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 잘 데가 없어요 (81/181)


#81. 잘 데가 없어요
2022.07.08.


1658286285379.jpg

 
불타는 금요일 저녁, 원앱팀 전체 회식이 있었다.

시현을 비롯해서 이번에 승진한 사람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회식 장소인 그랜드호텔에서는 원앱팀 팀원들 모두가 탈 수 있게 차를 몇 대나 보내 주었다.

16582862853795.jpg

“어서 오십시오.”

호텔에 도착하자 총지배인이 직접 나와서 팀원들을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웨이터가 가져온 와인 세트를 가리키며 총지배인은 말했다.

16582862853795.jpg

“저희 회장님께서 마침 중요한 일정 때문에 귀한 손님들을 직접 맞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사과의 의미로 보내셨습니다.”

그 중요한 일정이라는 게 사실은 카레집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현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16582862853795.jpg

“혹시 과음하시는 분들을 위해 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편안한 마음으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총지배인이 나가고 나서, 사람들은 방금 받은 와인 세트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16582862853795.jpg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로마네 콩티야?”

16582862853795.jpg

“이야, 우리 회장님, 예비 며느리 사랑 확실하시네.”

누군가의 말에 태하가 딱 잘라 말했다.

16582862853816.jpg

“예비 며느리 아닙니다.”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말을 꺼낸 팀원은 물론, 시현도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지려고 하는 순간 태하가 이어서 말했다.

16582862853816.jpg

“아직 프러포즈도 못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강시현 과장님 입장이 곤란하지 않습니까.”

미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16582862853823.jpg

“그럼 본부장님은 시현 씨랑 결혼하고 싶으시다는 거네요?”

16582862853816.jpg

“내일 당장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현은 쥐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16582862853823.jpg

“그럼 왜 빨리 프러포즈 안 하시는 거예요?”

16582862853816.jpg

“혹시 거절당할까 봐 눈치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태하는 시현을 흘깃 쳐다보았다. 시현은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얼른 물 잔을 들어 마시는 척을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시현과는 달리 팀원들은 신이 났다.

16582862853795.jpg

“어머, 우리 본부장님 의외로 소심하시네!”

16582862853795.jpg

“강 과장, 어디 대답해봐. 본부장님한테 시집가고 싶어, 안 가고 싶어?”

짓궂은 눈빛이 시현에게 쏟아졌다. 곤란해진 시현이 우물쭈물거리자, 팀원들은 의아한 모양이었다.

16582862853795.jpg

“뭐야, 왜 망설이고 그래?”

16582862853795.jpg

“그러게. 말 나왔을 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덥석 물어야지!”

당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뭐 하느냐는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시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16582862853816.jpg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러다 거절당하면 책임지실 거 아니잖습니까.”

결국은 태하가 팀원들을 말려야 했다.

16582862853823.jpg

“걱정 마세요, 본부장님. 제가 책임지고 팍팍 밀어 드릴게요!”

호쾌하게 가슴을 두드려 보이는 미주를, 태하가 대단히 믿음직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6582862853816.jpg

“이미주 대리님,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16582862853823.jpg

“영광이에요!”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 레스토랑에서 벌써 몇 번이나 식사를 한 시현이 보기에도 오늘은 메뉴 하나하나 각별히 신경을 쓴 티가 났다. 귀한 손님이라고 주방에까지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평소보다 훨씬 맛있게 먹어야 할 텐데, 정작 시현은 맛을 잘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태하가 한 말들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16582862853816.jpg

[내일 당장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16582862853816.jpg

[혹시 거절당할까 봐 눈치 보고 있는 중입니다.]

태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16582862853795.jpg

“아 참, 근데 다들 이보라 씨 결혼식 가실 거예요?”

누군가가 말하는 바람에 시현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16582862853795.jpg

“어차피 가 봐야 나중에 돌려받지도 못할 텐데, 이거 고민 때리네.”

16582862853795.jpg

“그렇다고 안 가기도 뭐하고, 애매하지?”

보라는 청첩장을 돌리면서 곧 퇴사할 거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어차피 퇴사할 사람의 결혼식에 황금 같은 주말을 허비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팀원들은 대표를 한 사람 뽑아서 축의금을 전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6582862853795.jpg

“대표로 갈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서 사다리 타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시현은 속으로 약간 조마조마했다. 내가 걸리면 어떡하지?

보라에게는 원하면 부케도 받아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그거야 그냥 한 소리고, 사실 참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남자와 바람을 피운 여자의 결혼식에 간다면, 보통은 훼방을 놓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시댁 식구에게 폭로를 한다든가, 하다못해 보란 듯이 흰옷을 입고 가서 떡하니 신부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든가.

하지만 시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예 관심이 없으니 망칠 생각도 없다. 만약에 신랑이 우진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굳이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보라를 보면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래저래 그 결혼식에는 안 가는 게 최선이다.

다행히도 사다리 타기 결과 걸린 것은 미주였다. 미주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썩어들어갔다.

16582862853823.jpg

“아니 제가 왜 그 꼴을 보러 거기까지……!”

시현은 얼른 미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얼굴을 봐서 참아, 하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하와 사귄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로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눈치였다.

16582862853795.jpg

[강시현 과장은 부모도 없다며?]

