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장롱 안의 남자 (83/181)


#83. 장롱 안의 남자
2022.07.15.



 
남자와 함께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현 언니……?”

아현은 어이가 없었다.

저 남자 때문에 파혼한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시현은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었었다.


[그럼 앞으로도 그 남자랑은 사귈 일 없겠네?]

[없어.]

그렇게 딱 잘라 말하더니, 사실은 호텔까지 들락거리는 사이였다니. 시현을 쳐다보는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친구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프런트로 향하는 태하를 보고,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 저 남자. 되게 닮았네?”

아현은 급히 물었다.


“누구를 닮았다는 거야?”

“케네디 회장 말이야.”

“그게 누군데?”

“모른단 말이야? 지금 재계에서 제일 핫한 사람인데?”

대답은 안 하고, 친구는 아현을 은근히 무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희 아버지 회사 규모 정도면 재계 이슈까지는 잘 모를 만도 하겠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니까?”

“얼마 전에 이 호텔 인수한 사람이잖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큰 회사 오너의 손녀인 친구는 새삼 뽐내는 투로 말했다. 나는 너 따위랑은 격이 다르다는 듯한 말투였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헤지펀드 회장이야. 미국 기업들은 물론이고 한국 회사에도 여럿 투자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랜드호텔 인수하면서 한국에서 직접 사업 시작했다더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이 호텔 옆에 있는 백화점도 인수 절차 밟고 있는 중이래.”

하지만 사업 따위는 아현의 관심 밖이었다. 궁금한 것은 저 남자가 대체 그 케네디 회장이라는 사람과 무슨 관계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진짜 많이 닮았네. 한국에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그 아들인가?”

프런트에 들렀다가 나가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사진 보니까 케네디 회장은 엄청 젊어 보이던데. 저렇게 큰 아들이 있을 리가 없는데.”

순간 아현은 머릿속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그날, 저 남자와 시현이 마주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여긴 웬일이야?]

[오늘 상견례 했거든, 여기 레스토랑에서. 너는?]

[아버지 일 때문에.]

호텔 직원들이 마중까지 나와서 남자를 맞이하던 장면도 떠올랐다.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풀렸다.

틀림없다. 저 남자가 바로 이 호텔 오너의 아들이다!


“왜, 첫눈에 반했어?”

갑자기 조용해진 아현을 보고, 친구가 놀리듯 말했다.


“어떡하니, 토요일 아침에 여자랑 같이 나오는 거 보면 여자친구인 모양인데.”

하지만 친구는 아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인 화란은 외동딸인 아현에게 무척이나 집착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유명 사립학교에 보내며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일찍부터 재벌가 자제들과 어울리며 상류사회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엄연히 서열이라는 게 존재했다. 재벌가 자제들은 기껏해야 중소기업 대표의 딸인 아현을 자기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생일파티 같은 데 초대받아도, 맨 구석 자리에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 오기 일쑤였다.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아현은 같이 자란 사촌 언니인 시현을 괴롭히는 것으로 풀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즐거운 것은 시현에게서 뭔가를 빼앗는 일이었다.

학용품이든 옷이든 신발이든, 늘 아현에게는 시현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물건들이 주어지곤 했지만 아현은 매번 사촌 언니인 시현이 가진 것에 탐을 냈다.


[엄마, 나 언니 거 갖고 싶어, 응? 저게 더 좋단 말이야!]

아현이 심통을 부리고 떼를 쓰면 엄마인 화란은 늘 시현을 야단쳤다.


[언니가 됐으면 동생한테 양보할 줄 알아야지?]

어린 나이에도 아현의 집에 얹혀산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시현은 순순히 제 것을 내놓곤 했다. 그러면서도 속상한 표정은 감추지 못해서,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제일 짜릿했다.

시현에게서 빼앗은 물건은 애초에 대단한 것들도 아니었기에 금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곤 했지만, 빼앗은 순간의 만족감만은 오래오래 남았다.

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더 갖고 싶지.”

한층 더 남자가 탐이 났다. 저 남자를 빼앗으면, 시현의 표정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짜릿해서 몸이 떨려왔다.


“아우, 나쁜 계집애.”

친구가 깔깔거렸다.

아현은 호화롭게 반짝이는 호텔 안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치 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호텔에서 나와서도 시현은 여태 비몽사몽이었다. 간밤에 워낙 시달린 탓에 좀처럼 잠이 깨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시현에게, 태하는 차에 타자마자 입맞춤을 퍼부었다. 눈꺼풀에, 뺨에, 코 끝에, 머리칼에.


“많이 피곤해?”

밤새 그녀를 못살게 군 남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새삼 미안한 얼굴을 했다.


“늦잠 자게 놔뒀어야 하는데, 미안.”

“괜찮아.”

시현은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근데 아침부터 이모한텐 왜 가는 거야?”

“변호사하고 오전에 약속을 잡아놨거든. 어머니 점심 장사 하셔야 하니까, 그전에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변호사는 왜?”

“어머니, 아직도 사망자 상태로 계시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게 놔둘 수 없어. 이름도 찾고, 앞으론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해드려야지.”

수연을 생각하는 태하의 마음이 느껴져서 시현은 무척 기뻤다.


“오구, 우리 태하 기특해라!”

시현이 팔을 벌리자 커다란 남자가 얌전히 품에 안겨 왔다. 시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는 망설이듯 물었다.


