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다시 찾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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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다시 찾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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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다시 찾은 이름
2022.08.12.
“정력이 뭐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나도 몰라요!”
내가 못 살아. 걸음을 빨리하는 수연의 귓가에 레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르면, 내가 가르쳐 줄까요?”
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윽!”
불시에 가슴팍을 세게 얻어맞은 레온이 신음을 흘렸다. 새빨개진 수연이 주먹을 쥐어 레온을 닥치는 대로 마구 때렸다.
“아! 아야. 아파요!”
애교 따위가 아니라 꽤나 감정이 실린 주먹이었다. 입으로는 아프다고 엄살을 떨면서도 레온은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맞으면서도 얼굴은 계속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결국 때리던 수연이 먼저 지치고 말았다.
“바보예요? 뭐가 좋다고 자꾸 웃어요?”
“당신이 좋으니까.”
레온이 기쁜 듯이 한껏 휘어진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때려도 좋고, 바보라고 욕해도 좋네요.”
“…….”
“그러니까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뭐든 다 해도 돼요, 나한테.”
수연은 분했다. 멋있었다고 한마디 해 줬더니 금세 이 모양이다.
괜히 말했어.
레온을 흘겨보고 돌아섰다가 수연은 흠칫 놀랐다. 시현과 태하가 저만치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시현아!”
수연은 얼른 달려갔다. 정작 아들은 뒷전이고, 그녀는 팔을 벌려 시현을 꼭 껴안았다.
“괜찮니? 응? 많이 힘들었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까. 시현을 껴안고 수연은 울먹였다.
“미안해. 내가 못나서, 아무것도 못 도와주고……!”
“저 이제 괜찮아요. 다 잘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모.”
오히려 시현이 수연을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잠시 후, 카레 가게의 빈 테이블에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처음으로 넷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레온은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반대로 그의 곁에 앉은 수연은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그런데 시현아. 조한신문 사장 딸한테 사과는 받았니?”
레온의 물음에 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애초에 사과 따위 바라지도 않았어요.”
“뭐?”
레온이 대번에 화난 얼굴을 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걱정 마, 시현아. 내가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니까.”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시현이는 화나지도 않니?”
“화는 나죠. 그런데 이왕 잘난 척하는 거, 끝까지 해 보려고요.”
웃는 시현을, 레온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태하랑 잘되지도 못했을 거니까요.”
태하를 슬쩍 바라보며 말하자 태하가 테이블 밑으로 시현의 손을 꼭 잡았다.
“저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제 부모님을 바라보며 태하가 선언하듯 말했다.
사실 결혼 기사가 나간 것은 아직 시현이 태하의 청혼을 받아주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고, 그러니까 레온과 수연에게 결혼하겠다고 정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게 처음이었다.
“축하한다!”
레온은 활짝 웃었고, 수연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잘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
그토록 좋아하는 두 분이지만, 태하의 부모라고 생각하니 새삼 긴장이 되었다. 시현은 자세를 고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모.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태하 꼭 행복하게 해줄게요.”
“우리 시현이가 어디가 부족하단 말이야?”
수연은 대번에 정색을 했고, 레온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물었다.
“태하가 시현이한테 잘해야지. 아들, 시현이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니?”
“목숨 걸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태하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고, 레온은 물었다.
“그래, 결혼식은 언제 올릴 생각이니?”
“일단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부터 마무리하고 나서 준비할까 합니다.”
태하가 대답하고 나서 시현을 슬쩍 쳐다보았다.
“가능하면 올해가 가기 전에 식 올렸으면 좋겠는데.”
“좋아.”
이미 결심한 일을 미룰 필요가 없었다. 태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시현은 수연을 보면서 벌써부터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하객들이 이모 보면 엄청 깜짝 놀라겠어요. 웬 아가씨가 한복을 입고 부모님 자리에 앉아 있나, 하고요.”
수연은 놀라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난 신경 쓰지 마! 키워주지도 못한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거기 앉겠니?”
키워주지 못한 부모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자신과 레온은 다르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그는 그랜드호텔 회장이지만 자신은 그냥 식당 아줌마일 뿐이다. 이런 어머니가 태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칫 태하를 창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레온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당연히 당신이 앉아야죠. 태하를 낳아준 게 당신인데.”
시현도 매달리듯 수연을 바라보았다.
“저 부모님 안 계신 거 아시잖아요, 이모. 얼마 전에 작은아버지 댁하고도 의절해서, 저는 정말로 결혼식에 와주실 어른이 한 분도 안 계세요.”
“시현아…….”
“그러니까 저를 위해서라도 이모가 꼭 저희 결혼식에 부모님 자리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모는 제 엄마 같은 분인걸요.”
진심 어린 말에 수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시현의 손을 잡았다.
“예쁜 우리 딸.”
태하를 키워줘서 고맙다고 했을 때, 시현은 말했었다.
