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당신 말고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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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당신 말고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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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당신 말고는 아무도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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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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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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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키스하는 거, 상상하지 않았다고.”
다그치듯 속삭이며 다가서는 순간, 남자에게서 낮에는 나지 않았던 향기가 물씬 났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꽃 향기였다.
남자가 쓰기에는 너무 달콤한 향기에, 유혹하려는 의도가 명백히 묻어났다. 제 숨은 욕망까지 낱낱이 꿰뚫고 있는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녀는 반항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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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 안 했…….”
덧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입술을, 레온이 자기 입술로 틀어막아 버렸다. 뻔한 거짓말 따위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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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성이라고는 없는 입맞춤이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참아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거침없이 밀어붙여 오는 정열에 숨이 막혀서 고개를 돌리려 해도, 집요하게 쫓아와서 다시 입술을 삼켜 버렸다.
기나긴 키스로 다리에 힘이 빠지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레온은 겨우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녀는 빌다시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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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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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너무 오래 헤어져 있었지.”
끔찍할 정도로, 하고 그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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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사랑해야 해. 하루가, 아니 1분 1초가 아까워.”
그토록 상냥했던 남자가, 여태 숨기고 있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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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를 원하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이유 대면서 밀어내 봐야 소용없어.”
덜덜 떨리는 희선의 턱을, 레온이 살며시 붙잡았다. 방금 나눈 키스로 젖어서 빛나는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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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도망가고 싶었으면, 영원히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지.”
드레스 위로 드러난 목선과 어깨를 느릿하게 훑는 시선에, 희선은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이 남자가 자신을 안고 침실로 들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냥 싫은 거라면 거절해 버리면 그만일 텐데,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에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모순이 스스로도 용서되지 않아서, 희선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순간,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한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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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놔줄게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레온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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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와요.”
*
은은한 커피 향기에 눈을 뜨자 어느덧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물에 젖은 솜 같이 느껴졌다. 어제 물놀이의 여파가 이제야 나타나는 건지도 몰랐다.
어떤 얼굴로 레온을 봐야 할까, 고민하며 희선은 무거운 몸을 끌고 침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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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요?”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주방에 서서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무척이나 산뜻한 태도였다. 마치 어젯밤 키스 따위는 꿈속의 일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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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침 먹어요.”
그는 방금 내린 커피와 샌드위치를 희선의 앞에 놓아 주고 자신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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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유명한 빵집이 있어서, 아침에 나가서 사다가 만들어 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속이 부드러운 빵에 얇게 자른 햄과 치즈, 어린잎 채소 등이 가득 들어 있는 샌드위치였다. 분명 맛있어 보이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전혀 식욕이 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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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을게요.”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희선을 보고, 레온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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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 내가 미안했어요.”
그는 불쌍할 정도로 희선의 눈치를 보았다. 홧김에 밀어붙이듯 키스해 놓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에 어제까지도 없었던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희선도 마찬가지였다. 늦게까지 뜬눈으로 누워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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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를 원하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이유 대면서 밀어내 봐야 소용없어.]
사실이었다. 희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무리 애써도 그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심지어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고 저 품 안에 냉큼 뛰어들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어젯밤 레스토랑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 그녀에게는 여태 살면서 당한 어떤 모욕보다도 더 수치스러웠다. 이 사람의 곁에 있으면 그런 일이 계속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가 좋으면서도, 함께 있으면 때때로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느끼지 않아도 될 자괴감을 자꾸만 느끼게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또 제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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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절대 당신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다시 어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주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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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대답하지 못하는 희선을, 레온이 후회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만들어준 정성을 봐서 억지로 먹었지만 아무래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레온 때문에 불편해서라기보다, 말 그대로 몸이 아팠다.
결국 희선은 샌드위치를 채 반도 먹지 못하고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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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었어요.”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질했다. 크게 휘청하는 희선을, 레온이 놀라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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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희선은 겨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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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희선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본 레온이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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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열이 말도 못 하잖아요!”
서늘한 손바닥이 기분 좋아서, 희선은 힘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
결국은 감기몸살이었다.
레온이 병원에 데려가 주었지만 의사는 잘 먹고 잘 쉬라고 하면서 약을 주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에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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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갈아 주는 레온에게, 목까지 이불을 덮은 희선이 시무룩하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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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스노클링도 취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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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스노클링보다 이렇게 당신이랑 집에 있는 게 훨씬 즐거운데요?”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어딘가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레온이 얼마나 열심히 여행 준비를 했는지, 그의 비서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희선은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기대했던 여행인데, 이 한여름에 감기에 걸려 누워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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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와서 앓아나 눕고 참…… 쓸모라고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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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말아요.”
