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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벗어달라고 해 (105/181)


#105. 벗어달라고 해
2022.09.30.



 
영원할 것 같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어느덧 달력은 9월에 들어섰다. 한낮의 태양은 아직도 한여름 뺨치게 뜨거웠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벌써 겉옷을 걸쳐 입어야 할 만큼 선선해졌다.

비가 와서 급격히 싸늘해진 9월 초의 어느 날, 원앱팀은 아침부터 회의 중이었다.


“최종 버전 설치해보니 용량이 너무 큰 거 같은데요. 혹시 리소스들이 중복되어 패키징 된 게 있는 거 아닌지, 한 번만 다시 확인 부탁합니다.”

“예, 본부장님.”

“그리고 이미주 대리님.”

태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상단 BI 요소들이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폰에서 각각 색상이 다르게 보이는데요. 뭔가 돌아가 보이는데, RGB랑 CMYK가 섞인 거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RGB값 확인 좀 부탁합니다.”

“네, 본부장님.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태하를, 시현은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남자지만 정말 멋있는 것 같다.


“강시현 과장님은 마케팅팀하고 계속해서 협조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은 프로모션 이벤트를 앱 내에 어떻게 적용할지, 시안 만들어서 내일까지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시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본부장님.”

모두에게 업무 지시를 마치고, 태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드디어 한 달 남았습니다. 배포 일정에 차질 없도록, 또한 배포 후에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서비스 안정화시킬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긴장 놓지 맙시다.”

미주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어차피 내년 봄까지는 계실 거잖아요.”

태하는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빨리 서비스가 자리 잡아야 저도 결혼을 할 것 아닙니까?”

딱딱했던 회의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사람들이 웃고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는 가운데, 태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쪼록 적극적인 협조 부탁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자, 미주는 새삼 뿌듯한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우리 시현 씨, 드디어 진짜 시집가는구나!”

마치 딸 시집보내는 친정엄마 같은 표정이었다.


“본부장님 엄청 급하신 모양인데, 슬슬 결혼 준비해야겠다.”

시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해야겠는데,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서 그게 좀 문제네.”

“돈이 왜 없어? 신혼집에 들어갔던 전세금 돌려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시현은 말끝을 흐렸다. 그 돈 1억 5천은, 우진에게 돌려받자마자 태하가 가져간 채 여태 감감무소식이었다.


[지금 당장 쓸 데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 줘.]

돌려받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 돈이 시현에게는 전 재산이었다. 즉 지금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그 돈은 어디 좀 묶어놔서 당장 쓸 수가 없거든. 예단 준비도 해야 할 텐데 걱정이야.”

“무슨 예단 걱정이야? 시아버님 되실 분은 시현 씨가 맨몸으로 시집가도 업고 다닐 기세던데.”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미주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혹시 이번에도 시어머님 되실 분이 좀 골치 아파?”

시현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어머님은 아버님보다도 더 좋은 분이야.”

“하긴 그렇겠지.”

미주가 부럽다는 듯이 한숨을 지었다.


“회장님이 카메라에 대고 사랑고백 하시는 거 보고 내가 다 설렜네. 에이,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강시현 시어머니 자리 한번 노려보는 건데.”

“우리 아버님 취향 존중 좀 해줄래?”

둘이서 배꼽을 잡고 한바탕 웃고 나서, 시현은 눈가에 배어 나온 눈물을 닦았다.


“하여튼 내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

전에 우진과 결혼 준비를 할 때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그때는 예비 시댁에서 뭘 해 오라고 하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해 오라고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

특히 레온보다도 희선에게 그랬다. 여태 고생해온 분이니 정말 잘해드리고 싶다. 내 손으로 예쁜 옷도, 가방도, 반지도 해드리고 싶었다.


“참, 신혼집은 어떻게 할 거야? 본부장님이 마련하시겠지?”

“글쎄…….”

