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그의 생일
(100/181)
100. 그의 생일
(100/181)
#100. 그의 생일
2022.09.13.
어느덧 웃음기가 싹 가신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내 로즈 말고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마치 희선이 제 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더욱더 힘주어 끌어안고 그는 읊조리듯 말했다.
“나는 왠지 당신이 죽지 않았을 것 같았어요. 분명히 당신은 죽었는데, 한국까지 쫓아가서 내 눈으로 사망진단서도 확인했는데, 화장돼서 어디 뿌려졌는지까지 알아냈는데…… 그런데도 꼭 살아 있을 것만 같은 거야.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인정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누구를 만날 수도 없었어요.”
거기까지 듣자 희선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래도 당신, 결혼은 했었다면서요.”
“했었죠.”
담백한 인정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과,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녀에게는…… 내가 많이 잘못했어요.”
레온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부모님은 처음부터 내가 그녀와 결혼하길 바라셨어요. 집안끼리 비즈니스로 깊이 엮여 있었거든. 어쨌든 나는 평생 당신 외에는 누구도 사랑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럴 바에야 부모님 소원이라도 풀어드리겠다고 한 결혼이었는데…… 그녀가 내게 진심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다른 여자의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희선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묻지 말걸 그랬다.
“그럼 그분을 사랑하면 됐잖아요.”
“정상적인 결혼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사랑은커녕, 자꾸만 미워지는 거예요. 이 여자만 아니었으면 부모님도 로즈를 받아주시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빨리 미국에 데려왔더라면, 로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이었어요. 많이 후회했지요.”
그냥 단순한 정략결혼이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 듯했다. 희선은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을 느꼈다. 나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그러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희선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그러는 당신은? 다른 사람 좋아한 적, 없어요?”
자기가 물어 놓고 레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취소. 대답하지 말아요.”
“왜요?”
“있었다고 하면 확 찾아가서 멱살 잡을 것 같아서.”
희선은 웃어 버릴 뻔했지만 레온은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뭐, 결국 승리자는 나니까. 당신이 누굴 좋아했더라도, 낳은 건 내 아이잖아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도 당신뿐이었어요. 그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희선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태하가 당신을 많이 닮아서 다행이네요.”
“다들 그렇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로즈 당신을 닮았어요.”
레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새삼 희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태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처럼.”
사랑이라는 말에 희선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왜 당신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 있잖아요.”
차마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희선과 달리, 레온은 곧바로 알아듣고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거?”
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냥 나한테 미안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자신감 있는 사람, 당당한 사람, 빛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바로 그런 사람인 레온이, 이토록 초라한 자신에게 왜 아직도 연연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날 데리러 오지 못해서 미안하고, 혼자 아이를 낳게 해서 미안하고, 오랫동안 숨어 살게 해서 미안하고……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한참 안타까운 눈으로 희선을 바라보던 레온이, 불쑥 물었다.
“우리 만나 볼래요?”
희선은 의아하게 레온을 쳐다보았다.
“우리 사이에 자식이 있다고 해서 당장 결혼하자고, 같이 살자고 조르지 않을게요. 일단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연애해봐요.”
연애.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가 달콤한 마력을 발휘했다.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손을 뻗고 마는 생크림 케이크처럼.
“같이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에도 가고……. 그렇게 만나면서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요. 내 마음이 그냥 미안하기만 한 건지, 정말 사랑인지.”
열이 올라 뜨거운 이마에 입술을 대고,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도, 서로 가까이 가려고 노력은 해볼 수 있잖아요. 서로 좋아하니까,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희선은 가게에서의 레온을 떠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 기자들을 다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도 있는 사람이, 매일 좁은 주방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입은 채 설거지를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지. 그냥 부담스럽다고, 무섭다고 도망치는 것밖에 한 것이 없지 않을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남자는 대답이 없자 초조한 얼굴을 했다.
“내가 당신한테 갈게요. 많이 갈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딱 한 발짝만 나한테 와줘요.”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잠시 후, 희선은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녀에게는 최선을 다해 그를 향해 내디딘 한 발짝이었다.
*
“시현아……!”
등 뒤에서 우진이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봐 달라고 매달리며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후회와 슬픔에 차서 혼자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려서, 시현은 생각했다.
아,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왠지 다시는 우진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집에 들어가자마자 태하는 말없이 시현을 껴안았다. 위로해 주는 건가, 생각했는데 한참 안고 있다가 불쑥 하는 말이 이랬다.
“나는 절대로 당신이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야. 죽어도 다른 여자한테 한눈팔지 않을 거고, 거짓말도 안 해.”
“태하야.”
“그러니까, 나 안 버리지?”
