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미워하는 이유 (89/181)


#89. 미워하는 이유
2022.08.05.



“당장 그 여자한테 가서 빌어.”

그때까지 벌을 서듯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서 있던 보라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가서 싹싹 빌란 말이야. 무릎을 꿇든, 다리를 붙들고 매달리든, 어떻게든 용서를 받아 와!”

“아빠!”

당황한 보라는 눈물까지 왈칵 흘렸다.


“말도 안 돼요. 제가 지금까지 억울하게 당한 게 얼만데 빌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보라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여태 보라는 ‘당연히 내 것이 되어야 했을 남자를 강시현이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레온의 기자회견을 보고 나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릴 때 좀 돌봐 준 게 뭐라고?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텐데!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아가서 제가 강시현의 대신이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라면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결국 그 여자는 재수가 더럽게 좋았을 뿐 아닌가. 길에서 주운 복권이 당첨된 거나 다름이 없다. 그 운이 하필이면 강시현 따위에게 갔다는 걸 보라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기자회견 따위에 휘둘려서 언제 욕했느냐는 듯 돌아선 사람들도 다 바보 같았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봐야 결국 어릴 때부터 만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중학교 때도 아니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는데, 그럼 더 욕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강시현이 김우진과 헤어질 빌미를 자신이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저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고맙다고 절을 받아도 모자랄 지경인데 빌라니?

보라는 여기가 아버지의 사무실이라는 것도 잊은 채 부르짖었다.


“절대 못 해요, 차라리 저더러 죽으라고……!”

짝! 보라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얼얼한 뺨을 감싸고, 보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아빠……?”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평생 귀여움만 받고 자라온 보라였다. 손찌검을 당하다니,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인정사정없이 딸의 뺨을 후려친 이 회장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네가 저지른 일, 당장 네 손으로 해결하고 와!”

 

*

태하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보고 나서, 시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아서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 동안, 태하는 곁에서 시현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아까 그녀가 프러포즈하면서 준 반지를 낀 바로 그 손으로.

한참만에야 시현은 겨우 입을 열었다.


“넌 알고 있었어?”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어. 나한텐 아무 말씀 안 하셨거든.”

어젯밤에만 해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을 뿐. 그래서 방금 기자회견을 보고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이 매달리듯 물었다.


“이런다고 사람들이 알아줄까?”

얼마든지 손가락질해라, 욕먹어도 상관없다. 아까 제 손에 반지를 끼워 줄 때만 해도 그토록 당당했던 여자는, 이제 와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속으로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지려는 순간, 시현이 다시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네 회사에도 피해를 끼쳤는데, 이제 아저씨 회사에까지 피해가 가면…….”

“그런 일 없을 거야.”

태하는 힘주어 말했다.

레온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은 어차피 태하가 인터뷰를 해서 밝히려고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을 당한’ 당사자인 태하가 말하는 것과, 그의 친아버지인 레온이 말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게다가 아버지는 태생이 남의 마음을 끄는 사람이었다. 한때 왜 나는 아버지처럼 매력이 없을까, 하고 진지하게 속상했을 정도로.

역시 기자회견에서도 그랬다. 자유롭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공격적인 질문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틈만 나면 약점을 파고드는 게 주특기인 기자들이, 상대에게 그토록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분명 기자회견을 시청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으실 거야. 당신 딸을 감싸다가 받는 피해라면, 오히려 기쁘게 여기실 분이야. 알잖아?”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왕관 반지를 들여다보며, 시현은 목이 메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사무실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달려와서 시현을 둘러쌌다.


“티, 팀장님?”

다들 잔뜩 흥분해 있어서, 시현은 조금 당황했다.


“글쎄 내가 뭐랬어? 우리 강시현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어쩐지 본부장님 아버님께서 그렇게나 강 과장님을 예뻐하시더라니, 그럴 만했네요.”

“시현 씨 정말 멋있다!”

시현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다들…… 보셨어요?”

“당연하지!”

“아무 걱정 마, 이젠 사람들도 다 알아들었을 테니까.”

“그럼, 그럼. 아버지가 직접 나와서 얘기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해?”

정말 그럴까. 시현은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도 일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미주가 자꾸만 휴대폰을 눈앞에 들이대서였다.


“이것 좀 봐. 지금 여기저기 기사 쏟아지고 난리 났어!”

