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보라의 결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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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보라의 결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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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보라의 결혼식 (1)
2022.08.23.
시현은 태하와 함께 공항에서 나와 백화점으로 향했다. 레온의 비서 중 한 사람이 둘을 수행했다.
안내를 받아 PSR 라운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별세계에 온 느낌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급스러운 룸 안에 대기하고 있던 쇼퍼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한쪽에는 옷이 줄줄이 걸린 행거가 몇 개나 있고 또 한쪽에는 갖가지 구두가, 테이블 위에는 주얼리 상자가 눈높이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심지어 돈이 있어도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는 백들이 색깔별, 크기별로 놓여 있어서 퍼스널 쇼퍼 룸 안은 마치 작은 명품관처럼 보였다.
“직장 동료분 결혼식에 참석하신다고 전달받았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콘셉트가 있으신가요?”
쇼퍼들의 눈이 의욕에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면 레온의 말이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즉 회장님 직접 지시 사항인 것이다.
[오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내 딸이 가장 빛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보라 결혼식이니까 그렇게 말해준 마음은 고맙지만, 사실 시현은 별로 꾸미고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남의 결혼식에 내가 눈에 띄어서 뭘 한다고.
“너무 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그럼 자연스러운 스타일로 추천드리겠습니다.”
8월 말이라 날은 아직 더운 편이었지만 한여름은 이미 지났기에 대놓고 여름옷을 입기는 약간 어색한 면이 있었다. 쇼퍼들은 귀신같이 그런 점을 고려해서 옷을 추천해주었다.
온갖 브랜드의 옷을 열 벌 가까이 입어 본 끝에 시현은 겨우 원피스 한 벌을 골랐다. 약간 황금빛이 도는 얇은 실크 소재의 드레스였다. 은근히 가을 분위기가 나면서도 더워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옷에 맞춰서 고른 가방은 짙은 브라운 색깔의 클러치였다. 사실 이것도 최대한 심플한 모양으로 고른 건데, 나중에 로고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이게 그 명품의 여왕이라는 그거구나!
시현이 쇼핑하는 내내 태하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었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이거 어때?”
“예쁜데.”
“그럼 이건?”
“당신은 뭘 입어도 예뻐.”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에 쇼퍼들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옷과 구두, 백에다 액세서리까지 고르고 나자 벌써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나도 일단 옷은 갈아입어야겠는데.”
태하가 제 차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행을 가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태하 역시 결혼식 참석 복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가서 옷 갈아입고, 이따가 뷰티 숍 쪽으로 와. 거기서 보자.”
그렇게 태하와 백화점에서 일단 헤어져서, 시현은 레온의 비서를 따라 뷰티 숍으로 이동했다.
숍 앞에 도착하자 원장 이하 직원들까지 나와서 시현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얼굴이 낯이 익어서 시현은 깜짝 놀랐다. 유명 여배우들의 메이크업 담당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였다.
“저 홈쇼핑에서 원장님 화장품 세트 산 적 있어요.”
말하고 나서 시현은 살짝 후회했다. 너무 없어 보였나?
그러나 원장은 뛸 듯이 기뻐했다.
“세상에, 제 브랜드를요? 너무 영광이에요!”
자리에 앉은 시현의 얼굴을 거울로 바라보며, 원장은 물었다.
“직장 동료분 결혼식에 참석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튀지 않게요. 그렇다고 너무 초라해 보이지도 않게 부탁드려요.”
말하고 나니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사 초기에 UI 디자인을 할 때, 제일 골치가 아픈 주문이 그런 거였다. 참신하면서도 대중적으로, 눈에 확 띄면서도 세련되게,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원장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거야 제 전문이죠. 맡겨만 두세요!”
생각해보니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이기는 했다.
눈을 감고 얼굴을 맡긴 채 시현은 물었다.
“결혼하는 신부들도 많이 오죠?”
“연예인 아니면 거의 신부님들이지요. 가끔 전남친 결혼식에 참석한다든가 하는 일로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저희도 그럴 때는 좀 더 신경을 써 드리게 되죠.”
시현의 얼굴에 솜씨 좋게 화장품을 펴 바르며 원장이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드리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해요. 사실 진짜 복수는 보란 듯이 화려하게 꾸미고 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건데 말이에요.”
진짜 복수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다. 그 말이 왠지 귓가에 남았다.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겨우 헤어와 메이크업이 완성되었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시현은 한참 말을 잃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강시현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예쁜 자신이 거울 안에 있었다.
색조를 최대한 배제하고 투명한 피부 표현에 공을 들인 만큼, 훨씬 어리고 생기 있어 보였다. 눈매는 또렷하고, 뺨은 발그레하고, 입술은 마치 장미 꽃잎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아까까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던 새 옷이 이제야 맞춘 듯이 어울려 보였다.
놀라운 것은 이토록 달라졌으면서도 별로 꾸민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악물고 꾸민 것 같은 티가 하나도 안 나게,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웠다. 꾸민 듯 안 꾸민 듯한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거라는 사실을 시현은 처음으로 알았다.
“워낙 미인이시라 자연스럽게만 해드려도 확 미모가 살아나시네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원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시거든 결혼하실 때도 꼭 저희 숍 이용 부탁드릴게요.”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숍 측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내주어서, 따로 마련되어 있는 작은 대기실에서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레온의 비서가 들어와서 봉투 묶음을 건넸다.
“여기, 리스트 주신 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아까 미주에게 메시지로 축의금 리스트가 도착했다. 비서에게 부탁해서 리스트대로 봉투를 만든 것이었다.
팀장님 십만 원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오만 원 정도 하는 와중에, 미주 혼자만 당당하게 삼천 원을 적어 놓아서 웃음이 났다.