불안감에 찬 목소리에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네가 왜 그래, 차인 건 저 인간인데.”
조금 밀어내고 얼굴을 마주 보려고 했지만 태하는 더욱더 세차게 끌어안았다.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저놈은 다 망가졌어. ……누구라도 망가질 거야, 강시현 같은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면.”
시현은 하마터면 픽 웃어버릴 뻔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다.”
그러나 태하는 너무나도 진지했다.
“저놈은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빈 곳을 채울 수가 없을걸.”
자칫 어디론가 사라져버릴까 두렵다는 듯, 태하는 시현을 꼭 껴안고 다짐하듯 말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나한테 꼭 붙들어둘 거야.”
*
그날 밤, 태하는 시현을 안고 또 안았다.
평소에는 체력 차이를 고려해서 많이 참는 편이었는데, 이날만은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끝없이 정욕을 부추겼다. 그녀가 내 것이라고, 내가 그녀의 것이라고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너 진짜 나 죽이려고 이러지?]
착한 여자는 눈을 흘기면서도 결국은 고분고분 따라주었다.
결국 지쳐서 기절하듯 잠든 여자의 얼굴을, 태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현아……!]
우진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좀처럼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까 쳐 보라면서 도발하는 놈을 끝까지 한 대도 때리지 않은 건, 놈이 이미 충분한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강시현에게서 버림받는 것.
그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끔찍한 기분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이제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다고 해도, 불안감이라는 것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배고프면 밥이랑 반찬이랑 꺼내 먹어. 누나가 내일 저녁에 또 올게.]
처음 봤던 날, 그 예쁘고 착한 누나는 헤어지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때 태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씩 굶어도, 학교를 빠져도, 꾀죄죄하고 냄새나는 노란 눈알의 꼬마 따위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하다못해 키워 준 할머니마저도 그랬다.
단 하루 동안 같이 있어 준 것도 기적인데, 그런 기적이 또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누나는 예상을 뒤엎고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와 주었다. 매일매일이 태하에게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반대로 시현은 얻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제 용돈을 쓰고,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집에서는 늦는다고 야단을 맞고…… 온통 손해 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리 없다. 어린 마음에도 태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매일 와 주는데도, 사실은 매일매일 불안했다.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 오게 되면 어쩌지.
그 오래된 마음속 불안감을, 그녀에게 사랑받게 된 지금까지도 그는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절대로 너 안 버려. 이렇게 예쁜 걸 주웠는데 내가 왜 버리겠어?]
시현은 늘 자기 나름대로 그를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은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데, 그만 우진이 트리거가 되었다.
[시현아, 제발. 나 진짜 너 없으면 못 살아, 응?]
손까지 모아 싹싹 비는 놈에게, 시현은 더없이 차가웠다. 하다못해 동정의 눈빛 한번 주지 않았다.
[죽어, 그럼.]
그걸 보고 든 생각은 통쾌하다든가, 후련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절대로 저 꼴이 되지 말아야지, 하는 것뿐이었다.
강시현에게 버림받는 것.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잠든 여자를 품에 꼭 안고, 태하는 기도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할게.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버리지 마.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방이 환해져 있었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여자에게 팔을 뻗는데, 따뜻한 몸 대신에 싸늘하게 식은 이불만 한 아름 안겨 왔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태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 나 옆집에 있어. 일어나면 밥 먹으러 와.
시현의 베개 위에 단정한 글씨로 쓰인 메모가 놓여 있었다. 태하는 허둥지둥 옷을 입고 비워 둔 제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확 풍겼다.
“어, 태하야. 이제 일어났어?”
앞치마를 두른 시현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
대답 대신 달려들어 꼭 껴안자 시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또 놀라서 찾아다닐까 봐 메모도 남겨놨는데…… 못 봤어?”
한참 껴안고 있자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잠시 후 시현의 어깨너머를 본 태하는 눈을 크게 떴다.
작은 테이블 가득히 음식이 차려져 있고, 케이크까지 놓여 있었다.
미역국을 보고서야 태하는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왜 이런 거 했어, 잠이나 더 자지.”
“응?”
시현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어릴 때 그만큼 해줬으면 됐잖아. 이젠 다 컸는데 나 때문에 손에 물 묻히지 말란 말이야.”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죽도록 기뻤다. 세상 모든 보물을 다 모아다 안겨준다 해도 여기 놓인 미역국 한 그릇만 못할 것이다.
아, 이 여자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미칠 듯한 안도감에 태하는 몸을 떨었다. 너무 행복해서 눈시울마저 왈칵 뜨거워졌다.
“뭐 그렇게까지 감동을 하고 그래, 밥 한 끼 차렸기로서니.”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가 준비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순간.
태하는 진심을 다해 소원을 빌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