희선의 앞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레온이 달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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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끔 아픈 당신 곁에서 이렇게 돌봐주고, 간호해 주는 상상을 했어요. 당연히 해줘야 했을 때 하지 못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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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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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태하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 했죠?”
그랬다. 친정엄마도 없는 희선은 혼자서 아기를 낳고, 혼자서 미역국을 끓여 먹고, 혼자서 젖몸살을 앓았다.
정작 힘든 것은 몸보다도 마음이었다. 방긋방긋 배냇짓을 하는 아기를 보며 희선은 수없이 눈물을 삼켰다. 아빠 얼굴도 모르고 자랄, 불쌍한 내 아기.
그때 생각이 떠오르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희선의 눈동자에 어리는 물기를, 레온이 가만히 엄지손가락으로 거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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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다 갚을 거예요. ……당신이 기회만 준다면.”
이번에도 희선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는 어젯밤처럼 집요하게 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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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어나서 밥 먹어야죠.”
레온은 희선을 안아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죽을 떠서 입가에 가져다주는 숟가락에, 희선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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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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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게 해줘요.”
잠시 망설이다 희선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쁜 얼굴을 했다.
죽을 다 먹은 다음에는 약을 먹을 차례였다. 하필 쓰디쓴 가루약이었다. 레온이 건네주는 물컵을 다 비웠는데도 여전히 입안이 써서, 희선은 이마를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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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미리 사탕이라도 준비할걸.”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가, 갑자기 확 얼굴을 가까이했다. 열이 올라 바짝 마른 입술에, 촉촉하고 서늘한 것이 번개같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기습 키스에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희선을 향해, 레온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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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게 이것뿐이어서.”
새빨개진 희선이 뒤늦게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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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 아빠!”
목소리를 높이자 레온이 못마땅한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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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부르죠? 나도 이름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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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태하가 없었으니까 그랬죠. 지금은 태하 아빠니까 태하 아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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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지만.”
갑자기 레온이 몸을 훌쩍 날려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희선이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어서 따뜻하고 커다란 몸이 그녀를 폭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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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한테는 태하 아빠 말고, 남자였으면 좋겠는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리는 희선을 꽉 껴안고, 레온은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덧 장난기가 싹 가신, 진지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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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피하지만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왜 자꾸 도망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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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서 그래요.”
몸이 아파서 상대에게 의지하게 되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 모양이다. 희선은 처음으로 그에게 진심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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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되묻는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러워서,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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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에 있는 게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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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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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도망치면서 사느라 친구 하나를 못 만들었어요. 누구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날 밤에는 잠도 못 잤어요. 남의 눈에 띌까 봐 억울한 일을 당해도 큰소리 한번 못 내고, 이십 년 넘도록 그렇게 살았어요.”
희선은 어떻게든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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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게 싫어요. 남의 눈에 띄는 것도 무섭고요. 그런데 당신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잖아요.”
레온이 아픈 얼굴로 그녀를 제 품에 숨기듯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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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하고 둘이서 어디 작은 섬 같은 데 숨어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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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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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우리 그럴까요?”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희선은 유혹을 뿌리치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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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가 음지에서 사는 이끼라면 그는 태양을 향해 활짝 피는 해바라기였다. 그냥 애초에 함께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끼는 햇빛 아래서 말라죽을 것이고, 해바라기는 음지에선 영영 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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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기에는 이런 내가 답답하고 한심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게 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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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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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당신과 나는, 사는 세상이 다른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안타까운 듯이 희선의 머리칼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레온이, 이윽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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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죠, 그럼. 평생 이렇게 당신 뒤나 쫓아다니면서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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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은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잖아요? 나보다 예쁜 여자도, 젊은 여자도…….”
레온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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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예쁜 여자, 젊은 여자. 사업하느라 온 세상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만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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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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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데이트 신청받은 적 있어요. 너무 어려 보여서 나이를 물어봤더니, 글쎄 우리 태하보다 어린 아가씨더라고요.”
제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희선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렇겠지. 이 사람이라면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었겠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사람을 사랑했을까. 그녀가 모르는 그의 세월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수많은 눈웃음과, 고백과, 키스와…….
날카로운 질투가 소리 없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몰래 입술을 깨물었을 때, 그가 갑자기 희선을 안고 몸을 빙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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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깜짝할 사이에 희선은 그의 몸 위로 올라가 있었다.
어느덧 웃음기가 싹 가신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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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로즈 말고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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