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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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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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
2022.09.16.
말로는 왜 이런 거 차렸느냐고 하더니, 정작 태하는 시현이 차린 음식들을 너무나 맛있게 먹어주었다.
“너 생일날 미역국도 못 끓여줬다고 이모가 마음 쓰실 것 같아서 준비한 거야.”
사실 태하의 진짜 생일은 오늘이 아니라고 했다. 진짜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 가지고 호텔로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희선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문득 태하가 숟가락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랑 아버지는 여행 잘하고 계시려나?”
“그러게. 어제 하도 별의별 일이 많아서 깜빡하고 있었네. 우리 전화해볼까?”
시현은 냉큼 휴대폰을 꺼내어 영상 통화를 걸었다. 한참만에야 통화가 연결되고, 희선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이모! 제주도는 어때요?”
- 아주 좋아. 날씨도 좋고, 바다도 좋고.
대답하는 희선의 얼굴이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근데 이모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 열이 좀 있어서 그래. 감기 몸살이래.
태하가 곁에서 끼어들어 물었다.
“아버지는요?”
- 응? 글쎄, 잠깐 밖에 나갔나…….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 구석에 레온이 나타났다.
- 나 여기 있단다, 얘들아.
카메라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는, 보란 듯이 희선의 볼에 쪽 하고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 꺅!
놀란 희선이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그다음부터는 새하얀 천장이 비치고,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 미쳤어요? 애들 보는데 뭐 하는 짓이에요!
- 어때서 그래요, 다 큰 애들인데.
- 좀……!”
입이 막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촉, 촉, 하고 뭔가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현과 태하는 나란히 얼어붙었다.
‘설마……?’
‘맞는 것 같은데.’
말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한참 후에야 레온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 아들.
왠지 입술이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 지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좀 많이 바쁠 예정이니까, 굳이 안부 전화 같은 거 안 해도 된단다.
안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누가 들어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아, 예, 아버지.”
- 서울에 돌아갈 때까지 너희도 호텔에서 호캉스나 즐기고 있으렴. 가서 만나자꾸나.
후다닥 전화를 끊고, 태하가 중얼거렸다.
“……빠져 드리길 잘했네.”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감싸며, 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
레온과 희선이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까지, 태하와 시현은 서울에서 호캉스를 즐겼다.
밤새 사이좋게 보내느라 늦잠을 자서 놓쳐 버린 조식 대신에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고, 스파를 즐기고, 수영장에서도 놀았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태하는 수영도 잘했다. 호텔에서 지내기 시작한 후로는 아침마다 수영장에 들른다는 말을 듣고 시현은 감탄했다. 역시 저 몸이 그냥 유지되는 게 아니로구나.
수영장에서 나오며, 태하는 살짝 젖어 있는 시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룸서비스?”
얘가 툭하면 방에만 틀어박히려고 해. 시현은 살짝 눈을 흘겨 주었다.
“나 짜장면 먹고 싶어.”
태하의 팔짱을 끼고 호텔 내의 중식당으로 향하던 시현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방금 스쳐 간 직원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어서였다.
‘아현이?’
그러나 시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현이가 왜 여기서 일을 하겠어.
작은어머니는 아현이 대학을 졸업한 후 곱게 신부수업 받다가 시집이나 가라며 취업을 시키지 않았다. 물론 본인도 노는 것을 좋아해서, 일할 생각도 없었다.
“왜 그래?”
태하의 물음에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8월의 마지막 주. 호캉스 시즌도 거의 끝물이라 식당은 비교적 한적했다. 분명히 시킨 것은 짜장면에 탕수육뿐이었는데, 북경오리에 누룽지탕에 전복요리까지 호화 코스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게 다 뭐예요?”
“회장님께서 혹시 두 분이 오시면 잘 모시라고 이르셨습니다.”
주방장이 직접 나와서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호텔 내의 모든 식당에 미리 연락을 해둔 모양이었다.
레온 아저씨가 거기까지 마음을 써주셨구나.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한숨이 나왔다.
“아, 자꾸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왜?”
“쥐뿔도 가진 거 없는 주제에 눈만 높아지잖아.”
특급호텔에서 특급 대우를 받다 보니 깜빡깜빡 잊게 된다. 자신은 열 평짜리 원룸에 사는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라는걸.
그나마 모았던 돈도 태하에게 다 주어버렸으니 지금은 정말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가져간 돈에 대해 여태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태하도 경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눈치라 은근히 결혼 준비가 걱정이었다.
갑자기 심각해진 시현의 표정을, 태하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뭔데 그래?”
태하가 물었을 때, 갑자기 저만치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쳐다보니 대각선에 있는 테이블에서 잘 차려입은 5, 60대 여성들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계모임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식사를 계속하려는데 대화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오늘 예비 사돈 얼굴은 결국 못 뵙는 거야? 아쉬워라.”
“미리 말도 안 하고 왔는데 뭐. 어디 그분이 좀 바쁘신 양반인가?”
거드름을 피우는 목소리에 시현의 젓가락이 멈췄다. 이 목소리는…….
시현은 다시 아까의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여성의 화려한 올림머리와 긴 목이 눈에 익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작은어머니, 신화란이었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갑자기 시현의 표정이 변한 것을, 태하는 금세 눈치챘다.
