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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후회하는 남자 (97/181)


#97. 후회하는 남자
2022.09.02.



 


“이런 걸 가지곤 속살이라고 안 하지.”

갑자기 그가 바짝 다가서더니 희선을 향해 허리를 낮췄다.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가 비밀을 고백하듯 속삭였다.


“……알잖아요? 진짜는 따로 있는 거.”

귓가에 훅 끼치는 따스한 숨결에 깜짝 놀란 희선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확 밀쳐버렸다.


“꺅!”

불시에 기습을 당한 남자가 균형을 잃었다. 어어, 하고 양팔을 크게 휘젓다 기어이 바닷물 위에 나동그라졌다.

화보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던 남자가 삽시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돼버렸다.


“풋!”

희선이 웃음을 터뜨리자 레온이 분한 얼굴을 했다.


“지금 웃었어요?”

다음 순간 그가 물귀신처럼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희선은 놀라서 어떻게든 뿌리치려 애썼다.


“놔요, 이거 새 옷이란 말이에요!”

“나도 새 옷이었거든요!”

결국은 그녀도 넘어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왕 젖어 버린 거, 희선은 이를 악물고 레온에게 마구 물을 끼얹었다. 레온도 인정사정 봐 주지 않았다.

물싸움은 점점 격렬해져서, 결국은 서로 물을 먹고 먹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잇!”

레온의 머리를 꽉 눌러서 물을 먹이자 한참 콜록거리던 그가 지지 않고 희선의 팔을 잡고 들어가서 물을 먹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레온에게는 기껏해야 허리 정도까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훨씬 키가 작은 희선에게는 가슴께까지 물이 차올랐다.


“너무 깊잖아요!”

수영을 할 줄 모르는 희선은,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레온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 안아 왔다.

뒤늦게 놀라서 얼른 팔을 풀었지만 이미 온몸이 그의 품에 단단히 껴안긴 후였다.

열기를 품은 시선이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서, 한곳에 집요하게 머물렀다.


“…….”

그를 떠올리며 산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희선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야, 남자는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나갈까요, 이제.”

무언가를 죽도록 눌러 참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

보라의 결혼식이 끝난 후, 시현은 태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제주도 가 계신 동안만이라도 나랑 호텔에서 지내는 게 좋지 않겠어?”

태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오늘은 집에서 잘래. 넌 호텔로 가.”

사실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다음 날인 일요일은 바로 태하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기념으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던 건데, 여행은 가지 못하게 됐으니 아침에 손수 미역국이라도 끓여 주고 싶었다.

호텔에서는 요리를 할 수가 없으니까 일부러 집으로 온 것인데, 그런 시현의 꿍꿍이를 모르는 태하는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어 했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현을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신 오늘 많이 놀랐잖아.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있어.”

결국 시현은 태하의 등을 떠밀어 쫓아내다시피 해야 했다.


“괜찮다니까. 걱정 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와.”

강제로 태하를 보내 버린 시현은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아침에 생일상 차릴 준비를 했다.

먼저 미역국부터 끓였다. 갈비도 양념해서 재어 놓고, 잡채도 무쳤다. 버터구이를 할 새우도 손질해 놓고, 샐러드를 만들 채소도 다 씻어 놓았다.

다 준비해 놓고 보니 무언가가 허전하다. 뒤늦게 케이크가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집 근처 베이커리에 나가서 케이크를 사서 돌아왔다.


“시현아.”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시현은 깜짝 놀라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렸다.


“……우진 오빠.”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설마 진짜로 보라 다음은 내 차례인가. 나한테 해코지하러 찾아온 건가.

시현은 억지로 태연한 얼굴을 꾸며냈다.


“오빠가 여긴 웬일이야?”

“아까 너도 봤지? 보라 결혼식 말이야.”

마치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개처럼, 기대감에 찬 표정에 시현은 기가 막혔다. 우진의 짓이라는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제게 찾아와서 그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줄이야.


“그래서 그게 뭐?”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나쁜 년, 이상한 기사나 내보내서 아무 죄도 없는 널 욕 먹게 만들고…….”

갑자기 우진은 안쓰러운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 걱정 마, 시현아. 내가 있으니까.”

“뭐?”

“너 당한 거 내가 다 갚아줬으니까, 우리 이제 다 잊고 제자리로 돌아가면 된다고.”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런 짓을 해 놓고, 나를 위해서 그랬다고?

심지어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웃기지 마. 너희 둘이 저지른 더러운 짓거리에 왜 날 끌어들여?”

예전의 우진 같았으면 너 말 다 했냐고 벌컥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진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차근차근 말했다.


“들어봐. 걔는 처음부터 우리 결혼을 깨려고 처음부터 나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오히려 더 소름이 끼쳤다.


“그따위 수작에 넘어가서 헤어진 게 분하잖아. 지금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응?”

“그 수작에 넘어간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야.”