16582862853795.jpg

[어쩌다 남자 하나 잘 물어서 완전히 팔자 고쳤네.]

그런 소리 듣는 것도 피곤한데, 보라와의 일까지는 웬만하면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었다. 딱히 알려져서 좋은 일도 아니니까.

회식이 끝나고 팀원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원 호텔 측에서 제공하는 룸으로 올라갔다.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특급호텔에서 공짜로 묵어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16582862853795.jpg

“강시현 과장 덕분에 오늘 제대로 호강했네. 승진 다시 한번 축하해.”

16582862853795.jpg

“잘 먹었습니다, 본부장님!”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사라지자 시현과 태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16582862887689.jpg

“저기, 나도 이만 가볼게. 아저씨 오시면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시현은 태하의 넥타이핀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을 때부터.

그러나 태하는 시현의 손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6582862853816.jpg

“나 방에 데려다줘.”

시현은 순순히 그를 따랐다. 어차피 레온이 곧 올 텐데 별일이야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16582862853816.jpg

“혹시 아까 내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서 곤란했어?”

잠시 후 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82862887689.jpg

“아냐, 곤란하긴.”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16582862887689.jpg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 너 아직 결혼하긴 너무 이른 나이잖아.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내 나이 때문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16582862853816.jpg

“내가 급해서 그래.”

태하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16582862853816.jpg

“나는 어릴 때부터 당신과 결혼하는 게 꿈이었어. 수천, 수만 번도 더 생각했다고. 대체 이 이상 어떻게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겠어?”

그는 시현의 손을 꼭 잡고 호소하듯 말했다.

16582862853816.jpg

“이렇게 매일 저녁 헤어져야 하는 게 괴로워. 잠들기 전까지 얼굴 보고 싶고, 아침에 같이 눈뜨고 싶어.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 하는 거야?”

16582862887689.jpg

“…….”

16582862853816.jpg

“당신은 전부터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했잖아. 왜 나하고는 아니야?”

시현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길을 피하자 태하는 거절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82862853816.jpg

“……멋대로 밀어붙여서 미안. 내일 회사에서 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 문을 여는 태하를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속으로만 삼켰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16582862887689.jpg

“마음이 급한 건 나야.”

놀란 듯이 굳어진 등에 대고, 시현은 고백했다.

16582862887689.jpg

“윤태하, 이렇게 멋지잖아. 사실은 이러다 누구한테 빼앗길까 봐 불안해.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나타날까 봐 겁도 나고, 네가 나이 많은 나한테 금세 질려버릴까 봐 걱정도 돼.”

아까 마신 와인 한 잔에 기대어, 시현은 처음으로 유치한 마음을 솔직하게 입에 담았다.

16582862887689.jpg

“근데 난 어른이잖아. 내 욕심만 부릴 수는 없는 거니까…….”

시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태하가 등을 돌리자마자 입 맞춰 왔기 때문에.

16582862892781.jpg

 
호텔 복도였다. 누가 보면 어쩌나, 겁이 나서 시현은 어떻게든 피하려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태하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도망치는 입술을 집어삼키듯 빨고, 달콤한 꿀을 탐욕스레 삼켰다.

16582862853816.jpg

“……아직도 그렇게 혼자만 어른이지, 강시현.”

한참 후, 입술을 뗀 그가 귓가에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16582862853816.jpg

“들어와. 누가 진짜 어른인지 보여줄 테니까.”

시현은 놀라서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16582862887689.jpg

“미쳤나 봐, 아저씨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한 팔로 시현을 꽉 껴안은 채, 태하는 나머지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16582862853816.jpg

“아버지.”

그는 전화에 대고 잘라 말했다.

16582862853816.jpg

“죄송하지만 오늘은 안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

레온은 매일 아침 가게 문 열기 전에 출근해서, 저녁에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서야 돌아갔다. 그지없이 성실한 근무태도였다.

처음에는 그의 존재가 불편하기만 했던 수연도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손님이 확 늘어나는 바람에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는 혼자서 요리부터 서빙, 설거지까지 다 했는데, 이제는 시장 상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덕에 좁은 가게가 미어터질 지경이라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슈트를 입고 호텔에 있을 때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 사람 같았는데, 가게에서 일하는 레온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옛날에 그녀가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라고, 저 사람은 그때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바빴다. 레온은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서빙을 하고, 저녁에 설거지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야 수연과 함께 가게에서 나왔다.

직접 셔터를 내려 주는 듬직한 팔뚝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수연은 작별인사를 했다.

16582862896632.jpg

“고생 많았어요. 내일 봐요.”

레온은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물었다.

16582862896636.jpg

“나 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당신 방에서 커피 한 잔 줄래요?”

유혹하는 듯한 말투에 수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동요를 감추느라 그녀는 일부러 딱딱한 얼굴을 했다.

16582862896632.jpg

“조심해서 가요.”

잘라 말하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레온이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16582862896636.jpg

“그래, 아들. 무슨 일이니? ……뭐라고?”

아들이라는 말에 수연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16582862896636.jpg

“이걸 어쩌지.”

금세 전화를 끊은 레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6582862896636.jpg

“잘 데가 없어졌네.”

혼잣말치고는 너무 큰 목소리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