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소리치고, 욕하고, 원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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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소리치고, 욕하고, 원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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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소리치고, 욕하고, 원망해요
2022.07.12.
“이걸 어쩌지.”
금세 전화를 끊은 레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 데가 없어졌네.”
혼잣말치고는 너무 큰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태하가 왜요?”
“지금 시현이하고 함께 있는 모양이에요. 오늘은 단둘이 있고 싶은지, 나더러 들어오지 말라고 하네요.”
곤란한 표정에 덩달아 어쩌지, 하고 생각하다 수연은 금세 이 사람이 바로 그랜드호텔 주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호텔에 방 많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금요일 밤이에요. 빈방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다른 호텔로 가요.”
“다른 호텔도 똑같이 금요일인데.”
“그럼 모텔이라도 가면 되잖아요!”
“금요일 밤.”
수연은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했다.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놈의 금요일 밤이다.
“큰일이네. 길에서 잘 수도 없고.”
레온이 크게 한숨을 쉬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무슨 생각인지 뻔히 보여서 수연은 덜컥 겁이 났다. 이 커다랗고, 상냥하고, 저와 눈만 마주치면 기쁜 듯이 눈매를 휘어뜨리는 남자가 수연은 자꾸만 무서웠다.
그녀가 애써 높이 쌓아놓은 벽을 아무렇지 않게 훌쩍 뛰어넘어 올까 봐.
뛰어넘어 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멋대로 사라져버릴까 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일부러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레온은 실망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냥 오늘 밤은 태하랑 시현이랑 셋이 자는 수밖에…….”
“뭐 하는 거예요?”
전화를 걸려는 레온의 팔을, 수연은 놀라서 붙잡았다.
“모처럼 젊은 사람들끼리 단둘이 있겠다는데 부모가 돼서 방해하면 어떡해요?”
“그럼 어떡해요, 잘 데가 없는데.”
시무룩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온의 뒤에 왠지 커다란 꼬리가 아홉 개쯤 보이는 것 같았다.
수연이 아는 호텔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옛날에 청소 일을 했던 비즈니스호텔 수준이었다.
레온이 태하와 함께 사용하는 객실은 침실 두 개에다 넓은 거실까지 있는 스위트룸이어서, 혹 진짜로 셋이서 자게 되더라도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미처 몰랐다.
여태 엄마라고 자식한테 해준 것도 없는데, 연애까지 방해할 수는 없다.
수연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딱 잠만 자고 나가는 거예요.”
*
다섯 평 남짓한 작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레온은 마치 심장을 찔린 사람 같은 표정을 했다.
“…….”
이런 곳에 사람이 어떻게 사나, 하고 생각하겠지. 제 사는 꼴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서, 수연은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이부자리를 따로따로 펴고 누웠다. 최대한 떨어져서 눕는다고 누웠는데도, 방이 워낙 좁으니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그럼 자요.”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작은 방을 채웠다. 수연은 레온에게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마구 뛰어서 그에게 들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설레서가 아니라 불안해서였다.
만약에 그가 손을 뻗어 오면 뿌리칠 수 있을까.
안으려고 하면 밀어낼 수 있을까.
다행히 레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어서 잠들었나, 했는데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네요, 얼굴이 안 보이니까.”
수연은 잠시 생각했다. 무슨 뜻일까.
혹시 내가 많이 변했다는 걸까. 그래서 등을 돌리고 있으니까 이제야 자신이 사랑했던 그 여자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씁쓸해지려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만나면 하려고 연습했던 말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그런데 얼굴만 보면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수연의 등 뒤에서 레온은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우리 아이, 포기하지 않고 낳아줘서 고마워요.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수연은 중간에서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됐으니까 그만하고 자요. 피곤해요.”
고백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남자가, 안타까운 듯이 물었다.
“당신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나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왜 그렇게 영어를 열심히 배운 거죠?”
“태하 때문에 배운 거예요. 태하가 미국인으로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수연은 잘라 말했다. 마치 그와 영어로 이야기하는 상상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듯이.
사실 태하 때문에 영어를 배운 건 맞지만, 그녀의 기억 속 태하는 옹알이조차 하기 전인 갓난아기였다. 그러니 자연히 늘 상상 속 대화 상대는 레온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레온을 향해 수많은 말을 했다.
우리 아기 잘 있어요?
이름은 뭐예요? 키는 많이 컸나요?
엄마가 없어서 속상해하지는 않고요?
왜 데리러 안 왔어요? 나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정말로 나를 다 잊어버렸나요?
그러나 이제 와서는 모두 다 덧없는 말들일 뿐이었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태하 얘기가 나오자 레온의 목소리에 금세 아픈 기색이 어렸다.
“사과할 거 없어요. 당신은 태하가 있는 줄도 몰랐다면서요.”
수연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고 눈을 감았다.
“피곤하네요. 그만 얘기하고 자요.”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이었지만, 남자는 끈질겼다.
“나 많이 미워했죠?”
“다 지난 일일 뿐이에요.”
차갑게 대꾸하는 수연의 감은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기저기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살았던 수연은 누군가와 방을 함께 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늘 들키지 않게 소리 죽여 울다 보니, 어느덧 혼자 있을 때도 소리 내지 않고 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수연은 흐느낌을 삼키려 이를 악물었다. 제발 모른 척해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소리도 못 내고 울지 말아요.”
조용히 들썩이는 어깨에, 레온이 가만히 손을 얹었다.
“마음껏 소리치고, 욕하고, 원망해요.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수연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얹힌 손을 난폭하게 뿌리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제 와서 들어준다고 뭐가 달라져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요?”
