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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여행을 떠나요 (93/181)


#93. 여행을 떠나요
2022.08.19.


여행을 떠나기로 한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시현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캐리어를 점검했다.


“수영복, 모자, 충전기, 선크림…….”

아직은 8월 말이었다. 8월 중순이 지나고부터 서울은 무더위도 한풀 꺾였지만, 제주도는 지금이 해수욕하기 딱 좋은 날씨일 터였다.


“그렇게 좋아?”

일찌감치 시현을 데리러 와 있던 태하가 웃으며 물었다. 늘 입던 슈트 대신에 하늘색 피케 셔츠에 밝은 베이지색의 치노 팬츠를 입은 그는 드물게도 제 나이처럼 보였다.


“당연하지!”

여름방학 때마다 작은아버지 가족은 바닷가에 있는 별장으로 휴가를 가곤 했지만, 한 번도 시현을 데려가 준 적은 없었다. 시현은 늘 가정부 아줌마와 함께 집에 남았다.

어차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없긴 했지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까맣게 그을려서 돌아오는 아현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가족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실은 여행 자체보다 내게도 같이 여행할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그 가족이 태하고, 희선이고, 레온이어서 더욱더.

영화에서나 보던 전용기를 실제로 타볼 수 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설렜다.


“미주 씨랑 약속했어. 기내 사진 백 장 찍어가기로!”

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벅지까지 오는 짧은 점프슈트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시현은 춤을 추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태하와 함께 집을 나왔다.


 


“이모는? 우리가 모시고 가야 하지 않아?”

“걱정 마. 아버지가 모시고 오기로 했어.”

두 사람은 차에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는 레온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아저씨!”

새파란 바닷물 같은 셔츠에 화이트 진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레온을 보고 시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쩌면 저 나이에도 저렇게 상큼해 보일 수가 있을까. 이러니 네티즌들끼리 아들이 낫니 아버지가 낫니 하면서 옥신각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떠니? 비서들이 골라주는 대로 입어 봤는데.”

조금 어색한 듯이 묻는 레온을 향해, 시현은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이모가 보시면 한눈에 반하겠어요!”

그러고 보니 희선이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모는요?”

“가게로 차를 보냈으니까 곧 모시고 올 거야. 너희들, 아침은 먹었니?”

태하가 대답했다.


“서두르느라 커피만 한 잔 마시고 왔어요.”

“그럼 기내에서 먹으면 되겠구나. 조금만 참으렴.”

진짜로 전용기란 걸 타보는구나!

너무 들뜬 나머지 시현은 곧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미주였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 시현 씨, 나 죽을 거 같아.

늘 활기찼던 미주의 목소리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들려서, 시현은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어제 회덮밥 먹은 게 잘못됐나 봐. 밤새 위로 쏟고 아래로 쏟고 난리도 아니야.

“어쩜 좋아.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안타까워하는 시현의 귀에, 다음 순간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 그래서 말인데, 시현 씨가 이따 나 대신 결혼식 좀 가주라.

“뭐? 결혼식?”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라의 결혼식이었다. 팀에서 대표로 한 명만 가서 축의금을 전달하기로 했고, 사다리 타기 결과 걸린 것이 미주였다.

시현은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미쳤어? 나더러 이보라 결혼식을 가라고?”

- 그럼 어떡해, 내가 못 가게 생겼는데. 벌써 축의금 다 받아 놨는데 봉투 전달할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결혼식 가서 위로 아래로 쏟을 순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우리 사이에 모른 척할 거 아니지? 그럼 부탁한다.

“뭘 부탁해, 나 거기 어딘지도 몰라!”

- 모바일 청첩장 보내줄게.

“안 돼, 나 여행 간단 말이야. 지금 공항인데……!”

- 으아악, 또 나온다!

다급한 비명과 함께 전화는 뚝 끊겨 버리고 말았다.


“미주 씨? 미주 씨!”

시현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태하가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래?”

“미주 씨가 갑자기 아프대. 그래서 나더러 오늘 이보라 결혼식 좀 대신 가달라는데…… 어쩌지?”

어쩌지, 라고 물은 것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는 뜻이었다. 여행을 취소하고 결혼식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말에 미안하지만, 태하의 비서라도 불러서 대신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고 나서, 태하는 잘라 말했다.


“가자, 결혼식.”

“뭐? 그럼 여행은 어쩌고?”

시현은 펄쩍 뛰었다.


“다음에 또 가지 뭐. 벌써 사람들한테 봉투 다 걷었을 텐데, 전달 못 하게 되면 이미주 대리님 입장이 곤란할 거 아니야.”

“하지만……!”

둘이서 그러고 있는데 이번에는 레온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태하의 설명을 듣고 난 레온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여행은 나하고 로즈 둘이 가는 수밖에.”

서운한 듯이 말하면서도 은근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시현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이건 오히려 빠져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태하가 대번에 순순히 결혼식에 가자고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뒤늦게 눈치는 챙겼지만 그래도 전용기에 대한 미련은 좀처럼 떨치기가 힘들었다.


“전용기 띄우는 거 되게 비싸죠? 자주는 못 띄우겠죠?”

울상을 하는 시현을, 레온이 다정하게 달랬다.


“시현이가 원하면 언제든 태워줄 테니까 걱정 마. 제주도 말고, 우리 다음엔 해외로 갈까?”

