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플랜 A
(102/181)
102. 플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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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플랜 A
2022.09.20.
“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제 팔을 붙잡은 작은어머니의 손을 떼어놓았다.
“앞으로 서로 연 끊고 사는 게 좋겠다고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주위가 확 조용해졌다. 화란은 목덜미부터 서서히 빨갛게 달아올랐다. 작은어머니가 제 앞에서 쩔쩔매다니, 정말이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상견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런 거 할 일 없으실 테니까.”
“…….”
“물론 제 결혼식에 오실 일도 없으실 거고요.”
대놓고 망신을 당한 화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작은아버지께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이쯤 했으면 할 말은 모두 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에는 화란의 친구들이 앞을 가로막고 성난 얼굴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 봐요. 이건 좀 경우가 아니지 않나?”
“옆에서 보기에도 좀 그러네, 배울 만큼 배운 아가씨가.”
“무슨 서운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태 자식처럼 키워 준 은혜가 있는데 결혼식에도 오지 말라니?”
키워 준 은혜. 시현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여태 지켜만 보고 있던 태하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꼭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는 작은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태하입니다.”
태하가 어릴 때부터 돌보면서도, 시현은 집에다 일절 태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작은어머니는 태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반대로 태하에게는 작은어머니 얘기를 많이 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태하가 나서자 화란은 구세주를 만난 듯한 얼굴을 했다.
“오, 그래, 반가워요. 시현이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자네가 좀…….”
“시현 씨한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씩씩거리던 아줌마들도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신부수업 시킨다는 핑계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엌일을 많이 시키셨다고요.”
화란이 당황해했다.
“아니 무슨, 가끔씩 설거지 한번 시킨 걸 가지고…….”
그러나 태하는 딱 잘라 말했다.
“저희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 안 하시던데요.”
이 말을 이해한 사람은 오로지 시현뿐이었다. 나머지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화란마저도.
물론 태하는 굳이 사정을 설명하는 친절 따위는 베풀지 않았다.
“시현 씨 손을 볼 때마다 제가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결혼하면 절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결심한 참입니다.”
자연스레 시현의 손으로 향한 시선들이 금세 경악으로 물들었다.
“……!”
개중에 눈치가 떨어지는 사람은 놀라서 ‘어머, 아가씨 손이 왜 저렇게 엉망이야?’ 하고 말하다 다른 사람에게 옆구리를 쿡 찔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왕 오셨으니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십시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태하는 시현의 손을 꼭 잡은 채 돌아섰다.
*
그날 밤은 태하와 둘이서 라운지 바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 야경도 좋고 술도 좋고 곁에 있는 사람도 좋은데,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시현의 기분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태하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여태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하네.”
쓰디쓴 위스키를 마시고, 태하는 새삼 안타까운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버텼어, 저런 사람 밑에서.”
“말했잖아. 너라도 있었으니까 버텼다고.”
시현도 따라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희선 이모가 있을 땐 이모도 많이 감싸주셨어.”
“어머니, 저 댁에서 일하실 때 고생 많이 하셨지?”
안 봐도 뻔히 알겠다는 듯한 말투에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작은어머니 성격에 오죽했겠어. 이모가 나 감싸주느라 더 미움 받으셨지.”
더 어린 아현이 있는데도 희선은 시현만 감싸고돌았다. 물론 구박받는 시현을 불쌍히 여겨서 그랬던 거지만, 작은어머니는 제 딸보다 시현을 더 챙기는 가정부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진작 작은아버지 댁이랑 연을 끊길 다행이야. 하마터면 희선 이모가 작은어머니랑 만나야 할 뻔했잖아?”
희선의 입장을 고려해서 상견례까지는 안 한다 해도, 어쨌든 결혼식에서라도 마주쳤을 것이다.
희선과 작은어머니가 나란히 한복을 입고 화촉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상상하니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안사돈 될 여자가 자기 집 가정부였던 바로 그 여자라는 걸 알면, 작은어머니가 얼마나 거만하게 굴며 희선을 기죽였을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태하가 불쑥 물었다.
“어머니가 그때 하루아침에 쫓겨나셨다고 했지? 이유가 뭐였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현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작은어머니가 펄펄 뛰며 소리치던 것뿐.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여자를 여태 내 집에 뒀다니. 우리 아현이 알기 전에 썩 내 집에서 나가!]
당시에 시현이 어렴풋이 느꼈던 것은, 왠지 애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인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들인 태하가 알아서도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시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오늘 작은어머니 만난 거, 이모한테는 얘기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태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화란은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아유, 내가 분해서 못 살아!”
핸드백을 소파에 내동댕이치는 제 엄마를 보고, 소파에 드러누워 팝콘을 먹고 있던 아현이 놀라 물었다.
“왜 그래?”
화란은 가슴을 쳐 가며 방금 그랜드호텔에서 당한 일을 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아휴, 아직 내 딸도 짝을 못 찾아줬는데 엉뚱한 계집애가 그런 남자를 잡고!”
정작 망신을 당한 일보다도 더 화란을 화나게 만든 것은, 시현 옆에 서 있는 태하의 존재였다.
