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멋있었어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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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멋있었어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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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멋있었어요, 당신.
2022.08.09.
“……잘난 것도 없는 게, 자꾸 잘난 척을 하니까.”
시현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보라는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그러면 그렇지.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돈 자랑을 할 수가 있니, 집안 자랑을 할 수가 있니. 아니면 미모 자랑을 할 일이 있길 하니. 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잘난 척을 했다는 거야?”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묻자 보라는 예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찍은 그 사진들. 확 풀어버렸으면 내 인생도 얼마든지 망칠 수 있었는데 당신은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지. 파혼한 게 나 때문이라고 회사에 퍼뜨리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 그게 왜?”
“쥐뿔도 없는 주제에 늘 그렇게 고고한 척, 우아한 척, 잘난 척! 그게 재수가 없다고. 알아들었어?”
시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네 인생을 망치지 않아서, 그게 화가 난다는 거야?”
하지만 보라는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시현이 제 친한 동료인 이미주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미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후 ‘강시현 씨 파혼한 게 혹시 이보라 씨 때문 아니냐’는 소문이 회사에 퍼지긴 했지만, 이것도 강시현이 퍼뜨린 건 아니었다.
김우진의 어머니가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 지레짐작들 했던 것뿐이다. 강시현 입에서 나온 거라면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었겠지.
즉 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보라는 그게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시현이 입을 열었다면 제 입장은 대단히 곤란해졌을 테지만, 차라리 그 편이 덜 재수 없었을 것 같다.
시현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보라는 비웃듯 말했다.
“우리 신문에 광고를 끊겠다고? 어디 마음대로 해봐. 나야 어차피 곧 결혼할 텐데 친정 일이야 신경 꺼버리면 그만이지.”
그제야 시현은 보라가 사과씩이나 하겠답시고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레온이 조한신문에 광고를 끊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댁이 한영그룹인 건 알지? 윤태하 아버지가 미국에서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아직 우리 시댁 따라오려면 멀었거든. 그까짓 호텔에 백화점 하나 인수한 정도로 잘난 척은.”
한번 가면을 벗은 보라는 더 이상 속마음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 구워삶는 일은 너만 할 줄 아는 줄 알아? 두고 봐, 우리 시댁에서도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니까.”
끝없는 악의가 느껴져서, 시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보라는 원래 이런 인간일 뿐이다. 대체 왜, 하고 의문을 가져 봐야 소용없었던 것이다.
“고맙다, 사실대로 말해줘서. 덕분에 나도 정리가 됐어.”
시현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광고는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아저씨한테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릴게.”
돌아서는 시현의 등 뒤에, 보라가 씹어뱉듯 말했다.
“끝까지 잘난 척하긴.”
시현은 한숨을 짓고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돌아서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왜 널 가만히 놔뒀는지 알아?”
“…….”
“너 따위랑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어.”
끝까지 침착한 목소리가 보라의 심사를 뒤집어놓았다.
그래, 저런 점이 싫은 거다. 부모도 없는 주제에. 미모도, 젊음도, 재산도,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늘 저렇게 잘난 척, 고고한 척!
“두고 봐!”
멀어지는 시현의 등 뒤에, 보라는 악에 받쳐 저주를 퍼부었다.
“언제까지 잘난 척하고 있을 순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시현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사건이 터진 후 수연은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장사 따위를 하고 있을 정신이 아니어서 가게 문도 아예 닫아버렸다.
시현에게는 차마 연락할 수가 없었다. 제 자식을 키워 준 죄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아이에게, 무슨 면목으로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날 믿고 딱 하루만 기다려요. 내가 해결할 테니까.]
한 가닥 희망은 오로지 레온의 그 말뿐이었다.
다음 날, 레온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바로 TV를 켜보라는 이야기에, 수연은 가게에 혼자 앉아서 레온의 기자회견 생중계를 보았다.
[제 아들의 예비신부는 며느리가 아니라 제 딸입니다.]
카메라를 향해 말하는 케네디 회장은, 바로 어제까지 손가락을 데었다고 수연 앞에서 엄살을 떨던 그 남자와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전에는 레온의 그런 모습이 마치 저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아서 부담스럽고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왠지 느낌이 달랐다. 당당하고, 빛나고, 더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저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의 아버지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내가 한때나마 저런 사람과 사랑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가슴이 뛰었다.
TV 화면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서, 수연은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윤태하 대표는 혼혈 같아 보이던데요. 혹시 어머니가 한국인입니까?]
기자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순간 수연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을 들먹여서 레온이 곤란하지나 않을까. 창피하지 않을까.
테이블 아래로 숨어버리고 싶어지는데, 레온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습니다만, 저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 아직도 나를…….
물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옛 사랑의 추억이나, 태하의 생모라는 점 때문에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짐작만 하던 것과, 직접 그의 입으로 듣는 것은 전혀 달랐다.
즉, 고백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TV를 꺼버렸다.