레온이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해준 덕분에 서운함은 조금 가셨지만, 보라에 대한 적개심이 새삼 들끓었다. 내 전용기, 내 가족여행! 시현은 이를 갈았다.


“결혼식이 몇 시니?”

“오후 늦게라고 들은 것 같아요.”

시계를 본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오전 아홉 시도 채 안 된 시각이었다.


“그럼 시간은 충분하구나.”

레온은 저만치 떨어져 있던 비서를 불러서 지시했다.


“우리 시현이가 오늘 중요한 자리에 참석합니다. 당장 백화점에 연락해서 쇼퍼들 대기시키고, 뷰티 숍에도 예약해요.”

“예, 회장님.”

그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오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내 딸이 가장 빛나야 합니다.”

 

*

레온이 보내준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며, 희선은 속으로 긴장해 있었다.

세 사람이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솔직히 여행이 내키지는 않았다.


[지금도 제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고백을 받고 나서부터, 그녀는 레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 멋있었다고 한마디 한 후로 그의 태도가 확 변해서 더 그랬다.

당신이 좋아요.

때려도 좋고, 내게 뭘 해도 좋아요.

그날부터 레온은 틈만 나면 고백하고, 짓궂은 농담으로 그녀를 놀렸다. 그러면서도 정작 눈빛에는 장난기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애타게 관심을 구하는 것이, 마치 커다란 골든래트리버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털빛이 갈색이라 착각했을 뿐, 어쩌면 개가 아니라 사자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개는 저렇게, 상대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눈으로 보지 않으니까.

마치 무언가를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처럼 그는 때때로 애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겁이 나서 희선은 그 눈을 차마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와 함께 3박 4일 여행이라니…….

지금이라도 차를 세워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그녀는 어제 새로 산 라탄 백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시현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워서, 어제는 혼자서 백화점이라는 곳을 가 보았다. 옷에 가방에 화장품까지 새로 사면서 애써 핑계를 댔다. 같이 여행을 가는데 엄마가 초라해 보이면 우리 태하가 창피할 테니까.

하지만 사실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게 아들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주제에, 또 한편으로는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은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회장님께서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다.”

운전기사 옆에 앉은 장 비서가 불쑥 말을 걸어서, 희선은 흠칫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네?”

“여행 일정 짜는 데 온 비서실이 다 매달렸답니다. 오늘 입으실 옷도 얼마나 까다롭게 고르셨는지, 저희가 아주 진땀을 뺐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모신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저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뵙습니다.”

희선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죄송해요. 괜히 저희 때문에…….”

“아닙니다. 덕분에 비서실 인원 모두 특별 휴가도 받았는걸요. 저희는 공항까지만 수행하고, 내일부터 일주일간 자유입니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듯한 목소리에, 희선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단둘이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랑 같이 가는 거니까 괜찮겠지. 희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현이 곁에만 꼭 붙어 있어야지, 하고.

공항에 도착하자 저만치서 레온이 반가운 듯이 달려왔다.


“왔어요?”

가까이서 희선을 본 그가 놀란 얼굴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흰색과 하늘색의 스트라이프 원피스에 샌들을 신고 밀짚모자를 쓴 희선을 바라보는 눈길에 찬탄이 어려 있었다.


“당신, 오늘, 너무…….”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레온은 결국 말끝을 흐렸다. 그가 삼켜버린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희선은 부끄러워 시선을 돌렸다. 사실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은 그인데.


“저어, 시현이하고 태하는요? 아직 안 왔어요?”

“아, 그게.”

주위를 둘러보자 레온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가버렸지 뭐예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우리끼리 가야겠어요.”

희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둘이 여행을 가자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 우리끼리만 가면 아이들이 서운할 거 아녜요. 그러지 말고 다음에 다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

아이들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레온과 단둘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만도 긴장돼서 죽겠는데, 단둘이서 3박 4일이라니.


“당신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레온은 서운한 얼굴을 했지만 다행히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희선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짓는 순간, 그가 비서들을 돌아보았다.


“안됐지만 특별 휴가는 없던 일로 해야겠네요.”

“예, 회장님.”

대답하는 비서들의 얼굴이 일시에 울상이 되었다.


“장 비서님, 가족분들이랑 하와이 가기로 했다고 했죠? 취소해야겠네요. 박 비서님 처가댁에 가기로 하신 것도요. 참, 최 비서님은 뉴욕 간다고 하셨던가요? 안됐지만 그것도 취소.”

희선은 한숨을 지었다. 도저히 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남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갈게요.”

 

*



“으아악, 또 나온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미주가 씨익 웃었다. 언제 그렇게 다 죽어갔느냐는 듯, 더없이 멀쩡한 얼굴이었다.

지난 소동으로 윤태하 대표는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인지도를 얻었다.

워낙 언론에 사진이 많이 보도되기도 했지만, 네티즌들이 하도 열심히 여기저기 올려대는 통에 이제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시현 쪽은 겨우 오래된 스티커사진 한 장이 나돈 게 전부이긴 하지만, 그녀가 태하 곁에 서 있기만 해도 모두가 알아볼 것이다.

윤태하 본부장은 이보라 결혼식에 강시현을 혼자 보낼 사람이 아니니까!

결혼식장에 그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면, 신랑 신부 따위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이다, 망할 것아.”

모바일 청첩장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보라의 사진을 향해, 미주가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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