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카레집 알바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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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카레집 알바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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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카레집 알바의 정체
2022.07.05.
사람들이 다짜고짜 수연을 붙잡고 매달렸다.
“사모님, 우리 좀 살려 주세요!”
이게 무슨 소린가.
당황하는 수연에게, 시장 상인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대표로 설명을 했다.
수연의 카레 가게 바로 건너편에 대형마트가 기습 입점을 하게 돼서, 시장이 발칵 뒤집어졌단다. 알아보니 그랜드호텔이라는 곳에서 차리는 것인데, 지역에서 제일 큰 규모가 될 예정이란다.
가까이에 대형마트가 생기면 조그만 재래시장 따위가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어제 시장 상인들이 단체로 장사 접고 달려가서 호텔 앞에서 하루 종일 농성을 한 끝에 겨우 회장이라는 사람이 비서를 보냈단다.
[마트를 입점시키려면 먼저 주변 상권하고 협의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항의를 했더니 그 비서라는 사람이 한 말이 이랬다는 것이다.
[저희 회장 사모님께서 그 앞에서 식당을 하시는데, 마트가 너무 멀어서 하나 차리기로 했다고 하십니다. 사모님께서 시장에 못 가시게 된 사정은 여러분께서 잘 아실 테니 양해 부탁드린다는 전언이십니다.]
시장 상인들은 수연을 붙들고 싹싹 빌었다.
“저 마트 들어오면 우리는 다 굶어 죽어. 좀 살려줘요, 응?”
그중에는 전에 수연에게는 물건을 못 팔겠다며 쫓아냈던 채소 가게 사장님들도 있었다.
“우리가 민우 엄마 말만 듣고 너무 심했어. 이렇게 사과할게요.”
“그 여편네가 원래 없는 말도 잘 지어내는 사람인데, 우리가 그만 귀가 얇아서.”
“사모님이 원하시면 민우 엄마 끌고 와서 무릎이라도 꿇릴게요, 네?”
수연은 골치가 아팠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는 일인데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더욱 그랬다.
결국 수연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얘기는 한번 해볼게요.”
*
수연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호텔로 향했다. 로비로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특급호텔의 위용은 언제나 수연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 결국 수연은 프런트로 향했다.
“저, 혹시 케네디 씨를 좀 만날 수 있을지…….”
“네? 저희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프런트 직원이 당황한 눈으로 수연을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뭔데 우리 회장님을 찾나,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수연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 씨?”
돌아보자 레온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 황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태하는 출근했는데…… 설마 나 만나러 온 거예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 레온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환해졌다.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당신 뭐 먹고 싶어요? 우리 한식당 런치 코스가 아주 맛있는데. 아니면 지난번에 못 먹었으니까,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갈까요?”
들뜬 얼굴로 말하는 남자에게, 전에 보았던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귀띔했다.
“회장님, 오늘은 점심 식사 약속이…….”
레온은 비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꾸했다.
“취소해요.”
도저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수연은 점심은 됐고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레온은 그녀를 호텔 꼭대기에 있는 라운지로 데려갔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간단히 커피나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나온 것은 애프터 눈 티 세트였다. 은으로 된 3단 트레이에 얹힌 디저트 메뉴 하나하나가 너무 예뻐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마 손도 못 대고 있는 수연의 접시에, 레온은 과일 타르트니 초콜릿 케이크니 하는 것들을 자꾸만 얹어 주었다.
“이거 먹어 봐요. 단 거 좋아하잖아요.”
이 사람은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걸까, 자꾸만.
문제는 그녀가 여전히 좋아한다는 거였다. 단것도, 그리고…….
약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연은 본론을 꺼냈다.
“마트 입점 건 말이에요. 취소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레온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 사람들이 수연 씨한테까지 가서 부탁하던가요?”
“저더러 아내라고 말했다면서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수연은 한숨을 짓고 말했다.
“어쨌든 사과도 받았으니까 이만 없었던 일로 해 주셨으면 해요.”
처음부터 저 때문에 벌인 일이니까, 자신이 부탁하면 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온은 생각 외로 완강했다.
“안됐지만 다 결정된 사항이라. 이미 공사도 진행 중이고, 오픈 날짜도 잡혔으니 어쩔 수 없어요.”
어찌나 딱 잘라 거절하는지, 얼굴이 다 뜨거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당신은 취소할 수 있잖아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분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일이에요.”
“나한테는 모르는 사람들 생계 따위 중요하지 않아요.”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남자는 거절을 되풀이했다. 결국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부탁할게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 갖은 고생을 해온 수연은, 먹고사는 문제의 무거움을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다정하네요. ……나한테도 조금만 다정하면 좋을 텐데.”
조금 쓸쓸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냥은 안 되겠어요.”
수연은 제 통장의 잔고를 떠올려보았다. 겨우 몇백만 원 수준이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되고 있었지만 겨우 혼자서 먹고 살고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저렇게 큰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는 돈이 얼마나 들까, 하고 생각하는 수연에게 레온은 통보하듯 말했다.
“앞으로 한 달만 당신 가게에서 일하게 해줘요.”
수연은 말문이 막혔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겨우 말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다른 생각은 없어요. 그냥 옛날에 한국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했던 때가 생각나서, 한번 해보고 싶어졌을 뿐이에요.”
거짓말이라는 건 수연도, 물론 말하는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수연은 새삼스럽게 레온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고급 슈트를 입은 남자는 세련된 호텔 라운지 배경과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가난한 화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왜 모를까, 이 남자는. 이미 우리가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걸.
