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말해봐요, 상상하지 않았다고 (98/181)


#98. 말해봐요, 상상하지 않았다고
2022.09.06.


지칠 때까지 놀고 나서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쉬자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제주의 귤빛을 닮은 하늘을 보자 자연스럽게 옛일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넸던 그날.

그 언덕, 그 노을.

먼 옛날을 추억하듯 레온 역시 그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구겨진 셔츠를 입고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옛날 그녀가 사랑했던 가난한 화가 그대로였다.

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는 불쑥 물었다.

16624775089229.jpg

“나였어요, 그림이었어요?”

젊고 서로 사랑하던 시절, 그가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이었다.

16624775089229.jpg

[Me, or my painting? (나예요, 내 그림이에요?)]

그녀가 처음 반했던 것이 자신인지, 아니면 그림이었는지,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희선은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서였다.

사실 희선에게는 둘 다 같은 것이었다. 남자와 그림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같이 봐 온, 딱히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풍경을 매일같이 화폭에 담는 일에 열중해 있는 남자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그가 그리는 그림을 보고는 또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구나.

노을이 지는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니 자기가 반한 것이 어느 쪽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어서, 희선은 대답 대신 그냥 웃기만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수없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희선은 미소를 지었다.

16624775089238.jpg

“생각나면 말해줄게요.”

 

16624775089243.jpg

 

*

레온과 희선은 노을이 다 질 때까지 바닷가에 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혼자 동그마니 자리 잡은 작은 집이었다.

유러피안 스타일로 꾸며진 내부에서 테라스로 이어지는 바깥을 내다보면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마치 외국의 어느 섬에 휴가를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바닷물과 모래 때문에 머리고 옷이고 모두 엉망이었다. 희선이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침대 위에 아까까지도 없었던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뭘까,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6624775089229.jpg

“저녁은 멋진 식당에서 먹을 거예요. 캐주얼한 복장으로 가기는 좀 곤란한 곳이라 당신 옷을 준비해 봤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도 어느 틈에 슈트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완벽하게 손질한 상태였다.

또다시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먼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언젠가 저 남자와 키스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일부러 옷까지 차려입고 가야 하는 식당이란 어떤 곳일까. 희선은 전에 딱 한 번 가 봤던 그랜드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을 떠올렸다.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절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16624775089238.jpg

“저어, 난 그렇게 좋은 곳은 안 가도 괜찮아요. 낮에 갔던 식당 정도면 충분해요.”

16624775089229.jpg

“일부러 예약한 거니까 가 봐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을 허름한 식당에만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에둘러 부담스럽다고 호소했지만 그는 알아들어 준 것 같지 않았다.

16624775089229.jpg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요.”

혼자 남은 희선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오드리 헵번을 연상시키는 사브리나 네크라인의 블랙 드레스와 함께 보석 장식이 달린 구두, 클러치 백에 큼직한 귀걸이까지 들어 있었다.

거친 손끝으로 가만히 부드러운 실크를 쓰다듬자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내키지 않는 것을 참고 희선은 상자 안에 든 것들을 하나하나 몸에 걸쳤다. 화려한 차림에 창백한 얼굴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간단하게나마 화장도 다시 했다.

머리를 살짝 틀어 올리는 것으로 단장을 마무리했다. 어색하게 밖으로 나오자 자동차에 기대 있던 남자가 흠칫 놀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16624775089229.jpg

“세상에. 당신, 너무…….”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려던 남자가, 결국은 얼굴을 붉혔다.

아까보다 훨씬 작아져 있는 희선을 태우고, 레온은 들뜬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이미 직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16624775089275.jpg

“어서 오십시오.”

안내를 받아 웅장한 느낌의 새하얀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중주의 선율이 은은하게 흐르는 가운데,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느긋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희선은 어떻게든 당당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주눅이 들어야 해.

하지만 그녀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밑바닥에서,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서 산 사람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도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16624775089229.jpg

“어때요, 분위기 마음에 들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들뜬 듯이 묻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레온을 본 사람들마다 놀란 얼굴을 했다. 케네디 회장, 어쩌고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레온에게 향했던 시선들은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있는 희선에게도 향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 마치 ‘왜 저런 여자랑 같이 있지’ 하고 의아해하는 것처럼 것처럼 느껴져서, 희선은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혹시 이 사람은 부끄럽지 않을까, 나와 있는 게 창피하지나 않을까.

목이 탄 나머지 희선은 테이블에 놓인 유리 물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왠지 조금 움찔한 레온이, 금세 따라서 물그릇을 들어 마셨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가 당황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레온은 상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상냥한 미소였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만 쳐다보라는 뜻이었다.

16624775089275.jpg

“손 씻으셨으면 치워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다가와서 물그릇을 치우며 말했을 때에야 희선은 겨우 그것이 먹는 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느라 희선은 테이블 아래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잠시 후 나오기 시작한 코스 요리는 대부분 해산물이었다.