“하여튼 미주 씨.”
꼼꼼한 비서는 빈 봉투도 함께 챙겨다 주었다. 겉면에 제 이름부터 적어 놓고, 시현은 새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축하라…….
우진과 보라가 신혼집 침대 위에 뒤엉켜 있던 장면부터 시작해서, 그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오빠! 핸드폰 뺏어요!]
[내가 쓰레기 치워준 덕분에 당신은 윤태하를 잡았잖아.]
[쥐뿔도 없는 주제에 늘 그렇게 고고한 척, 우아한 척, 잘난 척! 그게 재수가 없다고. 알아들었어?]
시현은 마음을 결정했다. 아무리 나라도, 도저히 너는 용서 못 하겠다.
축의금 대신에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봉투에 넣고, 시현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쥐뿔도 없는 여자한테, 어디 평생 진 기분으로 살아봐.
잠시 후 태하가 뷰티 숍에 도착했다.
그새 머리는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옷도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새 슈트로 갈아입고 있었다. 원래 미모가 대단한 남자였지만 오늘은 작정했다 싶을 정도였다. 숍 안에 있던 사람들도 눈을 떼지 못했다.
“왔어?”
새삼 수줍어서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시현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참 바라보던 태하가 불쑥 물었다.
“립스틱, 지워지면 다시 발라주겠지?”
“응?”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에 태하는 시현의 손목을 잡고 방금 그녀가 나온 대기실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성급하게 입술이 덮쳐 왔다.
“……!”
깜짝 놀란 시현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껴안고, 태하는 입을 맞췄다. 입술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너무 예뻐서, 확 집어삼켜 버리고 싶어.
한참 동안 키스하고 나서도, 태하는 그래도 아쉽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쪽, 하고 소리 내어 입 맞추고 나서야 겨우 시현을 놓아주었다.
“너 진짜!”
흘겨보는 시현의 눈을 피해 딴청을 하던 태하가, 문득 테이블 위의 축의금 봉투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억지로 축하할 필요 없어. 화가 나면 그냥 화내도 돼.”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왜 늘 그렇게 참고만 살아, 하는 것처럼.
“그럼 웨딩드레스에 커피라도 끼얹어 줄까? 아님 신부 머리끄덩이라도 잡아?”
농담으로 한 말에 태하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시현은 봉투를 바라보며 웃었다.
“걱정 마. 저게 내 복수니까.”
*
결혼식 한 시간 전.
결혼식장 앞에 오픈형으로 마련된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는 보라의 기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퇴사 후 보라는 줄곧 신부 관리와 결혼 준비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시댁의 어마어마한 재력까지 뒷받침된 결과, 오늘의 결혼식은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럽게 완성되었다.
특급 호텔에 마련된 결혼식장은 고급스러웠다. 메이크업과 헤어는 국내 최고 아티스트의 작품이었다. 웨딩드레스는 물론, 피로연에 입을 이브닝드레스까지도 모두 해외 유명 디자이너에게 맞춘 것이었다.
어디를 보나 완벽한 결혼식인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언론들을 부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온갖 신문과 방송을 다 불러다가 전 국민 상대로 자랑을 하고 싶은데, 시댁은 재벌가인 만큼 사생활 노출을 극히 꺼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정이 신문사라는 거였다. 그 핑계로 조한신문 기자 한 명은 참석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래도 결혼식장의 풍경 같은 것은 일체 기사에 내지 못하고, 딱 신랑 신부의 모습 한 컷만 찍어서 기사에 싣기로 했다.
그 아쉬움을 푸는 것처럼, 보라는 청첩장을 공중 살포하듯 뿌렸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이미 퇴사한 미래은행 사람들에게도.
원래 전 직장 동료들은 기껏해야 축의금이나 보내고 마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보라는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축의금은 사양한다고 강조했고, 그 결과 같은 팀원들 대부분은 참석하기로 했다.
‘하기야 제까짓 것들이 언제 이런 특급 호텔에서 공짜로 식사를 해보겠어?’
어느덧 보라는 완벽히 귀족의 마인드가 되어 있었다.
비록 언론은 부르지 못했지만 대신에 온갖 정, 재계 인사들이 수없이 참석했다. 덕분에 결혼식 시작 한참 전부터 식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어머 보라야, 너무 예쁘다!”
“결혼 축하해!”
여기저기 도착한 사람들이 보라에게 찬사를 던졌다. 진심 어린 부러운 얼굴에 보라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와줘서 고마워.”
보라는 가장 행복한 신부의 얼굴로 웃었다.
“30분 전입니다. 잠시 두 분 포토타임 가지시죠.”
기자가 말했다. 신랑이 다가와서 내미는 팔을 붙잡고, 보라는 사뿐사뿐 걸어 신부대기실 앞에 마련된 포토 존에 섰다.
하객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휴대폰을 꺼내 찍기 시작했다. 비록 진짜 기자는 달랑 한 명뿐이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으니 그런대로 허영심이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어?”
문득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저 사람, 유니온TA 윤태하 대표 아냐?”
“맞네! 케네디 회장 아들!”
윤태하? 보라는 가슴이 철렁해서 바라보았다.
저만치서 다정하게 팔짱을 낀 두 남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아우라에, 결혼식장 앞을 꽉 메운 사람들이 홍해를 가르듯 양옆으로 비켜섰다.
분명히 조명은 신랑 신부를 비추고 있는데, 빛이 나는 것은 그쪽이었다. 깔려 있지도 않은 레드카펫이 그들의 발아래 보이는 것 같았다.
“……!”
신부의 환한 얼굴에서, 오늘 처음으로 미소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