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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전쟁이다 (84/181)


#84. 전쟁이다
2022.07.19.



 
레온이 아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우리 효자 왔니?”

툭툭 털며 장롱에서 나오는 레온을 보고, 태하와 시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수연이 굳어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태하가 민망한 듯이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레온이 미소를 지은 채 대꾸했다.


“알았으면 얼른 시현이 데리고 나가보렴. 변호사한테는 내가 데려갈 테니 걱정 말고.”

“예, 아버지.”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수연은 방을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가게 문을 열고, 주방에 숨어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자식들 앞에서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일까!

잠시 후, 가까이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

수연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울먹였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다고 태하한테도 말해줘, 응?”

시현이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하한테는 어머니고 아버지잖아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이 나이에 아직도 설렌다는 것이 부끄럽다.

못난 부모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태하가 지옥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마음을 여태껏 접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다.

그 사람 앞에서는 아직도 여자라는 게 부끄럽다.

온통 부끄러운 일뿐이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연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다, 시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모는 아저씨가 싫으세요?”

“……싫지 않아.”

수연은 처음으로 진심을 꺼내 보였다.


“그러면 왜 아저씨 마음 안 받아주시는 거예요?”

“무서워서 그래.”

오히려 친아들보다, 딸 같은 시현에게 속마음을 말하는 것이 더 쉬웠다.


“우린 이제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잖아. 도저히 내가 만나면 안 될 사람 같아. 괜히 좋아했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

“이모 마음, 알 것 같아요. 저도 태하랑 사귈 때 많이 무서웠거든요.”

시현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태하는 저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수연은 귀가 번쩍 띄어서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시현인 뭐라고 대답했니?”

“아직 대답 못 했어요. 태하, 저한테 너무 과분한 상대잖아요.”

시현이 씁쓸하게 웃어서, 수연은 안타까웠다.


“왜 그런 말을 하니? 우리 태하는 시현이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제가 보기엔 아저씨도 이모 아니면 안 되는걸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 수연에게, 시현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조금씩만 용기 내봐요, 이모.”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

월요일 아침에 출근한 시현은, 채 사무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중간에서 붙들려 그대로 빈 회의실로 납치당했다.

이 부서 저 부서 할 것 없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시현을 탈탈 털 기세로 눈을 반짝였다.


“강시현 과장, 결혼한다며? 원앱팀 회식 때 윤태하 본부장님이 그러셨다던데!”

시현은 감탄했다. 회식이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월요일 아침에 벌써 소문이 퍼져 있다니.

게다가 태하는 그냥 결혼하고 싶다고 한 것뿐이었는데, 마치 금세 청첩장 돌릴 것처럼 굴고 있었다.

시현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어쩌다 얘기가 나온 것뿐이에요. 아직 사귄 지도 얼마 안 됐는걸요.”

“어머, 그럼 사실이란 거네!”

대체 말을 어디로 듣는 건지, 사람들은 제멋대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근데 전부터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왜 전에 시현 씨 전 약혼자 어머니가 회사에 쳐들어왔을 때, 본부장님이 그러셨잖아? 시현 씨가 약혼자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었다고 말이야. 그럼 대체 본부장님이랑은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시현은 대답 대신에 어색하게 웃었다. 비록 이제 공인된 커플이라고 해도, 태하가 어릴 때부터 만난 사이라는 것까지는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도 분명히 색안경을 쓰고 볼 사람들은 있을 테니까.

시현이 말하지 않자 사람들은 한층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에이, 얘기 좀 해봐봐, 응?”

“우리도 좀 같이 알자.”

다행히 마침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죄송해요, 저 전화가 와서요.”

시현은 통화를 핑계로 얼른 회의실을 나와서 도망쳤다. 전화를 걸어 온 것은 레온이었다.


“어, 아저씨!”

레온의 목소리를 들은 시현의 얼굴이 반가움에 활짝 펴졌다.


- 시현이, 오늘 저녁에 혹시 스케줄 있니?

“아뇨, 따로 없어요.”

- 잘됐네. 혹시 이따가 나하고 같이 백화점에 좀 가줄 수 있을까?

“그러죠 뭐. 근데 백화점은 왜요?”

- 로즈한테 줄 선물을 사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보다는 시현이가 취향을 잘 알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로즈요?”

- 아.

레온은 조금 민망한 듯이 대답했다.


- 옛날에 태하 엄마를 그렇게 불렀거든, 내가.

시현은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제 같이 있는 걸 들켰다고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던 수연이나, 애칭을 부르며 수줍어하는 레온이나, 옆에서 보기에는 둘 다 귀엽기가 말도 못 했다.


“아저씨 너무 스위트하신 거 아니에요?”

놀리듯 말하자 레온이 허둥지둥 통화를 마무리했다.


- 그러면 이따가 우리 호텔 옆에 있는 백화점에서 보자.

 

*

시현은 퇴근 후 레온과 약속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백화점을 돌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명품 브랜드가 아닌 패션 주얼리 코너에서 모녀가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반지를 고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근데 이거 너무 비싸지 않아?”