미주가 보여주는 기사마다 기자회견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 미국계 헤지펀드 반 더 린드 수장의 놀라운 한국 사랑

- “며느리가 아니라 제 딸입니다.” 친아버지 케네디 회장이 밝힌 윤태하 대표 결혼의 속사정

- 회장님 기습 기자회견에 네티즌 ‘시끌’

기사는 하나같이 우호적이었고,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언제 그렇게 비난했느냐는 듯 일제히 돌아서서 시현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토록 욕을 먹다가 하루아침에 칭찬을 받게 됐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태하의 회사에 더 이상 피해가 가지는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여서, 시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온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날 퇴근 무렵이었다.


- 시현이 괜찮니?

“아저씨……!”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부터 왈칵 나서, 시현은 얼른 사무실을 나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왜 그러셨어요. 저 때문에 아저씨까지 피해 입으시면 어쩌시려고요.”

- 이런, 기뻐할 줄 알았는데?

시현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당연히 기쁘죠. 아저씨 아니었으면 저 정말 태하한테 평생 죄지은 기분으로 살았을 거예요.”

자신이 손가락질 당하는 건 그냥 참으면 된다. 하지만 태하가 열심히 일궈 온 회사까지 피해를 받는 것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 그건 그렇고, 조한신문한테도 사과는 받아야지?

“조한신문에도 연락하셨어요?”

시현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 당연하지. 감히 내 딸을 건드렸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곧 조한신문 회장 딸이 직접 사과하러 갈 거야.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시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보라가 시현에게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부모도 없어서 친척집에 얹혀서 자란 게, 주제도 모르고!]

애초에 이 일을 벌인 것도 보라가 틀림없었다. 그야 자신이 ‘중학교 때부터 태하의 과외선생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보라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당사자가 직접 사과하러 올 거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저씨도 보라 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거.”

하지만 레온은 자신 있게 말했다.


- 사과 안 할 수가 없을걸?

설마, 하고 생각하면서 시현은 퇴근길에 올랐다.

회사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보라를 보고 시현은 깜짝 놀랐다. 레온 아저씨 말이 정말이었구나.

시현을 발견한 보라가 풀죽은 얼굴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리러 왔어요.”

지난번에 백화점 직원들을 향해 당장 무릎 꿇으라며 악을 쓰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였다.

아무래도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시현은 보라를 회사 건물 옆의 작은 골목으로 이끌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시현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어디 해봐.”

보라가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번에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화가 나서, 그만 짧은 생각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어요. 그냥 기사가 나가서, 살짝만 화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렇게까지 큰일이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어요.”

말투는 제법 처량했지만 그 안에 영혼이라고는 한 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굴욕을 참듯, 보라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사과하는 이 순간조차 보라는 진심이 아니었다. 차라리 반말지거리를 하고 비아냥거리던 때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건 진심일 테니까.


“이보라.”

시현은 여태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던 의문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다.


“넌 대체 내가 왜 그렇게까지 밉니?”

보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태하한테 얘기는 들었어. 고등학교 때, 태하가 네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적 있다며. 근데 그건 벌써 옛날 일이잖아. 그 당시에 태하가 날 좋아했다는 거, 겨우 그거 하나 때문에 내 약혼자까지 건드렸다는 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

“…….”

“난 너한테 최선을 다해 잘해주려고 노력했어.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쳐줬고, 네가 실수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감싸줬어. 너도 아니라곤 못 할 거야.”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라에게, 시현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했니?”

우진과 파혼하고 나서, 시현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태하에게 마음이 기울어서였는지도, 아니면 이미 한 번 용서한 후에 또다시 벌어진 일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현을 씁쓸하게 한 것은 우진보다도 보라였다.

그때부터는 회사에서 마주쳐도 그냥 모른 체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강 대리님, 강 대리님, 하면서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보라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에 찬바람이 불었다.

사실은 몇 번이나 묻고 싶었다. 대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이제 와서 이유를 알아봐야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당사자의 입으로 확실하게 듣고 싶었다. 그래야 깨끗이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내 어떤 점이 널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어?”

그러나 보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기계처럼 영혼 없는 사과만 되풀이했다.


“죄송해요, 과장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시현은 알았다. 이런 식으로는 보라가 절대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사과 계속해봤자, 나 더 이상 너 안 감싸줘.”

“…….”

“뭐라도 좋으니까 네 진심을 말해봐. 차라리 그러면 생각해볼 테니까.”

그제야 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눈이 똑바로 마주치는 순간.

분노와 수치심, 증오로 똘똘 뭉쳐 있는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시현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보라는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잘난 것도 없는 게, 자꾸 잘난 척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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