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동생이 갖고 싶은 스물여섯 살 (103/181)


#103. 동생이 갖고 싶은 스물여섯 살
2022.09.23.


8월과 함께 늦은 여름휴가도 끝났다.

레온과 희선이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날 저녁, 네 사람은 호텔에서 모였다.

alt="">

“자, 소개할게. 내 여자친구란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레온과는 달리 희선은 부끄러워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alt="">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alt="">

“어머, 아저씨. 여자친구 분이 정말 미인이신데요?”

alt="">

“놀리지 마.”

울상을 하고 시현의 등 뒤로 숨어 버리는 희선을, 레온이 얼른 도로 팔을 붙들어다가 단단히 팔짱을 꼈다.

alt="">

“얘들아, 저녁은 한식당에서 먹는 게 어떻겠니?”

제주도에서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가 희선이 내내 불편해했던 일을 떠올린 레온이 제안했지만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alt="">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가고 싶어요.”

제주도에서 레온은 말했다.

alt="">

[당신도 한 발짝만 나한테 와줘요.]

레온과 자신이 다른 세상의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최소한, 그의 세상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이라도 하고 싶었다.

alt="">

“당신 불편하지 않겠어요?”

alt="">

“자주 다니면 익숙해지겠죠.”

그런 희선을, 레온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보고 있던 시현은 가슴이 다 뭉클했다. 저렇게 서로 사랑하시는 분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을까.

그렇게 네 사람은 호텔 내의 레스토랑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몸살을 앓은 지 얼마 안 된 희선을 걱정해서, 레온은 뭐든 최대한 부드럽게 조리해달라고 주문했다. 음식이 나온 후에도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희선을 챙겼다. 하다못해 스테이크도 손수 썰어주었다.

alt="">

“나 이제 괜찮다니까요?”

희선이 민망해했지만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곁에 사람만 없으면 아예 떠먹여줄 기세였다.

alt="">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alt="">

“응. 그런데 내가 몸살이 나는 바람에 첫날 빼고 다음 날부터는 누워만 있었어.”

못내 아쉬워하는 희선을, 레온이 달랬다.

alt="">

“여행이야 언제든 또 가면 되지요. 다음에는 시현이하고 태하도 꼭 같이 가자꾸나.”

alt="">

“당연하죠. 전용기 꼭 타고 말 거예요!”

주먹을 불끈 쥐는 시현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레온은 그제야 생각난 듯이 물었다.

alt="">

“그래, 결혼식은 잘 갔다 왔니?”

alt="">

“네, 아저씨가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그런데…….”

시현이 그날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레온은 드물게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alt="">

“자업자득이구나.”

alt="">

“그럼요. 그 아가씨가 우리 시현이한테 저지른 짓이 있는데.”

정 많고 마음 약한 희선까지도 맞장구를 쳤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보라의 얘기가 나오는 게 싫어서, 시현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alt="">

“그런데 두 분,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레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alt="">

“그러니까 그게, 내가 스무 살 때였는데…….”

시현과 태하는 오래된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연애사를 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주인공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alt="">

“그날부터 자꾸만 카레니 뭐니 갖다주지 않겠니? 좋으면 좋다고 그냥 말로 하면 될걸.”

alt="">

“무슨 소리예요? 좋아하는 거 그려주겠다면서 당신이 매일 오라고 꼬셨잖아요!”

alt="">

“그거야 로즈가 나 좋다고 매일 찾아오니까 그런 거지요.”

alt="">

“굶어 죽을까 봐 챙겨 줬더니 이제 와서 뭐가 어쨌다고요?”

주장하는 바는 서로 저쪽이 먼저 반했다는 거였다. 진지하게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시현과 태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레온을 흘겨보던 희선이 갑자기 작은 탄성을 발했다.

alt="">

“어머나!”

보니까 두세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기가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alt="">

“세상에, 예뻐라!”

모두가 한참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뚝뚝한 태하마저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천진한 얼굴로 팔을 뻗는 아기를, 레온이 번쩍 안아 올렸다.

alt="">

“우리 귀염둥이, 이름이 뭐니?”

아직 말문이 트이기 전인지, 아기는 대답 대신 눈을 반짝이며 레온의 얼굴을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다. 외국인인 레온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alt="">

“자, 엄마 찾으러 갈까?”

레온이 아기를 안고 일어나자마자 저만치서 부모가 달려왔다.

그 유명한 케네디 회장에게 안겨 있는 아기를 보고, 부모들은 놀라는 한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alt="">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만…….”

alt="">

“괜찮습니다. 아기가 아주 귀여운데요.”

사과하는 부모에게 아기를 안겨주고, 레온은 직원을 불러서 작은 선물을 전달하라고 일렀다.

부모의 품에 안겨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기에게서, 희선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그러나, 했는데 잠시 후 희선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alt="">

“우리 태하도 어릴 때 저렇게 예뻤겠지?”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아, 태하 어린 시절을 놓쳐버린 게 아쉬우시구나.

시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났던 태하는 무척 예쁜 아이였다. 그러니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말도 못 하게 귀여웠겠지.

어떤 기분일까.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희선의 깊은 슬픔이 느껴져서 시현도 그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레온도 착잡한 얼굴로 희선의 어깨를 토닥였다.

묵묵히 나이프를 놀리던 태하가 불쑥 폭탄을 던진 것은 그때였다.

alt="">

“그럼 이제라도 하나 더 낳으시면 되지요.”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러나 태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레온과 희선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alt="">

“두 분 다 아직 젊으시잖아요. 저도 동생 갖고 싶은데요.”