“응? 아니야.”
시현은 애써 웃어 보였다. 작은어머니를 태하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연 끊은 사이에 별로 말 섞고 싶지도 않고.
“이거 진짜 맛있다. 너도 먹어봐.”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계속하는데, 대화가 계속 귀에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이미 신경이 죄다 그쪽에 쏠려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바깥사돈 되실 분이 엄청 미남이던데, 신 여사는 만나 본 적 있어?”
신 여사라 불린 화란이 뻐기며 대꾸했다.
“글쎄 바쁘신 분이라니까. 상견례나 해야 그때 보겠지 뭐.”
“상견례는 언제 하는데?”
“뭐, 조만간 날짜 잡지 않겠어? 우리 쪽에서야 뭐 급할 거 없는데, 그쪽이 어찌나 서두르는지 원.”
사돈 운운하는 걸 보면 아현이 시집을 가는 모양이었다. 작은어머니가 저렇게 한껏 콧대가 높아져 있는 걸 보면 꽤나 자랑할 만한 집안인가 보다.
잠시 결혼식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시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사촌 자매라곤 하지만 좋은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기 싫은 결혼식에 억지로 참석하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
어느덧 말을 잃어버린 시현을, 태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입맛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하필이면 왜 여기서 마주치게 됐는지 원망스러웠다.
이유는 금세 알게 되었다.
“신 여사는 좋겠네, 이렇게 큰 호텔 오너랑 사돈도 맺고.”
“그뿐이야? 요 옆에 있는 백화점도 인수했다잖아!”
잠깐만. 시현이 제 귀를 의심하는 순간, 화란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국에서도 유명한 부자래, 우리 사돈댁이.”
시현은 기가 막혔다.
‘그럼 지금 사돈이니 어쩌니 하고 있는 게, 내 얘기란 말이야?’
작은어머니가 원래 허세에 찌든 인간이라는 거야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연을 끊은 조카를 내세워서 잘난 척을 할 정도일 줄이야.
하필 여기서 마주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 사돈네 호텔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임 장소를 그랜드호텔로 정한 거겠지.
시현이 치를 떨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나저나 안사돈 자리는 어떤 여자래?”
“글쎄, 아직 나도 못 만나 봐서 잘 모르겠네.”
“아유, 보나마나 대단한 사모님이겠지 뭐. 세상에 그 잘난 회장님이 기자회견에다 대고 사랑고백을 하는데 오죽이나 미인이겠어?”
“우리 신 여사, 안사돈한테 밀리지 않으려면 결혼식 때 힘 좀 줘야겠네!”
이쯤 되자 태하도 대충 사정을 알아챈 모양인지, 보기 좋은 눈썹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어이없는 상황에서 시현은 잠시 고민했다. 가서 다 거짓말이라고 확 폭로해버릴까.
하지만 사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보다, 작은어머니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컸다.
그래, 못 들은 거다. 어차피 작은아버지 댁과 상견례 할 일도, 내 결혼식에 부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때쯤 되면 저 사람들도 저게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현은 포크를 놓았다.
“그만 올라갈까?”
태하가 순순히 따라 일어났다. 문제의 테이블을 피해서 일부러 멀리 빙 돌아가는 동안에도 듣기 싫은 소리는 끈질기게 쫓아왔다.
“근데 신 여사는 무슨 복이야?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랑 사돈을 다 맺고.”
“무슨 복이라니, 다 신 여사가 스스로 지은 복이지. 부모 잃은 시조카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럼, 그럼. 신 여사가 잘 키웠으니까 그런 집안에도 시집을 가는 거 아니겠어?”
시현은 걸음을 멈췄다.
자식처럼 키웠다니, 누구를?
마음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시현은 그대로 화란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직행했다.
“안녕하세요, 작은어머니.”
갑자기 나타난 시현을 보고, 화란은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 어머, 시현아!”
다른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현이라고? 이 아가씨가?”
“아유, 정말 미인이네!”
“그럼 이쪽이 조카사위님?”
“어머나, 신문에서 볼 때보다 훨씬 잘생기셨네!”
시현은 물론, 곁에 서 있는 태하에게도 관심이 쏟아졌다.
잠시 당황한 듯했던 화란은 금세 일어나서 반가운 얼굴로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세상에, 우리 시현이를 여기서 보는구나!”
우리 시현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말에 시현이 제 귀를 의심하는 사이, 화란은 짐짓 서운하다는 듯 눈을 곱게 흘겼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 집에도 좀 들르고 그러지 그랬니? 얼굴 잊어버리겠어, 얘. 작은아버지도 너 보고 싶다고, 틈만 나면 언제 오느냐고 성화신데.”
그러면서 화란은 아주 짧은 순간, 시현의 팔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눈썹을 까딱해 보였다. 마치 뭔가 신호를 주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시현은 바로 알아들었다.
‘너, 눈치 있게 행동해.’
기가 막혔다. 연을 끊고도 이 사람은 여태 나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자기 말 한마디면 손이 부르틀 때까지 설거지를 하던, 그 어린아이로.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줄 차례였다.
“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제 팔을 붙잡은 작은어머니의 손을 떼어놓았다.
“앞으로 서로 연 끊고 사는 게 좋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