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그 여자한테 가서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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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그 여자한테 가서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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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그 여자한테 가서 빌어
2022.08.02.
“우선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서 오류를 바로잡겠습니다. 제 아들이 신부를 만난 것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케네디 회장은 엄숙하게 말했다.
“사실 중학교 때가 아니라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기자들마저도 놀라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저는 바보처럼 제게 아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당시 제 아들은 사정상 생모와도 헤어져서, 생판 남의 손에 자라고 있었습니다. 보호자는 툭하면 어린 제 아들을 집에 방치한 채로 며칠씩 집을 비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제 아들은 제대로 먹지도, 돌봄을 받지도 못하는 방임 아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제 아들을 주워서 키워준 것이, 바로 지금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예비 신부입니다.”
이 긴 이야기를, 케네디 회장은 단 한 번도 더듬지도 않고 말했다. 심지어 준비한 원고조차 보지 않았다.
“제 아들, 태하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그 아이도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자기도 아직 어린 소녀였는데, 그때부터 그 아이는 매일같이 제 아들의 집에 들러서 식사를 만들어 주고 공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기사에는 과외선생이라고 멋대로 지껄여 놓았던데, 세상에 그런 과외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케네디 회장의 조각 같은 얼굴에 격정이 어렸다. 자칫 고함이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아들을 찾은 것은 태하가 벌써 고등학생이 된 후였습니다. 아들을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납니다. 부모 없이 자랐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청년이 되어 있더군요. 저 대신 누군가가 제 자식을 정성을 다해 키웠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린 진심이, 기자들에게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생중계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 터였다.
“그게 바로 제 아들의 예비 신부였습니다. 어리석은 부모가 자식이 어떻게 사는 줄도 모르고 있는 동안, 그 아이는 자기 힘으로 제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는 갓 대학을 졸업한 아가씨였는데, 그때도 다 떨어진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예쁘고 빛나는 나이에 말입니다.”
케네디 회장은 자신의 아들을 ‘제 아들’, 예비 신부를 ‘그 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똑같은 무게의 애정이 실려 있었다.
“제 아들에게 가나다를 가르친 것도, ABC를 가르친 것도 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오늘날 성공한 제 아들도 없었을 겁니다. 보도를 접하신 분들이 ‘부모가 지금쯤 얼마나 속상하겠느냐’고들 하시는데, 예, 무척 속상합니다. 태하를 낳아준 어머니는 지금, 며느리 될 아이를 볼 면목이 없다고 울고 있습니다. 저도 같은 심정이어서 이렇게 여러분을 모시고 직접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케네디 회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어서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해명하겠습니다.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은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그 아이가 한국에 있으니 자기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처럼 천사 같은 사람을, 대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솔한 목소리에 담긴 절절한 호소가, 듣는 사람도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아, 그 여자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구나. 부모가 봐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즉 미성년자 때부터 짝사랑한 것은 제 아들이지, 그 아이가 아닙니다. 그 아이는 아예 제 아들을 남자로 생각하지도 않아서, 제 아들이 몇 년을 두고 가슴앓이를 하는 것을 제가 직접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누구도 아버지인 저보다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케네디 회장은 허리를 반듯이 폈다. 그리고 카메라를 둘러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들의 예비신부는 며느리가 아니라 제 딸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오는 모든 보도에는, 저희 회사 차원에서 엄중히 대응할 예정이므로 아무쪼록 책임 있는 보도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케네디 회장이 준비한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기자들이 앞을 다투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실례지만 회장님께서는 윤태하 대표와 별로 나이 차이가 안 나 보입니다만.”
“예, 제가 좀 많이 동안이지요?”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케네디 회장은 조금 민망한 얼굴을 했다.
“사실 태하는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때 얻은 아이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체 왜 부모가 멀쩡히 있는 아이가 남의 손에 자라게 된 겁니까?”
“사정이 있지만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아기 때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케네디 회장은 기자들이 무슨 질문을 해도 정확히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윤태하 대표는 혼혈 같아 보이던데요. 혹시 어머니가 한국인입니까?”
“예. 사정이 있어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습니다만, 저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들의 생모를 언급하는 케네디 회장의 얼굴에, 여태까지와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 표정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담아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말을 대단히 잘하시는데요. 언제부터 배우신 겁니까?”
“아들을 찾은 후부터니까, 거의 십 년 가까이 됐습니다. 제 아들이 영어를 잘 못 해서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한국에서 직접 사업을 시작하신 것도 아드님 때문입니까?”
“예. 아들 곁에 있고 싶어서 한국에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사업하며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곳에서 제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모든 질문에 성실히 답변하고 나서, 케네디 회장은 다시 한번 카메라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사실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그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이미 다 드러나 있었다.
