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우리 아빠가 사준 반지
(85/181)
85. 우리 아빠가 사준 반지
(85/181)
#85. 우리 아빠가 사준 반지
2022.07.22.
“이거, 내가 살게요.”
시현이 고른 목걸이를 중간에서 채간 보라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며 목걸이를 뒤에 있던 다른 매니저에게 건넸다.
“계산해줘요.”
엉겁결에 목걸이를 받아 든 직원이 중간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시현은 화가 치밀었다.
“남의 거 뺏는 데는 아주 도가 텄구나, 너.”
다른 거라면 그냥 먹고 떨어지라고 줘버렸을 텐데 이건 수연을 위해 고른 목걸이였다. 보라 따위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시현은 매장 직원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먼저 골랐어요. 그러니까 제가 살 거예요.”
“넌 보여달라고만 했잖아. 내가 먼저 산다고 했는데?”
“이보라,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했니?”
시현은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나 내일 퇴사 예정이야. 이제 선배도 아니고 상사도 아닌데 언제까지 대접을 바라는 거야? 나이 많이 먹은 게 벼슬도 아니고.”
보라가 매장을 새삼스레 휘 둘러보더니 비웃듯 말했다.
“그나저나 돈 많은 남자 물더니 강시현, 간덩이 많이 커졌네? 주제에 이런 명품 매장에서 쇼핑도 하고.”
“너도 네 월급 가지곤 이런 데서 쇼핑 못 할 텐데. 돈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거 외에 너는 뭐 한 거 있고?”
보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는 시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내뱉었다.
“부모도 없어서 친척 집에 얹혀서 자란 게, 주제도 모르고!”
시현은 기가 막혔다. 보라와 친한 사이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집안 사정까지는 자세히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뻔했다.
“그 인간이 너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니?”
“했지.”
보라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쩌다 부모도 없는 여자랑 결혼하게 돼서 장인 장모한테 시계 하나 못 받는 신세가 됐다고 어찌나 불평을 하던지. 나만 원하면 당장이라도 결혼 깨고 나한테 오겠다고 조르지 뭐야, 어이없이.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 인간도 영 주제를 모르더라.”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보라가 손뼉을 쳤다.
“아 참, 그런 얘기도 했다. 네 손이 얼마나 아줌마 같은지, 손잡기도 짜증난다고 말이야.”
시현의 귓가에 대고, 보라는 속삭였다.
“손만 보면 천년의 욕정도 식는대!”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둘이 자신을 속이고 만나는 동안, 뒤에서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지. 그러나 그 내용을 직접 제 귀로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굳어 버린 시현의 표정을 보고, 보라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겼다는 듯한 미소였다.
“뭐, 그럼 쇼핑 잘해.”
우아하게 말하고 보라는 등을 돌렸다. 여태 제가 빼앗은 목걸이를 그대로 들고 있는 매장 직원을 보고, 보라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해요? 빨리 포장 안 하고?”
하얗게 질린 직원이 겨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사실 지금은 일반 고객님들께서는 매장 출입이 제한되어 있으셔서…….”
“뭐라고요?”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보라가 되물었다.
“내가 왜 일반 고객이야? 나 이 백화점 VIP야!”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하지만 지금은 원래 매장을 비워놓기로 되어 있는 시간이라…….”
“그럼 저건 뭔데!”
보라는 시현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외쳤다.
“됐고, 숍 마스터 나오라고 해. 마스터 어딨어?”
저만치 있던 마스터가 황급히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후에 다시 방문해주시면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사과 말씀 드립니다, 고객님.”
말투는 더없이 정중했지만, 결국은 똑같이 나가라는 소리였다.
“이것들이 미쳤나.”
시현 앞에서 망신을 당한 보라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돋았다.
“야, 무릎 꿇어.”
보라는 직원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니들 내가 누군지 알아? 백화점에서 물건이나 파는 주제에 감히!”
보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대사부터 행동까지 모두 TV 뉴스에서 보던 갑질 진상 그대로였다. 시현은 너무 놀라서 차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장 꿇어, 꿇으라고!”
