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악녀 VS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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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악녀 VS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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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악녀 VS 악당
2022.08.16.
우진은 연차를 내고 집 안에 틀어박혀 멍하니 누워 있었다. 입맛도 기력도 없었다.
케네디 회장의 기자회견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우진이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고, 놓친 가오리가 덕석만 하더라고 했다. 우진에게 시현이 딱 그랬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그 여자가, 바로 얼마 전까지도 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아깝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도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왜 지금 난리 난 반 더 린드 회장 예비 며느리 말이야. 김우진 과장 전 약혼녀라며?]
[어쩐지, 청첩장까지 돌려놓고 왜 갑자기 파혼했나 했더니!]
[김 과장 뭐 볼 거 있나? 그쪽은 나이도 훨씬 젊고 엄청 미남에다 부자던데, 내가 여자라도 백번 파혼하고 그쪽으로 가겠다.]
결국 우진은 잘난 놈에게 약혼녀를 빼앗긴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얼굴조차 제대로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할 것이지 이제 와서 왜 청승이야?]
늘 막내아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어머니 정임마저도 대놓고 타박을 하는 마당이었다.
어떻게든 이 치욕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시현을 되찾는 것!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문제는 시현의 마음은 돌아선 지 오래라는 것이었다.
[나 태하 좋아해, 오빠.]
전세금 돌려준다는 핑계로 찾아갔을 때, 시현은 이미 그에게 미련 따위는 티끌만큼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냥 오빠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고 정임이 들어왔다.
“글쎄 밥 안 먹는다니까?”
나이 서른다섯에 중 2병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우진의 얼굴을, 뭔가 묵직한 것이 날아와서 턱 하고 때렸다.
“이거나 봐, 이놈아.”
“아야! 왜 던지고 그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키자 침대 아래 신문이 굴러떨어져 있었다.
“이게 뭔데?”
“읽어보면 알 거 아니야!”
정임이 팩 하고 쏘아붙였다. 회사로 찾아갔다가 보라에게 봉변을 당한 이후, 정임은 삼십 년 동안 애독하던 조한신문을 끊고 다른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엮이는 여자마다 족족 시집을 보내고, 자알 한다, 자알 해. 아이고, 내 팔자야.”
정임이 푸념을 하면서 방을 나가고, 우진은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조한신문 3녀, 한영그룹 3세와 웨딩마치]
기사에서 보라의 이름을 발견하고, 우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날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저는 멀쩡히 결혼을 한다고……?”
갈 곳을 잃고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만 치고 있던 분노가 일제히 보라를 향해 폭발했다.
그래, 이게 다 이보라 때문이다.
애초에 시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저것이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하고 꼬리만 치지 않았더라면.
마지막으로 내 신혼집에서 하루만 자고 싶다고 조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오늘날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기사에 나와 있는 보라의 사진을 한참 노려보다, 우진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그년만 아니었으면, 시현이랑 나는 지금쯤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을 텐데!’
신문지를 꽉 움켜쥔 채 한참 부들부들 떨다가, 우진은 일어나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액정이 깨져서 망가진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바람이 들켰던 그날 밤, 시현에게서 빼앗아 제 손으로 부쉈던 휴대폰이었다. 시현이 박차고 나가 버려서 신혼집에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을, 여태 우진이 갖고 있었다.
“…….”
까맣게 죽어 있는 휴대폰의 화면을, 우진은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
결혼식 사흘 전.
시현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굴욕 이후, 보라는 이제 많이 진정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예비 시부모님은 좋은 분이었고, 특히 시아버지 되실 분은 애교에 약했다.
케네디 회장과는 달리 쭈그렁바가지 영감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정도면 결혼 후 케네디 회장 못지않은 며느리 바보가 될 싹이 보였다.
[내가 아저씨한테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릴게.]
강시현은 약속대로 케네디 회장에게 부탁해준 모양이었다. 정정 보도와 사과문 게재 정도로 광고주 이탈 없이 사태가 마무리된 걸 보면 그랬다.
자신이 그토록 악담을 퍼부었는데도 끝내 약속은 지킨 것이, 역시 강시현답게 재수가 없었다. 하여튼 잘난 척은, 하고 보라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제 결혼 준비도 다 끝나고, 보라는 매일같이 쇼핑과 신부 관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시어머니가 끊어 주신 최고급 회원제 에스테틱에서 관리를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VVIP 연간 회원권이 억대에 달하는 곳이었다.
보라도 꽤나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지만, 그래도 돈으로는 신문사가 재벌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재벌가의 스케일은 보라를 더없이 행복하게 했다.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아이가 아직도 부모님 차를 타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며, 예비 시아버지는 얼마 전에 멋진 새 차에다 운전기사까지 붙여주셨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집으로 향하며, 보라는 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만족스레 들여다보았다. 속부터 광채가 나는 것 같은 피부가, 마치 빛나는 자신의 앞날처럼 보였다.
