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 남자가 아무 데서나 속살 보이는 거 아니에요. (96/181)


#96. 남자가 아무 데서나 속살 보이는 거 아니에요.
2022.08.30.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미래은행 개발팀 인원들은 아수라장을 헤치고 황망히 결혼식장을 나왔다.


“그러니까, 강시현 과장 약혼자랑 바람피운 게 이보라 씨란 말이지?”

아까 영상 속에서 이보라가 ‘강 대리님’이라고 부른 상대는 분명 강시현이었다. 비록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같이 일한 세월이 있는데 몰라볼 리가 없었다. 목소리만 듣고도 바로 알았다.

세상에, 회사에서 여신으로 불리는 이보라가 그런 인간이었다니! 제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보라 씨 방금 웃는 거 봤어? 아예 정신줄 놓은 거 같던데.”

“아휴, 인생 망했는데 그럼 제정신이겠어요?”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앞으로 어디 시집이나 가겠나.”

“지금 시집이 문제예요?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얼굴 들고 살기도 어렵죠.”

“거 이민 가야겠구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갑자기 스카프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개발팀 인원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보셨어요?”

다름 아닌 미주였다.


“아니 미주 대리는 또 언제 왔어?”

“꼴은 그게 뭐고?”

“저는 오늘 여기 안 오기로 돼 있는 사람이거든요.”

미주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몰래 구경 온 건데, 안 왔으면 땅 치고 후회할 뻔했네요.”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개발팀 사람들은 금세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근데 저거, 누구 짓일까요?”

“설마 강시현 씨가 복수한 건가?”

미주가 타박했다.


“여태 시현 씨 겪어 보고도 모르세요? 저런 일 있고도 여태 입 꽉 다물고 있었던 사람인데요.”

“하긴 똥차 가고 벤츠 온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네. 그럼 대체 누구지?”

“뻔하잖아요. 시현 씨 전 약혼자 짓이죠!”

그제야 사람들은 무릎을 쳤다.


“어쩐지 남자 얼굴이랑 목소리는 하나도 안 나오더라니!”

“진짜 무서운 인간이네.”

“그 남자하고 결혼까지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강 과장님 조상이 도우셨네요!”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시현을 찾았다.


“그나저나 강시현 과장은 왜 안 보이지?”

 

*

아수라장을 헤치고 결혼식장을 나오는 시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시현을, 태하가 부축하듯 팔을 붙잡고 데리고 나왔다.

그는 사람이 없는 곳까지 와서야 비로소 시현을 꼭 안아주었다.


“……내가 아니야.”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자 태하가 대답했다.


“알아.”

낮에 뷰티 숍에서 시현은 고민 끝에 결심했었다.

이왕 가는 결혼식, 악의를 품고 가지는 말자. 비록 용서할 마음은 끝까지 들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끝을 맺자.

유치한 복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시현은 보라가 자신의 어떤 점에 가장 발작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래저래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처음에 그 사진과 영상을 찍었던 휴대폰은 이미 망가졌다. 오로지 태하의 휴대폰 안에만 남아 있으니, 그것만 지우면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사진들, 이따가 너한테 부탁해서 지우려고 했었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보라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또 봐줄 셈이냐고 핀잔을 들을까 무서워서였다.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바보 같을 정도로 올곧고, 늘 진심이지.”

“…….”

“그래서 내가 사랑하게 되었잖아.”

아까 결혼식장에는 미래은행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 영상 속에 등장하는 ‘강 대리님’이 자신이라는 것쯤이야 모두 알아보았을 것이다.

어차피 시현이 파혼했던 건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이유가 결혼 상대의 바람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이미 다 알려져 있다. 그러니 그 바람 상대가 보라라는 사실이 더해져 봐야 새삼 타격이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시현은 좀처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보라가 원래 당했어야 할 망신을 이제라도 당했을 뿐인데,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남의 인생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현장을 제 눈으로 목격한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누가 한 짓인지는 뻔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우진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 부서진 휴대폰을 그대로 두고 나왔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우진이 휴대폰을 부순 후까지도 계속 녹화가 되고 있었던 걸 보면, 액정만 망가지고 기능은 그대로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미처 몰랐어.”

태하가 있는 힘껏 안아주고 있는데도 떨림이 멎지 않았다. 저런 사람과 결혼까지 할 뻔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교묘하게 자기 이름이나 목소리, 얼굴이 나오는 부분은 다 편집해버리고 철저하게 보라만 드러낸 치밀함에도 소름이 끼쳤다. 너 죽고 나 죽자, 도 아니고 대놓고 너만 죽으라는 거였다.

보라에게 왜 저런 짓을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게 화가 나서 망가뜨려 버린 거겠지.

그렇다면 같은 짓을, 나에게라고 하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불안한 마음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걱정 마.”

태하는 힘주어 속삭였다. 시현과, 그녀의 불안까지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내 옆에 있으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

희선은 레온과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서울의 후텁지근하고 탁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맑은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자 오랫동안 움츠려 있던 마음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선은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는데, 나는 늘 고개만 숙이고 살았구나.

공항 앞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오픈카가 대기하고 있었다. 레온이 열쇠를 넘겨받아서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자못 긴장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달릴게요. 직접 운전해 본 지가 오래돼서.”

“그럼 운전기사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레온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꾸했다.


“방해받을 수 없죠, 어떻게 온 여행인데.”

단호한 목소리에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태하랑 시현이도 일부러 떼어놓고 온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레온이 펄쩍 뛰었다.


“애들은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겨서 간 건데……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진심으로 억울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희선을, 레온이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 웃는 거 보니까 참 좋네요.”