알고 있다. 이 사람의 탓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알면서도 원망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몰랐다고만 하면 그만인 건 아니지 않은가. 진작 데리러 왔더라면 아이를 뺏길 일도, 죽은 사람이 되어 살아갈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기다려달라고,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결국 그였다.
나라면, 내가 당신이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아왔을 텐데!
“태하 빼앗기고 난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어. 가슴을 펴고 걸어본 적도 없어. 내 이름마저 잃고, 아파도 병원 한 번을 못 가고 살았어. 그나마 시현이라도 만나서 태하 대신 정을 붙였으니 살았지, 그 애가 없었으면 난 벌써 죽었을 거야.”
한번 터져 나온 말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건드려.
수연은 정신없이 독설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나는 늦게라도 대학에 갔을 거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서 아이 낳고 내 손으로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스무 살에 레온을 만난 후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야 했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난 내 아이가 걸음마 하는 것조차도 보지 못했어. 당신 때문에!”
안으려고 팔을 벌리는 남자의 넓은 가슴을, 수연은 주먹을 쥐어 힘껏 때렸다. 애교 따위가 아니라 진심 어린 주먹질이었다. 분명 꽤나 아플 텐데,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주먹을 견뎠다.
결국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수연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왜 나는……!”
왜 나는 후회되지 않는 거지.
왜 당신이 밉지가 않은 거지.
아무리 애써도, 왜.
“용서해달라고는 안 해요.”
얼굴을 감싸고 우는 수연을, 레온이 꼭 껴안았다.
“그냥 내가 용서를 빌 수 있게, 곁에 있게만 해줘요.”
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제발 나한테 기회를 줘요.”
넓은 품 안에서, 수연은 아주 오랜만에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
살금살금. 아현은 발소리를 죽여 방에서 나왔다.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저승사자 같은 엄마 화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어디 가는 거니?”
움찔 놀란 아현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친구랑 브런치 먹기로 했어.”
“당장 취소해. 이따 저녁때 선 보러 나가려면 숍이라도 가야 할 것 아냐?”
“선 보기 싫다고 했잖아.”
“아니 대체 왜 선을 안 보겠다는 거야!”
기어이 화란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도 벌써 스물여덟이야, 이것아. 자칫 정신 놨다간 금세 서른이라고! 여태 시현이 그 계집애 시집가는 것만 기다리다 나이 먹은 거 억울하지도 않니? 응?”
외동딸인 아현을 떡하니 재벌가나 권력자 집안에 시집보내서 사모님으로 만드는 것이 화란의 지상목표였다.
이쪽은 상대적으로 집안이 좀 떨어지지만 다행히 아현의 미모가 뛰어나서, 아주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벽창호 같은 남편이란 인간이 죽어도 조카딸인 시현을 먼저 시집보내야 한다고 우기지만 않았던들, 대학 재학 중에 벌써 결혼을 시켰을 것이다.
[저 우진 오빠랑 파혼했어요.]
시현이 자기는 언제 결혼할지 모르니 아현이부터 보내시라고 선언한 후부터, 화란은 본격적으로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런데 정작 이번에는 아현이 시큰둥한 것이다. 기껏해야 중소기업 대표인 저희 형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혼처를 찾아와도 싫다고 버티니 화란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혹시 엄마 몰래 남자 만나는 거니? 응?”
“아 좀만 기다려보라고. 짜증나게 들들 볶지 말고.”
“대체 누군지 알아야 기다리든 말든 할 것 아냐!”
펄펄 뛰는 제 엄마를 모른 체하고 아현은 집을 나와 버렸다.
“강아현! 너 거기 못 서?”
슬리퍼 바람으로 뛰쳐나오는 화란을 피해서, 아현은 얼른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고 기사를 재촉했다.
“그랜드호텔. 빨리 가요.”
“예, 아가씨.”
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아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있기는 있었다. ……얼굴 빼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문제지.
사촌 언니인 시현의 상견례가 있던 날, 그랜드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남자.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아현은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렸다.
딱 봐도 시현과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시현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딱 잘랐다. 얄미운 것은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언니랑 사귈 거 아니라며. 그럼 못 알려 줄 이유도 없잖아?]
[그렇다고 너 같은 애랑 얽히게 만들고 싶지도 않거든. 내가 걔랑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놀리듯 말하던 걸 떠올리면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부터 여태껏 아현은 오로지 그 남자 생각뿐이었다. 혼담이 오가고 있던 상대들도 모두 정리했고, 엄마인 화란이 뻔질나게 물어 오는 선 자리도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 비하면 다른 남자들 따위 흙 묻은 돌멩이같이 보일 뿐이었다.
첫눈에 반했는데, 그 남자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되겠는데.
문제는 이름도, 성도, 나이도, 아무것도 몰랐다. 호텔 직원들이 양쪽에 도열해서 맞이했던 걸 보면 꽤나 대단한 VIP인 것 같았는데, 그 외에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후 아현은 뻔질나게 그랜드호텔에 드나들고 있었다. 툭하면 호캉스와 힐링을 핑계로 숙박을 했고, 친구들과 만날 때도 무조건 약속장소는 그랜드호텔이었다.
자주 다니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운명적으로 마주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아현아, 여기!”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친구를 향해 다가가다 아현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마침 저만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멀찍이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현이 여태 꿈에도 그리던 그 남자였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드디어……!
남자를 찾아냈다는 기쁨에 휩싸여, 아현은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한참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가 여자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바람에 겨우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었잖아?’
아현은 저도 모르게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현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