할 것도 없는 설거지를 괜히 또 하고,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정리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머릿속은 계속 그의 생각뿐이었다.
시현과 태하조차도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레온은 아버지로서 완벽하게 그들을 감쌌다. 그 기자회견을 보고도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레온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귓가를 맴돌았다.
[지금도 제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남자가 가게에 나타난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내 기자회견 봤어요? 비서한테 알려주라고 했는데.”
“봤어요.”
수연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무 걱정 말아요. 기자회견 반응이 무척 좋다고 하니까 이제 우리 아이들, 손가락질받지 않을 거예요.”
기자회견에서는 그토록 당당하게 좌중을 압도하던 남자가, 제 앞에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순한 강아지 같은 눈매가 되어 있다. 가슴이 뛰어서 수연은 차마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수연이 자꾸만 눈을 피하자 레온은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혹시, 내가 아까 멋대로 당신 얘기해서 곤란했어요?”
화나지 않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인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수연은 대답 대신 애꿎은 앞치마 자락을 움켜쥐었다.
“…….”
수연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윽고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난 뭘 해도 안 되는구나, 하듯 자조 섞인 한숨이었다.
“미안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가게를 나가는 레온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수연의 마음이 급해졌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 어떻게든 말해야 할 것 같다.
수연은 가게를 뛰쳐나갔다.
“저기!”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타려던 레온이 돌아보았다.
“당신.”
의아하게 쳐다보는 얼굴을 바라보며, 수연은 얼마 없는 용기를 쥐어짜냈다.
“……아까, 멋있었어요.”
간신히 중얼거리고, 수연은 도망치듯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옛날 그 언덕에서, 처음으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끄러워 얼른 돌아서던 그 순간처럼.
*
기자회견의 효과는 단순히 스캔들을 불식시키는 데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외국인이 예능에 나와서 한국 음식 맛있다고만 해도 인기를 얻는 세상인데, 심지어 케네디 회장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헤지펀드의 수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한국과 한국인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겠다면서.
네티즌들의 국뽕은 거의 치사량에 달했다. 케네디 회장에 대한 국민적 호감이 대폭발하며, 주가 상승으로까지 이어졌다.
유니온TA의 모기업인 한국에듀는 기자회견 당일에 바로 주가를 회복하고 플러스로 돌아섰고, 케네디 회장이 인수했다는 호텔과 백화점의 주식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연일 치솟았다.
인기에는 케네디 회장과 그 아들인 윤태하 대표의 미모도 단단히 한몫했다. 기자회견 장면은 수많은 움짤로 재생산되어 각종 커뮤니티를 떠돌았고, 댓글마다 천하제일 주접대회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덕력이 충만한 자들은 아버지냐, 아들이냐 하면서 천하에 쓸데없는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숫자로는 아들인 윤태하 대표를 선호하는 쪽이 좀 더 많았지만, 아버지인 케네디 회장을 선호하는 쪽은 대체로 강성이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오명을 벗고, 아버지와 아들의 회사 주가는 나란히 올라가고, 언론은 좋은 기삿거리를, 또한 네티즌들은 두고두고 핥을 짤들을 얻었다.
처음 오보를 냈던 조한신문은 1면 하단에 커다랗게 사과문을 싣는 것으로 광고주 대량 이탈 사태를 간신히 막아냈다.
일단은, 모두에게 해피엔드였다.
*
수연과 레온이 나란히 시장에 나타나자, 일대 난리가 벌어졌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오셨네!”
시장 아줌마들이 저마다 장사도 팽개치고 달려 나와서 레온을 둘러쌌다. 유명 아이돌이 시장에 나타났어도 이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화면빨을 잘 받으셔?”
“우리 딸이 사진 좀 찍어 오라고 아주 난리가 났다니까요!”
레온이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여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사이에, 수연은 모른 척 멀리 떨어져서 물건을 둘러보았다.
“회장님, 아 해보셔.”
그 와중에 한약재상 아줌마는 수상한 검은 덩어리를 레온의 입가에 들이댔다.
“이게 흑삼이라는 건데, 정력에 기차게 좋은 거니까 눈 딱 감고 드시면 돼요. 까짓 거 내가 오늘 우리 카레집, 호강 한번 시켜준다.”
“정력?”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줌마들이 깔깔대고 배꼽을 잡았다.
“우리 회장님,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시면서 정작 중요한 걸 모르시네!”
흑삼을 내민 아줌마의 등짝을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튼 오지랖도 참! 어디 우리 회장님이 이런 거 필요하실 분 같어?”
“그러게, 카레집 잡을 일 있남.”
수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빈 장바구니를 들고 도망치듯 시장을 나오는데, 레온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정력이 뭐예요?”
해맑게 물어오는 통에 수연은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나도 몰라요!”
내가 못 살아. 걸음을 빨리하는 수연의 귓가에 레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르면, 내가 가르쳐줄까요?”
속삭이는 남자의 입술에서 쌉싸래한 흑삼의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