그러나 레온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당신이 허락만 해주면, 바로 공사 중단시키고 없었던 일로 할게요.”
허락하지 않으면 공사를 계속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달이에요.”
*
레온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것을 끝내 거절하고, 수연은 택시를 타고 가게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리자 가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여태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사모님?”
이 사람들도 무척이나 절박하구나. 수연은 새삼 레온에게 고개를 숙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얘기는 잘됐어요. 공사 중단하고, 모두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어요.”
시장 상인들은 수연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마음이 놓인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고마워서 어떡해. 우리가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아유, 이제 살았네.”
기쁨이 조금 가시자 이번에는 호기심이 인 모양이었다.
“근데 그렇게 큰 호텔 회장 사모님이 왜 이런 데서 가게를 하실까?”
“재미로 하시나 보다, 그렇죠?”
“너무 수수하셔서 우리는 그렇게 귀한 댁 사모님이신 줄도 몰랐네.”
아마도 부잣집 사모님의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 사람들과도 동네에서 계속 마주쳐야 할 텐데 오해를 하게 둘 수 없었다.
“그 사람, 제 남편 아니에요.”
“그럼?”
수연은 조금 망설이다 사실대로 말했다.
“제 아들의 아버지예요.”
상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여?”
“아유, 눈치하곤 참. 이혼했다는 거잖아!”
“이혼한 마누라 장보기 힘들다고 마트까지 차린단 말이야?”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숙덕거리는 사람들에게, 수연은 고개 숙여 부탁했다.
“저 사모님 아니고, 취미로 하는 일도 아니에요. 저도 장사해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무쪼록 저희 가게 많이 와주세요.”
*
죽다 살아난 시장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카레 가게 주인, 수연에게로 쏠렸다.
겨우 사십도 안 돼 보이는 젊은 여자가, 대체 무슨 사연으로 그런 큰 호텔 회장하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해서 손바닥만 한 식당을 하고 있을까?
대부분 4, 50대 이상으로 이루어진 시장 상인들은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수많은 드라마 시청으로 갈고닦은 실력이었다.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부자한테 시집을 갔다가 못 견디고 이혼한 거지 뭘.”
그들의 생각에 ‘회장님’이라는 것은 드라마에 나오는 늙은 재벌 총수였다.
“암, 세상에 돈이 전부인가? 나라도 수제비를 먹으면 먹었지 영감이랑은 못 살겠네.”
“근데 그 회장은 아직도 카레집한테 미련이 있나 베. 그러니까 돈으로 밀어붙이는 거 아녀?”
“근데 카레집은 애인 있잖아? 전에 같이 다니던 그 키 큰 외국인 말이야.”
“쯧쯧, 구질구질한 영감탱이.”
이리하여 수연은 늙은 재벌과 살다가 못 견디고 뛰쳐나와서, 가난한 젊은 애인과의 사랑을 선택한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쨌든 수연은 거대 자본의 횡포에서 그들을 구해 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인들은 앞으로 카레 많이 팔아 주자고 합의를 보는 동시에 그랜드호텔 불매에 나섰다.
여태까지도 가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절대 갈 일이 없을 것이다!
점심시간, 시장 아줌마들은 단체로 수연의 가게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앞치마를 두른 젊은 외국인이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훤칠하니 잘생겼다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입이 딱 벌어지는 미모였다.
뜻밖의 눈 호강에 신이 난 아줌마들은 외국인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했다.
“세상에, 톰 크루즈 같네그려.”
“뭔 톰 크루즈야, 브래드 피트 닮았구먼.”
“내가 보기엔 아랑 드롱 같은데?”
사실상 서양인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배우들이었지만, 어쨌든 미남이라는 소리였다.
심지어 이 외국인은 우리말도 기차게 잘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눈을 보고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 바람에 아줌마들은 단체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분명 같은 한국말인데, 왜 우리 집 남의 편이 떠들 때는 쉰 막걸리 같고 이 사람이 말할 때는 와인 향기가 물씬 나는 것인가!
“3번 테이블에 새우튀김 카레 셋, 돈가스 카레 둘 있어요.”
외국인은 주방으로 들어가서는 수연이 들고 있는 집게를 빼앗았다.
“이리 줘요. 내가 튀길게요.”
“됐으니까 저리 가요.”
쌀쌀맞은 수연과는 달리, 외국인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줌마들의 입에서 동시에 부러움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카레집은 복도 많지!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외국인의 손을 꼭 붙잡고, 아줌마들은 열렬히 말했다.
“힘내요, 우리가 응원할 테니까.”
“예?”
“절대 지지 말고 싸워서 이기란 말이야.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니까?”
“누구한테 말입니까?”
“아 왜 있잖아, 그랜드호텔 회장이란 영감탱이!”
순간 외국인이 움찔했지만, 아줌마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색이 그렇게 큰 호텔 회장이란 사람이 구질구질하기도 하지. 젊은 사람들끼리 이렇게 좋아하는데 늙은이가 어딜 끼어들어, 주책도 없이.”
“우리가 봤을 때, 카레집한테는 총각이 딱 어울려요.”
“암, 돈이 아무리 좋아도 사랑이 먼저지!”
그때 마침 가게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아줌마들은 깜짝 놀랐다. 호텔에서 봤던 회장 비서 아닌가!
‘그 회장이란 영감탱이가 어디다 도청기라도 설치를 해놨나?’
아줌마들이 단체로 겁을 먹는 순간, 비서는 앞치마를 두른 외국인을 향해 정중히 전화기를 건넸다.
“회장님. 중요한 전화여서 좀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