[이모가 없었으면 저 그 집에서 못 버텼을 거예요. 저는 이모한테 받았던 사랑을 돌려줬을 뿐이에요.]
하지만 시현이 모르는 게 있었다. 수연 역시 시현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걸.
태하를 빼앗긴 후 수연은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입주가정부로 들어간 집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더부살이처럼 눈치 보며 사는 가여운 아이.
그 아이에게 수연은 제 아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퍼부었다. 엄마처럼 자신을 따르는 아이 덕에, 수연은 아들을 빼앗긴 아픔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었다.
즉 그녀에게 태하는 친자식이고, 시현 역시 친자식 못지않은 소중한 자식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태하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참, 이번 주말이 제 생일입니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구나?”
시현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선물 대신, 태하가 두 분한테 소원이 있대요.”
“소원? 뭔데 그러니?”
“넷이서 같이 가족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대답과 함께 태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수연에게 건넸다.
주민등록증이었다.
“얼마 전에 가정법원에서 가족등록부 정정 결정이 났어요.”
수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분을 회복하려면 꽤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몇 개월은 걸린다고 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버지가 많이 애쓰셨어요.”
태하와 레온이 웃음기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보니 두 남자가 수연 모르게 뒤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일부러 주민등록증 나올 때까지 말씀 안 드리고 있었던 거예요.”
정희선.
수십 년 전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바라보며, 수연은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이젠 희선 이모라고 불러드려야겠네요.”
시현에 이어 태하도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병원이든 관공서든 편하게 가실 수 있어요. 비행기 타고 여행도 가실 수 있고요.”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시현이 신이 나서 손을 번쩍 들었다.
“이모 신분증도 나왔으니까, 우리 다 같이 제주도 가요. 비행기 표는 제가 쏠게요!”
“그럴 필요 없어.”
레온이 웃으며 말했다.
“내 전용기가 공항에서 계속 푹 쉬고 있거든. 오랜만에 한번 신나게 날아보겠구나.”
“전용기요?”
시현이 숨을 삼켰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여태 살면서 비즈니스 클래스도 못 타 봤는데, 전용기라니!
눈이 둥그레진 시현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 레온은 문득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네 어머니가 같이 가 주실지 모르겠구나.”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수연을 향했다. 레온은 눈치를 보듯, 태하는 부탁하듯, 시현은 제발요, 하고 비는 것처럼 두 손까지 모으고 있었다.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수연, 아니 희선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
아침에 출근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도중에, 아현은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전에 그랜드호텔에서 만났던 그 친구였다.
- 내 말이 맞았지? 그때 호텔에서 봤던 남자, 진짜 케네디 회장 아들이었잖아!
친구는 한눈에 남자의 신분을 알아본 것이 자못 자랑스러운 듯했다.
- 너 그 남자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았는데 아쉬워서 어떡하니? 그냥 여자친구도 아니고, 곧 결혼할 사이라니.
아현은 대답 대신 웃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도 아직도 친구는 아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현은 수없이 시현의 것을 빼앗았다. 시현이 소중히 여기는 것일수록, 빼앗았을 때 쾌감이 더했다.
케네디 회장의 기자회견을 봤을 때도, 실망은커녕 오히려 더 소유욕이 불타올랐을 뿐이었다. 반드시 빼앗고 말겠다. 그 남자는 물론, 저 멋진 시아버지의 사랑까지도.
- 그건 그렇고 아현아, 심심한데 같이 쇼핑이나 갈래?
벌써 수없이 겪어온 아현은 알고 있었다.
같이 쇼핑을 하자는 건 핑계고, 단순히 곁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예쁘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줄 시녀가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퍼스널 쇼퍼가 엄연히 있는데도 친구는 꼭 아현을 데리고 쇼핑하는 것을 즐겼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 얼마 전부터 출근하거든. 지금도 회사에 있어.”
- 웬 출근? 너 집에서 신부수업 하다가 고이 시집이나 가라고 너네 어머니가 취업도 못 하게 하셨잖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겨우 중소기업이잖니. 내가 벌어야 시집갈 준비도 하지.”
- 그래서 어디 취업했는데?
“그냥 작은 회사. 아직 인턴이야.”
- 아, 인턴?
친구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였다.
- 괜히 고생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우리 아빠한테 부탁해서 정직원 자리 하나 정돈 마련해줬을 텐데.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에 속으로 욱했지만, 아현은 금세 생각을 바꿔먹었다.
곧 너 따윈 내 앞에서 감히 고개도 못 들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잘난 척 많이 해두렴.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래도 내 힘으로 해보고 싶었어.”
그때, 등 뒤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이, 업무 시간에 개인 통화는 지양해주세요.”
“죄송합니다, 매니저님.”
얼른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아현의 가슴에 달린 명찰이 반짝였다.
[그랜드호텔 인턴사원 Chloe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