외국인들이 방송에 나와 어설픈 발음으로 풀고기 마시쒀요, 킴취 최고예요우,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컸다.
케네디 회장은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들을 향해, 한국식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아무쪼록 여러분도 제 자식들을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경제 전문 채널들에서만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생중계였기에, 기자회견의 직접 시청률은 별로 높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 직후 기자회견 사실이 인터넷에 널리 알려지면서, 해당 영상의 유튜브 조회수는 그날 안으로 무려 이백만 건을 넘어섰다.
이날 모든 석간신문들의 1면은 모두 케네디 회장 인터뷰가 장식했다. 공중파 뉴스들도 타사에서 기자회견 장면을 받아다가 경쟁적으로 송출했다.
언론은 물론, 네티즌들의 여론도 단번에 돌아섰다.
- 이래서 남의 일에 함부로 떠드는 거 아니라니까.
- 애초에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 가지고 광기에 차서 까대는 게 이상했지.
- 열폭이지 뭐.
- 예비 신부 억울했겠다. 시아버지 될 사람이 저렇게까지 나서서 말하는 거 보면 진짜 좋은 사람인 거 같은데.
- 처음 기사 냈던 조한신문이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님?
*
“이 멍청한 것!”
딸이 벌벌 떨며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조한신문 이 회장은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그쪽 아버지가 케네디 회장이라고 왜 진작 얘기를 안 했어!”
“그,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보라는 하얗게 질린 입술을 떨며 겨우 대답했다.
반은 사실, 반은 거짓말이었다. 태하의 아버지가 부자라는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사실 보라는 레온의 회사인 반 더 린드가 뭐 하는 물건인지 여태까지도 잘 몰랐다. 아버지가 저토록 화를 내고, 언론에서도 계속 특종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그냥 대단한 거려니,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 회장은 골치가 다 지끈거렸다.
[우리 보라를 괴롭힌 년이 멀쩡히 시집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예요?]
아내가 하도 울며불며 조르기에 못이긴 척 기사를 내보내 준 것인데, 그 뒤에 미국 재계의 거물이 버티고 있었을 줄이야.
이 와중에 딸이란 것은 더욱더 멍청한 소리를 해서 화를 돋웠다.
“근데 아빠, 우리가 무서울 건 없잖아요. 기업이 언론 눈치를 봐야지, 왜 언론이 기업 눈치를 봐요?”
이 회장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막내라고 오냐오냐 키워놨더니,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청맹과니가 다 됐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기 직전에, 비서가 달려왔다.
“회장님. 케네디 회장 전화입니다.”
“뭐?”
사색이 되어 전화를 받는 이 회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조한신문 이석환입니다.”
애써 침착하게 말하자 상대는 자기소개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 조한신문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신문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어쩌다 그런 잘못된 기사를 내보내게 되었는지 먼저 해명을 듣고 싶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목소리, 그 말투였다. 더없이 싸늘하다는 것만 빼면.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그저 결혼한다는 사실만 간단하게 보도를 했을 뿐입니다. 잘못된 보도는 다른 언론들이…….”
- 중학교 때 과외 선생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말문이 막힌 이 회장이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데, 케네디 회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댁의 따님, 이보라 씨가 그러던가요?
이 회장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제 보니 다 알고 전화한 것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이 회장은 보이지도 않는 전화에 대고 머리까지 수그렸다. 그러나 케네디 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디찼다.
- 댁의 따님이 내 딸에게 직접 사과해야겠습니다. 참고 자료를 하나 보내드릴 테니 보시고 연락주시지요.
“참고 자료라니요?”
- 보시면 알 겁니다.
말하자마자 전화는 뚝 끊겨버렸다.
그로부터 채 5분도 되지 않아 케네디 회장 측에서 보내온 문서가 조한신문에 전달되었다. 다름 아닌 반 더 린드가 주주로 있는 한국 회사들의 명단이었다.
얼핏 봐도 수십 개가 넘었다.
“오성물산, 금아정밀화학, TK케미컬, MT&G, 미래중공업, 고려해양조선, 태양건설, SY텔레콤…….”
국내 유수의 기업 이름을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씩 읽어 내려가던 이 회장의 눈앞이 서서히 까맣게 물들었다.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케네디 회장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 회사들에 압력을 행사하여 조한신문에 게재하는 광고를 끊겠다는 것.
조한신문은 엄연히 중앙일간지 중 하나이긴 했지만, 다른 신문사들처럼 미디어그룹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지 못해서 여태 신문에만 의지하다 보니 끊임없이 경영난에 시달리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의 광고가 다 끊긴다면……!
이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그 여자한테 가서 빌어.”
그때까지 벌을 서듯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서 있던 보라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