은 이모도 그래.”

우진이 바람피우는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었다. 속이 상한 나머지 수연을 붙들고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원래 다 그런 거겠죠? 아무리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도 세월이 지나면 무뎌지고,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소홀해지기도 하고…….]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수연은 생각 외로 단호하게 말했다.


[글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수연의 표정이 여태 생생하게 기억난다.


[난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여태 처음 만난 순간처럼 가슴이 뛰거든.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아.]

그때 시현은 생각했었다. 저 나이가 되어서도 누군가를 떠올리며 저런 표정을 할 수 있구나.


“그때는 그게 레온 아저씨 얘긴지 몰랐지.”

태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럼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피하시는 거지?”

“글쎄.”

그것만은 시현도 알 수가 없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조심해서 가.”

현관 앞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는데, 태하는 돌아서서 가는 대신 시현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

“너 가 봐야지. 레온 아저씨 혼자 외롭게 두면 어떡해?”

“아버지는 지금쯤 어머니를 어떻게 꼬실까, 고민하느라 외로울 겨를도 없으실걸.”

태하가 넥타이를 급하게 풀며 대꾸했다. 눈빛만 봐도 완전히 덮칠 기세여서, 시현은 어쩔 줄 몰랐다.


“그러지 말고 얼른 가. 내가 네 부모님을 다 아는데, 민망해서 어떻게 외박을 시키니?”

그러나 태하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시현을 달랑 들어서 침대에 눕혀 버렸다.


“잠깐만!”

“침대에서 자꾸 부모님 얘기할 거야?”

“태하야…… 꺅!”

 

 

*

태하가 시현과 함께 돌아가고, 가게에 혼자 남은 수연은 냉장고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왔다. 낮에 레온이 마트에서 사준 것이었다.


“…….”

케이크를 한참 바라보다 포크로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녹아들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기억 속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왜 이 달콤함은 질리지도 않는 것일까. 나이를 이만큼 먹었으면, 무뎌질 법도 한데.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며 수연은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겠다.

솔직히 기뻤다. 설레기도 했다. 그의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더 이상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연은 왠지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싫은 것이 아니라, 무서웠다.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한번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이, 그 후로는 물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독이 든 케이크와 같은 것이었다. 짧디짧은 달콤함 뒤에는 지독하게 기나긴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시현이 레온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미국 여자분하고 옛날에 한번 결혼하셨는데, 채 몇 년도 못 살고 이혼하신 후로 여태 혼자래요.]

이미 이혼한 지 오래라는데, 생각만 해도 울고 싶어졌다. 어떤 여자였을까,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에게 그랬듯이, 그녀도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렀을까.

어느덧 얼굴도 못 본 여자에게 질투하고 있는 자신이 수연은 끔찍하게 싫었다. 제 입으로 따라오지 말라고 말해놓고, 따라오니까 몰래 설레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오지 말라고 말해놓고, 하루 종일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혹시 그인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자꾸만 초라해지는 자신이 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고 싶어지는 자신이 싫었다.

레온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하나하나가 다 싫어서, 수연은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지금의 평온하고 소박한 생활이 좋았다. 아들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와서 굳이 다른 세상 사람이 된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부디 나를 흔들지 말아줬으면.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뒀으면.

속으로 그렇게 빌면서, 수연은 케이크 상자를 닫아 냉장고 속 깊은 곳에 밀어 넣어버렸다. 자꾸 한 입만 더 먹고 싶어지는 자신을 애써 무시하고서.

*



[늘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서 장 보러 다니는 거예요? 무거울 텐데.]

[내가 매일 와서 같이 가줘야겠다.]

기쁜 듯이 그렇게 말했던 남자는, 말과는 달리 그 후로 사흘 동안이나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레온 같은 사람이 언제까지 자신에게 목을 매달 이유가 없는 거였다. 자기 일도 바쁠 텐데.


‘포기도 참 빠르구나.’

괜히 쓸쓸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수연은 애를 썼다. 원했던 거잖아, 바보야.

그 사이 수연의 가게 건너편 건물에 뭔가 크게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랜드마트 X월 X일 OPEN]

공사 규모로 보아 대형마트 같았다. 현수막을 보고도 수연은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바로 앞에 마트가 생겼으니 앞으로 장보러 다니기는 편하겠구나.’

시장 상인들이 단체로 가게에 들이닥친 것은, 레온이 나타나지 않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의 일이었다.

혹시 또 행패를 부리러 왔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하는데, 사람들이 다짜고짜 수연을 붙잡고 매달렸다.


“사모님, 우리 좀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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