보라의 패악에 질린 매장 직원들이 주춤주춤 무릎을 꿇을 때였다. 매장 입구 쪽에서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또 아가씬가?”
레온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무릎을 꿇은 직원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희가 진작 매장 통제를 잘해야 했는데…….”
“여러분도 다 각자의 부모님께는 소중한 자식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고객님께 사과는 드리되, 절대 무릎은 꿇지 마세요. 무릎 꿇으라고 강요하는 고객이 있거든 관리자 호출하세요. 백화점 차원에서 대응할 테니까.”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레온은 보라를 가리켰다.
“앞으로 이 손님, 우리 백화점에 출입 금지시켜요.”
보라가 흠칫 놀라 레온을 쳐다보았다. 놀라기는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백화점?
그러나 보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금세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레온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내가 두 번씩이나 당하고 있을 것 같아?”
태하와 동갑인 보라는, 레온을 향해 거리낌 없이 반말지거리로 대들었다.
“호텔과 백화점에서 고객을 거부했다. 내일 아침 신문에 나고 싶어?”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저녁 뉴스로 본인 얼굴을 보게 될 테니.”
빙긋 웃고 나서, 레온은 차갑게 말했다.
“매장 CCTV 화면 확보하세요. 지금 당장!”
“예, 회장님.”
그제야 보라가 움찔했다.
“나는 이 백화점의 새 오너로서, 갑질 고객에게서 내 직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물론, 아가씨같이 격 떨어지는 사람에게서 다른 고객님들의 즐거운 쇼핑을 지켜드릴 의무도 있죠.”
레온은 턱짓으로 보라를 가리켰다.
“보안요원 불러서 데리고 나가요.”
지시하고 나서, 레온은 시현에게로 시선을 돌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선물은 골랐니?”
“네. 저기…….”
시현은 매니저가 여태 들고 있는 목걸이를 가리켰다. 매니저가 목걸이를 보이자 레온이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시현이한테 부탁하길 잘했어. 로즈에게 잘 어울리겠는걸?”
이미 보라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가시죠.”
“이거 놔! 당장 이거 안 놔?”
보안요원들에게 끌려 나가며, 보라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
백화점에서 나와서 레온은 자기 차로 시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사가 운전을 하고, 뒷좌석에 둘이 나란히 탔다. 시현이 고른 목걸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차 안에서도 레온은 상자를 열어 보며 싱글벙글하다 문득 한숨을 지었다.
“그런데 로즈가 안 받아주면 어쩌지?”
걱정스러운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시현은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었다. 헤지펀드 수장이니 호텔 회장이니 해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냥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지 않은가.
“이모도 아저씨가 싫으신 건 아닐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레온은 금세 눈을 빛냈다. 있지도 않은 귀가 쫑긋하게 보여서, 꼭 커다란 골든 래트리버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시현이가 그렇게 말하니까, 힘내봐야지!”
“응원할게요.”
쿡쿡 웃으며 대답하는 시현에게, 레온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건넸다.
“참, 그리고 이건 시현이 거.”
시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저 괜찮아요, 벌써 가방 많이 사주셨잖아요?”
“이미 산 거니까 받아.”
상자를 열어 보고 시현은 놀랐다. 아까 사려다 말았던 왕관 모양의 반지였다.
그제야 시현은 레온이 잠깐 들를 데가 있다면서 중간에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 반지를 사러 갔던 거구나.
“아까 사려다 마는 것 같아서…… 이거 맞니?”
레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지를 들여다보다, 시현은 중얼거렸다.
“한국에서는 대학 시험 보기 백일 전에 수능반지라는 걸 선물 받거든요, 부모님한테.”
“그래서?”
묻는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해서, 유치한 속마음을 입에 담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근데 저는 부모님이 없잖아요. 친구들 중에서 저만 수능반지 못 받았었어요. 그래서 아까, 다른 학생이 엄마랑 수능반지를 사는 걸 보고…… 부러웠어요.”