희선은 당황했다. 내가 웃었나?

모처럼의 여행에 기분이 들떠서 저도 모르게 경계가 느슨해진 모양이다. 얼른 표정을 가다듬는 희선에게, 레온이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하고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여행 온 거 아니에요. 이제 당신 신분도 되찾았으니까, 기념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어요.”

“…….”

“어차피 우리, 앞으로 3박 4일은 함께 있어야 해요. 절대 당신 부담스럽게 하지 않을 테니까,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좀 사이좋게 지내 주면 안 될까요?”

잘못한 것도 없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서 희선은 조금 미안해졌다. 이 사람에게도 모처럼의 여행일 텐데, 내가 꽁하니 입 다물고만 있으면 서로 괴로운 시간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흘려보내기에는, 날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할게요.”

차는 조심스럽게 달렸다. 희선은 살며시 눈을 감고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을 만끽했다.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들뜨는데, 곁에 있는 남자와의 대화는 의외로 즐거웠다.

가게에서 함께 있을 때는 손님이 많아서 별로 얘기를 나눌 틈도 없었고, 무엇보다 레온이 말을 걸어도 대부분 희선이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가 되지 못했었다.


“그날, 소개팅 상대가 나라는 거 알고 나온 거죠?”

“네.”

“많이 화났겠어요. 내가 얼굴도 안 보고 거절해서.”

“별로요.”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정작 상처를 받은 것은, 호텔에서 나올 때 그가 자신과 마주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 왜 나 보고 알은체도 안 했어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레온이 한숨을 내뱉었다.


“뒤에 가서 진짜인 걸 알고 땅을 쳤죠. 헛것은 택시를 타지 않을 테니까.”

후회 어린 목소리에 희선은 웃음을 참았다. 그가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속상해했을 것을 상상하니 왠지 고소했다.


“그날 당신, 되게 예뻤는데.”

곁눈질로 희선을 슬쩍 쳐다보고, 레온은 말했다.


“오늘은 더 예쁘네요.”

그녀가 화장을 한 것을 알아본 것이다. 희선은 얼른 변명했다.


“엄마가 초라해 보이면 태하가 같이 다니기 창피할 거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었지만, 레온이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멋진 오픈카를 타고 도착한 곳은, 낡은 간판에 퉁명스러운 글씨로 [흑돼지 전문]이라고 쓰인 게 전부인 허름한 식당이었다.

레온이 차 문을 열어 주면서 변명처럼 말했다.


“보기에는 이래도, 현지인들이 다니는 진짜 맛집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희선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서 좋았다. 가본 적도 없는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벽에 유명인 사인 한 장 붙어있지 않은 작은 식당이었지만 음식 하나만은 정말로 맛있었다.

생고기 질은 훌륭했고, 밑반찬도 공장표가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만든 것이었다. 음식 장사를 하는 희선은 금세 알아보았다.

잘 구워진 돼지고기 한 점을 지글지글 끓는 멜젓에 찍어서 입에 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희선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레온은 신이 났다.


“자, 더 먹어요.”

굽는 대로 저 먹이기에만 바빠서 정작 자기는 한 점도 못 먹고 있는 걸 뒤늦게 깨닫고, 희선은 미안해졌다.


“당신도 좀 먹어요.”

어색하게 그의 접시에 고기를 얹어 주자 레온이 기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눈이 부셔서, 희선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결국은 둘이서 돼지고기를 4인분이나 해치웠다.

맛있는 음식에 배가 부르자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살면서 언제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을까. 왜 이런 즐거움을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식사 후에는 천천히 해안 도로를 달리며 바닷가의 경치를 만끽했다.

레온이 사준 차가운 망고 주스가 다디달았다. 어쩐지 자기는 별로 생각이 없다면서 희선에게만 주더니, 잠시 후 은근슬쩍 한다는 말이 이랬다.


“나도 한 모금 줄래요?”

먹던 건데……. 조금 망설이다 입에 가까이 갖다 대주자 레온이 냉큼 빨대를 머금었다.

꿀꺽.

선명하게 움직이는 목울대에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서, 희선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차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해서 크게 더운 줄 몰랐는데 역시나 오후가 되자 햇살이 많이 뜨거워졌다. 밀짚모자를 내려 쓰는 희선에게, 레온이 물었다.


“더운데 잠깐 바닷가에 가 볼까요?”

“좋아요.”

레온은 한적한 바닷가에 차를 세워 주었다. 멀리서 가족들 몇몇이 놀고 있는 것이 전부인 작고 조용한 해변이었다.

충분히 해수욕을 해도 될 날씨였지만 수영까지는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희선은 샌들만 벗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살짝 발을 담그는 순간 가슴 속까지 시원해졌다. 맨발에 착 감기는 모래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당신도 들어와요.”

손짓을 하자 레온이 웃으며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바닷물처럼 새파란 셔츠가 보기에는 무척 시원해 보였지만, 이 더운 날씨에 긴 소매인 것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더울 텐데 소매라도 좀 걷어요.”

제 딴에는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레온은 딱 잘라 거절했다.


“남자가 아무 데서나 속살 보이는 거 아니에요. 조신하지 못하게.”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바짓단은 무릎까지 걷어붙인 상태라 웃음이 났다. 희선은 놀리듯 그의 드러난 종아리를 발끝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뭐고요?”

“이런 걸 가지곤 속살이라고 안 하지.”

갑자기 그가 바짝 다가서더니 희선을 향해 허리를 낮췄다. 갑자기 확 낮아진 목소리가 비밀을 고백하듯 속삭였다.


“……알잖아요? 진짜는 따로 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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