16624775089229.jpg

“고기는 낮에 먹었으니까, 저녁은 해산물이 좋을 것 같아서요.”

옥돔과 게, 꽃새우 따위의 재료들이 그녀가 평생 먹어 본 적이 없는 조리법으로 요리되어 나왔다.

음식이라기보다는 마치 접시 위에 예쁜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아서,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데 굳이 나이프로 잘라 먹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통째로 먹으면 되는 걸까. 포크가 여러 개 있는데 대체 이 중 어떤 포크를 사용해야 맞는 걸까.

일일이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보느라 희선은 제 입에 들어가는 것이 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마치 제집 안방에서 식사하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16624775089229.jpg

“나 요즘도 가끔 그림 그리고 있어요.”

16624775089238.jpg

“네.”

16624775089229.jpg

“보고 싶지 않아요?”

16624775089238.jpg

“글쎄요.”

너무 긴장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단답형으로 대답하게 되었다.

16624775089229.jpg

“내가 실수했네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던 레온이, 결국 한숨을 지었다.

16624775089229.jpg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작은 식당으로 갈걸. 괜히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고행과도 같은 식사가 겨우 끝났다.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희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24775089238.jpg

“잘 먹었어요.”

뭘 제대로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배는 불렀다. 디저트에는 손조차 대지 않은 것을 보고 지배인이 달려와서 안절부절못했다.

16624775089275.jpg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16624775089238.jpg

“아니에요, 아주 맛있었어요. 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요.”

문제가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차에 타자 레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624775089229.jpg

“아직 시간이 너무 일러서 집에 들어가기 아까운데. 우리 영화나 보러 갈래요?”

16624775089238.jpg

“피곤하네요. 오늘은 가서 일찍 쉬고 싶어요.”

지금은 빨리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까 손 씻는 물을 마시는 레온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옆자리 손님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레온은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숙소로 차를 몰았다. 가는 내내 희선은 어두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에서는 에릭 클랩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도망 다니고 숨어 있었어요.

이렇게 애원해요, 내 사랑, 제발.

마치 노린 것 같은 가사에 오히려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차라리 알아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희선은 영어를 배운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알고 있다. 좋은 데서, 좋은 거 먹여 주고 싶어서 일부러 신경 써서 준비한 거라는 걸. 하지만 늘 양지에서 살아온 남자는 그녀의 입장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희선은 장장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의 눈을 피해서 숨어 살아온 사람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그렇게 살았으니까, 숨어 산 세월이 그렇지 않았던 날들보다도 더 길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어깨 활짝 펴고 당당해질 수는 없는 거였다.

레온의 잘못은 아니었다. 로미오가 로미오인 것이 로미오의 잘못은 아니니까. 문제는 자신이 줄리엣이 아니라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지금은 더더욱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으로 가 버리려는 희선을, 레온이 따라와서 붙들었다.

16624775089229.jpg

“자기 전에 가볍게 한잔해요. 내가 칵테일 만들어 줄게요.”

그러나 그녀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남자와 멀어지고 싶었다.

16624775089238.jpg

“들어가서 쉴게요.”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대꾸하자 손목을 붙잡혔다.

16624775089229.jpg

“제발 이러지 말아요. 오늘 낮에는 무척 즐거웠잖아요,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 남자가 애원하다시피 하는 것이 오히려 신경을 거슬렀다.

16624775089238.jpg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날카롭게 대꾸하자 순간적으로 그가 숨을 들이켰다.

16624775089229.jpg

“대체 뭐가 문제지? 손 씻는 물 마신 것 때문에?”

눈치채고 있었구나. 정곡을 찔린 희선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16624775089238.jpg

“나 때문에 굳이 당신까지 창피당하지 않아도 됐어요.”

자신이 마신 것도 물론 수치스럽다. 그러나 더욱더 견딜 수가 없는 것은, 그가 자신 때문에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이었다. 그것도 일부러 나서서.

레온이 답답한 듯이 머리칼에 손을 넣어 헝클어뜨렸다.

16624775089229.jpg

“그까짓 게 뭐라고 이래. 난 당신 때문이라면 독약이라도 마실 수 있는데.”

16624775089238.jpg

“이거 놔요.”

잡힌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붙들고, 어떻게든 그녀의 눈을 마주 보려 애를 썼다.

16624775089229.jpg

“내 눈을 보고 말해봐요. 이 립스틱, 나 때문에 바른 게 아니라고.”

희선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립스틱을 사면서 몰래 설렜던 것도,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까지도.

16624775089229.jpg

“말해보라니까.”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에서 정염이 불타고 있었다.

그 눈빛에,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늘 고분고분 상냥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었다. 사랑을 나눌 때만은 누구보다 뜨겁고, 가끔씩은 강압적이기까지 했던…….

그 남자가 속삭였다.

16624775089229.jpg

“……나하고 키스하는 거, 상상하지 않았다고.”

 

16624775105137.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