“정말로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야?”

어젯밤 내내 침대 위에서 그녀를 못살게 굴며 묻던 질문이었다. 시달리다 못해 하마터면 ‘할게, 한다고, 하면 되잖아!’ 해버릴 뻔했지만, 시현은 끝까지 참아냈다.

아무리 끈질기게 굴어도 이것만은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태하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물론 기쁘고,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결혼을 결정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나이다.

게다가 옛날부터 자신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귄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좀 더 사귀다 보면, 혹은 태하가 나이를 몇 살 더 먹게 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덜컥 결혼부터 했다간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어린 마음에 너무 섣불리 결정했다고.

그래서 시현은 섣불리 그래 결혼하자, 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태하의 부모님 두 분 다, 자신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분들이었기에 더 그랬다.


“……미안. 결혼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자.”

시현은 태하를 안았던 팔을 풀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맙게도 태하는 더 이상 시현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시현의 손을 힘주어 꼭 잡고 중얼거렸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당신이 나한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아무 잘못도 없는 태하가 제 탓으로 돌리는 게 안타까워서, 시현은 말했다.


“그런 문제 아닌 거 알잖아.”

“그런 문제야. 당신은 혹시 나중에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그때가 되면 내가 너무 섣불리 결정했다고 후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태하는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할게.”

시현의 손등에 소중하게 입을 맞추고 제 뺨에 가져가며, 태하가 속삭였다.


“당신이 백 퍼센트, 나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말이야.”

 

*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몽롱한 가운데서 실눈을 뜨자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옆에 비스듬히 누워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칼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져서, 갈색 머리는 마치 황금으로 뽑아낸 실처럼 보였다.

웃음기 어린 눈매가 너무나 다정해서 수연은 덩달아 생긋 웃었다. 아주 가끔씩 꾸는,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레온이 얼떨떨한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 지금 나한테 웃어준 거예요?”

기쁜 얼굴로, 레온은 수연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순간, 수연은 현실로 확 끌려나왔다.


“……!”

기겁을 해서 몸을 일으키자 레온이 실망한 얼굴을 했다. 역시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계를 보자 벌써 오전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늦었어요. 빨리 일어나서 가게 문 열 준비해야 해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얼른 돌아서서 이불을 개고 있는데, 등 뒤에서 끌어안겼다.


“어젯밤엔 꼭 꿈만 같았어요.”

수연을 꼭 안고 레온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내 곁에서 잠들어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달콤함에 빠지지 않으려고 수연은 애를 썼다. 밀어내야 하는데, 뿌리쳐야 하는데. 하지만 생각뿐,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안겨 있을 때, 문득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아직 주무세요?”

수연은 깜짝 놀라 레온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레온도 당황한 얼굴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태하?”

이어서 시현의 발랄한 목소리도 들렸다.


“이모, 저희 왔어요!”

수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침부터 둘이 한 방에 있는 걸 본다면……!


“빨리 숨어요!”

레온이 항의했다.


“내가 왜 숨어야 하죠?”

“같이 있는 거 보면 애들이 오해할 거 아니에요?”

“아니, 오해 좀 하면 어때서…….”

“빨리요!”

강제로 레온을 장롱 안에 밀어 넣고, 수연은 협박했다.


“들키면 두 번 다시 당신 얼굴 안 볼 거예요. 숨소리도 내지 말아요.”

레온이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장롱 문을 단단히 닫고 나서 수연은 문을 열었다. 태하와 시현이 나란히 서서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웬일로 이모처럼 부지런한 분이 늦잠을 다 주무셨어요?”

수연은 억지웃음을 짓고 두 사람을 방으로 맞아들였다.


“어제 금요일이었잖아. 손님이 많아서 피곤했나 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평소 같으면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겠지만, 지금의 수연은 그저 장롱 안의 남자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니?”

시현이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오늘 가게 문 조금만 늦게 여시고, 저희랑 어디 좀 같이 가요.”

“어디?”

“태하가 변호사하고 약속 잡아놨대요. 이제 숨어 살 이유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망신고 된 거 바로잡아야죠.”

“바쁜데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썼니. 내가 알아서 해도 되는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연에게, 태하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빨리 법적으로도 어머니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수연은 가슴이 벅찼다. 우리 태하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는구나. 기뻐서 활짝 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아저씨는요? 어제도 늦게까지 일하셨어요?”

시현이 레온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수연은 금세 또 간이 콩알만 해졌다.


“어? 응.”

“집은 잘 찾아 가셨나 모르겠네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집?”

수연은 영문을 몰라서 태하를 쳐다보았다.


“어제 아버지가 밖에서 주무시게 돼서요. 마침 제가 살던 원룸이 그대로 비어 있어서, 거기서 주무시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그제야 수연은 레온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데가 없다고 엄살을 떨더니!

저도 모르게 장롱이 있는 쪽을 흘겨보는 순간, 그 안에서 억눌린 기침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서 수연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나도 들었어. 뭐지?”

시현과 태하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글쎄,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수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어쨌든 나가서 조금만 기다리렴. 얼른 세수하고 옷만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네, 어머니.”

태하와 시현이 몸을 일으켰다. 수연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갑자기 태하가 불쑥 손을 뻗어 장롱문을 열어젖혔다.


“……!”

장롱 안에 웅크리고 있던 레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버지?”

“레온 아저씨?”

레온이 아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우리 효자 왔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