기사에서 사진으로 볼 때도 잘생겼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야말로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미남이었다.
듬직하기는 또 얼마나 듬직한지, 결혼하면 제 마누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고는 망신을 당하는 와중에도 탐이 났다.
저게 내 사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렇게 잘난 남자가 하필 얄미운 조카의 결혼 상대라는 게 속이 뒤집어졌다. 이제는 아현을 누구에게 시집보내도 시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난 몰라, 진짜!”
말하다 보니 더 분통이 터져서, 화란은 나잇값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투정까지 부렸다.
“시현이 그 계집애한텐, 저번에 파혼했던 그 남자가 딱 어울렸는데!”
반대로 아현은 어디까지나 느긋했다.
“걱정 마, 엄마. 다 잘될 거야.”
팝콘을 입안에 던져 넣는 딸을, 화란이 흘겨보았다.
“넌 무슨 태평한 소릴 하고 있어? 물어다 주는 선 자리도 안 나가는 주제에.”
“좀만 참고 기다려봐. 엄마 당한 거, 내가 이자 쳐서 다 갚아줄 테니까.”
자신 있는 말투에 화란은 금세 귀가 솔깃했다.
“너,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글쎄 믿으라니까. 내가 언제 빈말 하는 거 봤어?”
그건 그랬다. 아현이 저것이 어릴 때부터 공부는 못해도, 빈말 하는 애는 아니었다.
딸의 호언장담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화란이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안사돈이란 여자는 뭘 안다고 말을 보태고 난리지?”
“응?”
화란은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저희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 안 하시던데요.’
“자기가 꼭 뭘 아는 것처럼 지껄였다는 거잖아, 언제 봤다고. 웃기는 여자 아니니?”
“그래? 좀 알아봐야겠네.”
재미있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고, 아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넌 또 어디 가니?”
“출근. 말했잖아, 오늘 야간 근무라고.”
화란이 당장 도끼눈을 했다.
“글쎄 쓸데없는 데다 시간 낭비하지 말라니까! 누가 너더러 돈 벌어 오라든?”
제 엄마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아현은 집을 나섰다.
*
출근하기 전, 아현은 잠시 호텔 옆 백화점에 있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숨넘어가게 말했다.
“너 얘기 들었어? 한영그룹 3세랑 조한신문 딸 결혼식 말이야!”
“무슨 얘기?”
“하여튼 얘는, 재계 소식에 이렇게 어둡다니까.”
친구는 신이 나서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 결혼식에 우리 부모님도 다녀오셨는데, 세상에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대.”
“그래?”
“한영그룹이랑 조한신문이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에 기사까지는 안 나갔나 보던데, 그래도 이미 소문은 쫙 퍼졌지 뭐. 그 신부, 파혼당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더라.”
“그렇구나.”
듣자니 꽤나 대단한 얘기긴 했지만 생판 남의 얘기에 딱히 관심은 없었다. 건성으로 대꾸하는 아현에게, 친구가 몸을 확 기울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특급 비밀인데, 그 영상에 나온 여자가 케네디 회장 예비 며느리란 얘기가 있어!”
“뭐?”
아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의 얘기가 아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조한신문 딸한테 약혼자 빼앗긴 여자가 바로 케네디 회장 예비 며느리라고. 영상엔 목소리만 나오긴 했는데,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봤대.”
그럼 강시현이라는 거잖아. 아현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왜 상견례까지 해놓고 하루아침에 파혼했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현의 표정이 변한 것도 모르고, 친구는 신나게 수다를 이어갔다.
“뭐, 그 여자야 피해자니까 알려져도 별 타격은 없지. 게다가 그 덕분에 케네디 회장 아들이랑 결혼하게 됐으니까 결국은 잘된 일이고. 정작 남의 남자 뺏은 년은 결혼 망하고 소문 쫙 퍼져서 얼굴도 못 들고 살게 됐으니, 이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나 봐.”
아현은 상견례 때 보았던 시현의 약혼자를 떠올렸다. 외모부터 스펙까지 어디 하나 봐줄 곳이라고는 없는, 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그야말로 강시현 주제에 딱 어울리는.
‘그냥 그 남자랑 결혼하게 놔두지, 왜 건드려서 파혼까지 하게 만들어?’
이름 모를 조한신문 딸을 향해, 아현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멍청한 X. 그냥 놔뒀으면 지금 내가 이 고생까지 안 해도 됐을 텐데.’
친구는 실컷 수다를 풀어내고 나서야 뒤늦게 아현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나저나 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취업을 다 했어? 너희 엄마가 빨리 선봐서 시집이나 가라고 성화 안 하셔?”
“왜 안 하겠어. 하도 들들 볶아대는 바람에 지쳐서 나도 슬슬 가야지, 싶어.”
“뭐야. 너 남자 있었어?”
친구가 눈을 빛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직 사귀는 사인 아니고. 일단 플랜 A부터 실행해볼까 해.”
“플랜 A?”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를 향해, 아현은 미소를 떠올렸다.
“연애부터 해야 결혼을 할 거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