시현은 또박또박 정정해주었다.


“그리고 나한테 제자리는 태하 곁이야. 이제 와서 헛소리 마.”

하지만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하는 거, 그거 사랑 아니야. 넌 그냥 나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잠시 내 대용품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감히 누가 누구의 대용품이라는 거야!”

결국 시현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윤태하 신발을 핥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야, 알아?”

“왜, 그 새끼가 젊고 몸 좋고 돈 많아서?”

우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이상한 빛으로 번득였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살살 꾀듯 부드러웠다.


“너 그렇게 속물 같은 여자 아니잖아, 시현아.”

우진이 다가서는 바람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살면서 실수 한번 안 하는 사람 없잖아. 네가 잠깐 다른 놈 만났던 거, 나도 없었던 일로 할게. 그러니까 우리 서로 한 번씩 실수한 거라고 생각하자.”

반복되는 실수라는 단어가 뇌관을 건드렸다. 두려움 대신에 분노가 서서히 핏줄을 채웠다.


“실수는.”

시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케이크 상자를 가리켰다.


“이런 걸 실수라고 하는 거야.”

다행히 상자가 꽉 닫혀 있어 케이크가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안은 엉망이 돼 있을 것이 뻔했다.


“뭘 떨어뜨리고, 약속을 깜빡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그런 게 실수지.”

“시현아.”

“실수로 다른 여자한테 선물을 갖다 바치고, 실수로 신혼집까지 데려가서, 실수로 키스하고, 실수로 옷을 벗고……!”

지워 버리려 애를 썼던 기억이 구역질처럼 밀려왔다.


“그런 건 실수라고 안 해. 그건 고의지.”

“시현아,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뻗어 오는 손을, 시현은 있는 힘껏 뿌리쳤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너 같은 인간이랑 엮였던 걸 생각하면 쪽팔려서 확 죽어 버리고 싶으니까.”

“시현아, 제발. 나 진짜 너 없으면 못 살아, 응?”

“죽어, 그럼.”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우진을 향해, 시현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한없이 진심이었다. 내일 당장 이 작자의 부고를 받는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다.


“장례식엔 안 갈 거니까 부고는 보내지 말고.”

돌아선 시현은 금세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언제 왔는지, 태하가 저만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태하야.”

태하를 본 우진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태하는 우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가와서 떨어진 케이크 상자를 조심스레 주워들고는 다른 한 팔로 시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들어가자.”

그러나 금세 우진에게 앞을 가로막혀버렸다.


“너 이 새끼, 사람을 무시해?”

우진은 태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저번에 맞은 건 잊지 않았는지, 먼저 덤벼들지는 않고 반대로 태하를 도발했다.


“왜, 또 저번처럼 때려 보지. 어? 너 사람 치는 거 잘하잖아.”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어찌나 얄밉게 구는지, 모르는 사람도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쳐 보라고, 어? 어?”

시현은 저러다 진짜로 태하가 주먹을 날릴까 봐 초조해졌다. 저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지는 어제 일로 잘 알았다. 한 대라도 때렸다간 경찰서건 신문사건 달려가고도 남을 인간이다.

게다가 태하는 이제 유명인사 아닌가. [유니온TA 윤태하 대표, 일반인 폭행 논란] 벌써부터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하는 픽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 망가진 걸, 뭘 때리기까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태하는 우진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우진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많이 망가졌네.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훨씬 키가 작은 우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태하는 조용히 말했다.


“눈이 있으면 봐. 저 여자가 당신이랑 어울리는지.”

우진은 새삼 시현을 바라보았다.

아까 결혼식장에서 봤을 때, 한껏 꾸미고 차려입은 그녀는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빛이 났다. 돈 많은 놈이랑 사귀더니 역시 때깔이 달라졌다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지금 그녀는 화장도 지우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눈이 부셨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빛이 비싼 옷, 비싼 가방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우진은 깨달았다.

저 여자는 늘 진심이었다. 바보 같을 만큼 상대를 믿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하다못해 나 같은 놈에게마저도.

이제 그 여자의 시선이 오롯이 다른 남자에게 향해 있는 것을 본 순간, 우진은 가슴을 굵은 창으로 꿰뚫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태하의 눈빛에 어린 것은 증오도, 경계심도 아니었다.

연민이었다.


“기적이란 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우진은 비로소 벼락을 맞은 듯이 깨달았다.

아, 저 여자가 바로.

내 인생에 찾아온 기적이었구나.

그러나 깨달았을 때는 한참 늦어 있었다.

우진은 시현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시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소리 내어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강시현 눈앞에 나타나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우진을 몸으로 가로막아서며, 태하는 말했다.


“또 할 말이 있거든 그랜드호텔로 날 찾아와. 언제든 상대해 줄 테니까.”

태하가 시현의 어깨를 안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진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현아……!”

길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자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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