좋았던 기분은,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는 순간 웬 남자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그만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첫눈에는 부랑자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우진이어서 보라는 깜짝 놀랐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은 잔뜩 구겨진 데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딱 봐도 정상이 아닌 모습에, 운전기사가 보라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놔둬요. 아는 사람이에요.”
괜히 남들 보는 데서 헛소리라도 했다간 곤란하다. 보라는 운전기사를 물러나게 하고, 도로 차에 타며 우진에게 손짓을 했다.
우진이 옆에 타자마자 보라는 질책하듯 물었다.
“당신 스토커야? 대체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대답 대신에 우진은 잔뜩 구겨진 신문지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신문지를 힐끗 쳐다보고, 보라는 무감하게 대꾸했다.
“내 결혼 기사네.”
“넌 양심도 없어? 내 결혼을 깨 놓고 너는 멀쩡히 시집을 가겠다고?”
“그럼 뭐, 내가 당신이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어?”
싸늘한 목소리에 우진이 매달리듯 말했다.
“우리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아. 나 사랑한다고, 시현이 때문에 나랑은 안 돼서 슬프다고 했던 게 바로 너 아니었어?”
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믿었어? 가서 거울 좀 봐. 미쳤나 봐, 정말.”
“날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우진이 입술까지 떠는 바람에 보라는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진짜로 자기를 좋아했다고 믿었단 말이야?
“그럼 왜 나한테 먼저 꼬리 쳤어?”
아,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구나. 보라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윤태하랑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거든. 옛날부터 윤태하가 강시현을 좋아하는 게 보여서 짜증났던 것뿐이야.”
우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그놈 때문이었다 이거야?”
굴욕에 떠는 우진을 보자 보라는 왠지 즐거워졌다. 강시현에게 느낀 패배감을, 우진을 상대로 푸는 것 같아서 짜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보라는 사르르 눈웃음까지 치며 확인해주었다.
“그렇다니까.”
우진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내 결혼을 깼다?”
“깨긴 누가 깼다는 거야? 기억 안 나? 난 당신들 둘이 잘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자고 질척거린 건 그쪽이잖아?”
얘기하다 보니 보라도 점점 화가 났다. 이 작자가 어떻게든 강시현을 잘 달래서 무사히 결혼식장에만 들어가 줬어도, 윤태하를 잡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자기 여자 하나 제대로 못 잡아서 이 사달을 내놓고 누구한테 와서 행패야?”
보라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됐고,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니까 당장 내려. 또 찾아오면 그땐 경찰에 신고할 거야.”
우진이 이를 악물고 보라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텐데.”
“뭘 어쩔 건데?”
“약혼녀 있는 남자랑 바람피워서 남의 결혼 깨뜨린 걸 알면, 그 대단한 집안에서 널 며느리로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보라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증거 있어?”
보라는 자신이 있었다. 우진과 만나는 내내, 혹시라도 강시현에게 들킬까 봐 메시지 따위는 한 번도 주고받지 않았다. 하다못해 사진 한 장 같이 찍지 않았다.
이별 선언을 한 후에는 우진이 끈질기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오긴 했지만 그것도 일방적으로 저쪽에서 한 것뿐이었다. 그걸 가지고 사귄 사이라고 주장한다면 스토커로 몰아버리면 그만이다.
둘이 만난 유일한 증거라고는 강시현이 쳐들어왔던 날 밤에 찍힌 사진뿐이었다.
물론 그 사진은 강시현이 갖고 있는데, 정작 강시현은 고고한 척하시느라 전혀 유포할 생각이 없으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라면 진작 뿌렸을 텐데, 멍청한 계집애.’
보라는 새삼 속으로 시현을 비웃었다.
“증거 있으면 어디 내놔 보시든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진은 턱까지 벌벌 떨면서 경고하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회 준다. 지금 사과해.”
“내가 무슨 사과를 해야 하는데?”
“너만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시현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잖아!”
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편리한 기억력이로구나.
“시현이랑은 그냥 의리로 만나는 사이야. 이렇게 떠밀려서 결혼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시현이 나이 먹기 전에 진작 헤어질걸, 이제 와서 헤어지자고도 못 하겠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평생 살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해. 보라야, 나 어떡하지?”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줄줄이 읊어 주자 우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우진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후회?”
진심으로 우스웠다. 재벌가에 시집가는 내가, 너 따위 구질구질한 남자를 상대로 후회할 일이 뭐가 있다고. 보라는 새삼 우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제발 주제 파악을 좀 해. 나이는 많지, 돈은 없지, 그렇다고 얼굴이 봐줄 만하게 생겼나, 잘 나가는 부모가 있길 한가. 심지어…….”
보라의 시선이 우진의 다리 사이에 노골적으로 머물렀다.
“……그것도 더럽게 못 하는 주제에.”
조롱을 들은 우진이 치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그런 우진을 본체만체하고, 보라는 차에서 내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를 향해 싸늘하게 지시했다.
“저 사람 끌어내요. 혹시 헛소리하거든 경찰 부르고요.”
우아한 걸음걸이로 돌아서는 보라의 뒷모습을, 우진이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