“다른 것도 아니고 수능 백일 반진데, 마음에 드는 걸로 사야지 시험을 잘 볼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벌써 8월이었다. 수능 D-day 백일이 가까웠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고3 때가 떠올라서 시현은 조금 씁쓸해졌다. 친구들이 모두 부모님께 받았다며 반짝이는 새 반지를 끼고 와서 자랑할 때, 시현은 내내 책상 아래 맨손을 감추고 있어야 했다.

다정한 모녀를 부럽게 바라보다 시현은 고개를 돌려 진열장 안을 바라보았다.

왕관 모양에 깨알만 한 빨간 보석이 박힌 금반지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고3 때 시현이 갖고 싶어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이 반지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판매원이 친절하게 진열장 안에서 반지를 꺼내 주었다.

시현은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요모조모 들여다보았다. 마음에 쏙 들었다. 가격도 이십만 원 정도여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에게 주는 선물로 하나 살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판매원이 말했다.


“조카나 동생 분이 수능 보시나 봐요. 수능 반지로 제일 인기 많은 디자인이니 선물 받으시는 분도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순간 시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열아홉 살이 아니라 서른세 살이라는 것을.

아직도 오래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창피했다. 이제는 어른인데, 그런 것쯤은 오래전에 털어버렸어야 할 나이인데.

애들 반지 끼고 주책을 부린 것이 민망해져서 시현은 얼른 반지를 빼서 돌려주었다.


“좀 더 돌아보고 올게요.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서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사람이 가로막고 있어서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깜짝 놀라 얼른 사과하려는데, 상대가 다정하게 말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니?”

고개를 들자 레온이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비서 여럿이 시현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저씨!”

시현은 금세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었다.


“저도 방금 왔어요. 이모 선물 뭐 사실 거예요?”

“글쎄, 반지나 목걸이가 어떨까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레온의 시선은 시현이 메고 있는 핸드백에 머물렀다.


“그런데 우리 시현이,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구나.”

다정한 레온은 일부러 돌려서 말해줬지만, 시현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낡았다는 뜻이었다. 입사 때부터 쓰던 오래된 핸드백이었으니까.


“먼저 가방부터 보러 가야겠다.”

레온은 시현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저 괜찮아요, 아저씨! 오늘 이모 선물 사러 온 거잖아요?”

시현이 당황해서 말했지만 레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이따가 살 거야.”

레온이 시현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공교롭게도 전에 예비 시어머니의 예단 가방을 골랐던 그 브랜드의 매장이었다.

매장 내에 다른 손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시현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오픈 런까지 하는 곳일 텐데?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매장 직원들이 도열해서 공손히 맞이하는 것을 보고도 시현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백화점이어서 그런가, 여기서도 아저씨가 회장인 줄을 알고 있구나.


“자,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보렴.”

“정말 괜찮다니까요.”

시현이 끝내 사양하자 레온은 눈에 보이는 가방이란 가방은 하나씩 다 들어 보게 했다. 그때 정임이 온갖 가방을 다 들어 보면서 패션쇼를 하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회장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고객님 스타일에 딱 어울리시네요.”

매장 직원이 곁에서 장단을 맞추는 것도 그때와 똑같아서,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였다.

시현이 가방을 열 개도 넘게 들어보고 난 후에야 레온은 겨우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 있니?”

보통은 마음에 드는 거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나, 생각하면서 시현은 대답했다.


“아뇨, 다 예쁜데요.”

레온이 흐뭇하게 웃고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들어 본 거 모두 부탁해요. 다른 색상이 있으면 그것도 종류별로 다.”

시현은 기겁을 해서 레온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저씨, 저 원룸 살아요. 이거 다 놓을 데도 없다고요!”

“이런, 내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구나.”

시현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레온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큰 집을 사면 되겠다. 지금 사러 갈래?”

말투가 한없이 진심이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곧바로 부동산으로 끌고 갈 기세여서, 결국 시현은 레온이 하는 대로 따르고 말았다.

매장 직원들이 다 달라붙어서 포장을 했다. 규모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잘 안 나왔다.


“정말 감사한데요, 이건 너무…….”

“부담 갖지 마. 더 사주고 싶지만 태하가 질투할까 봐 참은 거니까.”

빙긋 웃고, 레온은 뒷일을 비서들에게 맡긴 채 시현을 데리고 나왔다.

명품 주얼리 매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레온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들어가서 먼저 좀 보고 있겠니? 내가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말이야.”

“네, 아저씨.”

시현은 혼자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도 아까 다른 매장처럼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반지나 목걸이랬지?’

시현은 진열장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가느다란 하얀 줄에 장미꽃 모양의 작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이거라고 생각했다.

수연은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반지를 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목걸이가 좋을 것 같은데, 스타일이 워낙 수수해서 크고 화려한 디자인은 역시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게다가 레온이 수연을 로즈라는 애칭으로 부른다니까, 이래저래 딱 알맞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이 목걸이 좀 보여주시겠어요?”

“예, 고객님.”

흰 장갑을 낀 직원이 목걸이를 꺼내 시현에게 건네려는 순간.

누군가가 직원의 손에서 목걸이를 탁 채갔다.


“이거, 내가 살게요.”

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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