“그랬구나.”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젯밤에 태하랑 둘이 치킨에 맥주 한잔했거든. 태하가 그러더라. 시현이하고 빨리 결혼하고 싶은데, 시현이가 승낙을 안 해줘서 속상하다고 말이야.”
“…….”
“그리고 로즈는 시현이 덕분에 버틸 수 있었대. 잃어버린 태하 대신에 시현이한테 정을 붙여 살았다고, 시현이가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라고.”
계속해서 반지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시현의 머리칼을, 레온이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시현이는 내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 로즈에게는 딸 같은 사람이지.”
그야말로 귀여운 딸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현이를 내 딸이라고 생각해.”
확신에 찬 다정한 목소리에, 결국은 눈물이 핑 돌았다.
새끼손가락에 늦은 수능반지를 끼고 시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가 사준 반지.
*
강시현 과장이 곧 윤태하 본부장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회사 내에 쫙 퍼지고, 보라는 하루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도록 갖고 싶었던 그 남자가, 기어이 강시현의 남편이 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스트레스 해소할 겸 퇴근하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갔던 건데, 하필이면 거기서 강시현을 마주칠 줄이야.
쫓겨나는 망신까지 당하고 나니 보라는 반쯤 눈이 뒤집혔다. 정작 망신을 준 것은 레온인데, 분노는 오롯이 시현을 향했다. 그렇게 멋진 부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시현이 죽도록 부럽고, 부러워서 죽이고 싶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여야 했는데!
“엄마!”
결혼을 앞둔 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보라의 어머니는 기겁을 했다.
“무슨 일이니? 혹시 김 서방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응?”
“나 진짜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
보라는 어머니를 붙들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사실은 그동안 회사에서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자기 결혼 깨진 게 내 탓인 것처럼, 이상한 소문까지 퍼뜨렸다고!”
곧 재벌가에 시집갈 귀한 막내딸이 그런 더러운 누명을 쓰다니. 보라의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었다.
“왜 여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엄마 걱정할까 봐 참았지, 흑.”
끅끅거리는 딸을 보고, 보라의 어머니는 가슴이 다 미어졌다.
“내 이 망할 것을 확……!”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시현의 머리털을 쥐어뜯을 기세인 어머니를, 보라는 놀라서 말렸다.
“놔둬, 엄마. 그 여자 잘못 건드리면 안 돼.”
윤태하의 아버지가 강시현을 그토록 감싸고도는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재미없다. 그쯤은 보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 얼마나 대단한 집안 딸이길래 그래? 뭐 재벌가라도 돼?”
“그 여자는 부모도 없어.”
“그럼 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데?”
“곧 결혼하는데, 남자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란 말이야.”
보라는 훌쩍이며 설명했다. 남자 아버지가 그랜드호텔의 새 오너이고 최근에 백화점도 인수했다더라고.
그러나 어머니는 한층 더 펄쩍 뛰었다.
“그럼 시부모 될 사람이 더더욱 알아야지! 며느리 될 여자 인성이 그렇게 더러운 줄도 모르고 귀한 아들을 결혼시켜서야 되겠니?”
순간, 보라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어쩌면 정말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다. 그때 윤태하의 아버지는 미국에 있었으니까.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왜 나 중학교 때 과외 했었잖아.”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
“만약에 내가 중학교 때 과외 선생님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엄만 어떨 것 같아?”
보라의 어머니가,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얘! 넌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니, 곧 시집갈 애가!”
“그치? 부모 입장에선 끔찍한 소리 맞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어떤 부모가 그 꼴을 보고 안 뒤집어져?”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잘하면 파혼, 안 돼도 최소한 개망신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얄미운 강시현에게.
보라는 눈물을 닦고 제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엄마. 아빠한테 말해서 기사 하나만 내줘. 응?”
*
다음 날, 중앙일간지인 조한신문 조간 한구석에 작은 기사가 실렸다.
[유니온TA 윤태하 대표, 일곱 살 연상의 과외교사와 웨딩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