 

alt="">

 
잠시 침묵이 흘렀다.

alt="">

“저기, 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새빨개진 희선이 일어나서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시현은 태하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alt="">

“미쳤나 봐, 진짜!”

부모님께 동생 갖고 싶다는 말을 스물여섯 살에 하는 인간은 세상 천지에 윤태하 뿐일 것이다. 자신도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희선이야 오죽할까.

alt="">

“우리 효자.”

타박하는 시현과 달리, 레온은 흐뭇한 눈으로 아들을 향해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alt="">

“아버지가 한번 힘내볼게.”

 

*

시현이 얼른 뒤를 따라가자 희선은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 있었다.

alt="">

“미안해. 주책이지?”

희선이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해서, 시현은 달래느라 애를 썼다.

alt="">

“주책은요. 두 분 얼마나 보기 좋으신지 몰라요.”

alt="">

“나이 먹고 보기 흉하지 않아?”

alt="">

“흉하다뇨! 사귀신다는 말씀 듣고 저랑 태하랑 얼마나 신났다고요?”

한참 달랜 끝에야 희선은 겨우 진정하는 듯했다.

alt="">

“저, 근데 이모.”

단둘이 있을 때 묻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alt="">

“옛날에 말이에요. 저희 작은어머니 댁에서 갑자기 나가게 되셨잖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alt="">

“어, 그게…….”

희선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alt="">

“내가 일하다가 실수로, 사모님이 아끼시는 접시를 깨뜨려서. 그래서 그랬어.”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시현은 눈치를 챘다.

……희선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진짜 이유가 뭔지는 몰랐지만 시현은 희선을 믿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는 희선의 편이었다. 그래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alt="">

“그런데 그건 왜 묻니?”

alt="">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희선을 더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호텔에서 작은어머니를 마주쳤던 이야기는 묻어둔 채로, 시현은 달래듯 희선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alt="">

“어쨌든 저는 그 댁이랑은 이미 연 끊었어요. 어차피 이모도 평생 마주칠 일 없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희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응, 하고 대답했다.

*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한 자리라 너무 들떠서 그랬을까. 식사하면서 와인 몇 잔 마신 것뿐인데, 레온은 어느 순간 엉망으로 취해버렸다.

alt="">

“아버지, 저한테 기대세요.”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취한 가운데서도 레온은 신기할 정도로 사람을 정확히 구분했다. 부축하려고 팔을 내미는 아들은 본 체도 안 하고 희선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alt="">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비서들이 어떻게든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레온은 찰거머리처럼 희선을 꼭 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alt="">

“또 날 버리고 가려는 거예요?”

alt="">

“버리긴 누가 버린다고 그래요?”

사람들 앞에서 안긴 희선이 새빨개져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alt="">

“이제 아무 데도 못 가요. 죽어도 안 놔줄 거야.”

결국 희선이 지고 말았다. 그녀는 레온에게 안긴 채로 한숨을 내쉬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alt="">

“안 되겠다. 늦었으니까 태하는 시현이 먼저 집에 데려다주렴.”

alt="">

“그럼 어머니는요?”

alt="">

“난 아버지 방에 모셔다 놓고, 잠드시는 거 보고 일어날게. 택시 타고 가면 되지 뭐.”

비서가 거들었다.

alt="">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 댁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결국 태하와 시현은 두 사람을 뒤로 하고 호텔을 나왔다.

태하가 은근슬쩍 따라 들어오려고 할까 봐, 시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 앞에서 딱 철벽을 쳤다.

alt="">

“데려다줘서 고맙고, 넌 이제 호텔로 돌아가.”

부모님과 식사한 직후인데 보란 듯이 외박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이야말로 집에 곱게 돌려보내 줘야지, 하고 생각한 건데 태하는 픽 웃었다.

alt="">

“내가 지금 돌아가면 아버지가 불효자라고 야단치실걸?”

alt="">

“응?”

alt="">

“아버지가 얼마나 술이 센 줄 알아? 내가 같이 지내면서 자주 같이 마셨는데, 위스키 한 병 정도로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분이라고.”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아저씨 겨우 와인 몇 잔 마신 게 전부인 거 같은데.

alt="">

“그럼 오늘은 왜 저렇게 취하신 거지?”

alt="">

“글쎄 취한 게 아니라니까.”

alt="">

“아……!”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내가 또 눈치를 못 챙겼구나!

금세 얼굴이 빨개지는 시현을 향해, 어느덧 눈빛이 변한 태하가 성큼 다가섰다.

alt="">

“넌 또 왜 그래?”

alt="">

“잘 데가 없어졌잖아.”

놀라서 몸을 움츠리는 시현의 귓가에, 야릇한 속삭임이 날아들었다.

alt="">

“……그러니까 재워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

희선은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레온을 객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alt="">

“……어휴.”

어찌나 무거운지, 침대에 눕히고 나자 한숨이 다 나왔다.

깊이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레온을 바라보고 있자 웃음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남자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했다.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잠든 모습이 답답해 보여서, 희선은 조금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먼저 꽉 조인 넥타이를 풀어내고, 이어서 와이셔츠 단추도 풀어 주었다. 두 개째의 단추를 풀다 잘 안 돼서 잠시 고전하고 있는데, 문득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alt="">

“……!”

희선은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기겁을 하고 몸을 확 뒤로 빼는데, 레온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alt="">

“왜 그만둬요?”

레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alt="">

“……이왕 벗기는 김에 다 벗겨주지.”

취한 기색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목소리였다.

al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