시현은 말끝을 흐렸다. 태하는 무슨 사정인지 원래 있던 집도 팔았다고 했었다. 지금은 레온과 함께 호텔에서 지내고 있지만, 결혼하면 같이 살 집이 있어야 하긴 할 텐데.


“여차하면 그냥 지금 사는 원룸에서 계속 살면 되지 뭐.”

태하와 함께라면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아도 행복할 것 같다. 시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퇴근 시간. 태하는 제 사무실에서 나와서 시현이 있는 원앱팀 사무실로 향했다. 함께 퇴근하고 싶어서였다.

어디 갔는지 한참 찾아도 없더니, 빈 회의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태하는 회의실 앞에 서서 그녀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회의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말하는 내용이 그대로 들려왔다.


“알았어, 이번에는 진짜 청첩장 제대로 줄게. 비싼 거 쏠 테니까 딱 기다려.”

통화 상대는 아마 전에 청첩장 모임으로 만났던 친구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통화를 엿듣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뒤돌아서려는 순간.


“프러포즈? 내가 했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태하는 걸음을 멈췄다.

아직 태하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다. 제가 먼저 받긴 했지만 그걸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그도 해야 했다.

혹시 원하는 프러포즈가 있을까, 싶어 태하는 귀를 기울였다.


“어차피 할 결혼, 프러포즈야 누가 하면 어때?”

시현이 전화에 대고 웃었다.


“아 무슨 캐럿 다이아야. 그런 거 받아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끼고 다니지도 못하겠다.”

아마 시현이 프러포즈 선물로 뭘 받았는지, 친구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민망함에 태하의 귓가가 조용히 달아올랐다.


“그래, 청첩장 나오면 꼭 연락할게. ……응, 들어가. 담에 또 통화하자.”

전화를 끊고 회의실을 나오던 시현이, 태하를 보고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

“방금, 같이 저녁 먹을까 해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날이 쌀쌀하니까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다. 삼계탕 어때?”

“좋지.”

“나 얼른 가방 챙겨가지고 나올게, 잠깐만 기다려.”

나란히 회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삼계탕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시현은 아까 했던 통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응? 없는데.”

태하는 프러포즈 받는다고 들떠서 나가던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핸드크림 따위나 받아 들고 시무룩하게 돌아왔던 것도.

왜 놈에게는 바라고, 내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태 그녀는 자신에게 뭔가 바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주고, 주고, 또 주기만 했다.

옛날부터 그랬다. 늘 낡은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 게 안타까워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새 신발을 선물해도 기어이 참고서로 바꿔다 주는 여자였다.

차라리 자신을 잘 키워서 어떻게 해보려는 음흉한 의도가 있었다면, 세상은 돌팔매질을 할지언정 그는 안도했을 것이다. 제게 바라는 게 있는 동안은 버리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시현이 가진 것은 언제나 완벽한 선의뿐이었다. 그게 태하는 늘 불안했다.

그가 이유조차 말하지 않고 전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도,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 내주었다. 줘놓고 여태 언제 돌려줄 거냐, 어디에 썼느냐고도 묻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뭐든 다 주고 싶은데, 하나도 달라고 하지 않아서 늘 애가 타고 목이 말랐다.

좀 더 내게 의지해줬으면.

내게 뭐든 달라고 해줬으면.

프러포즈 언제 할 거냐고 물어줬으면.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게 뭉클하고, 안타깝고, 사랑스럽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와, 낮에 비 오더니 나뭇잎 많이 떨어졌다. 그치?”

태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여자는, 그저 즐거운 얼굴로 옆에서 걷고 있었다.

아무리 비 내린 후라고 해도 9월의 초입치고는 놀랄 만큼 공기가 차가웠다. 정말 세상에 여름과 겨울만 남았구나, 싶었다.

채 단풍이 들지도 않은 나뭇잎들이 마구 떨어져 발끝에 채였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어오니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나 시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목을 움츠렸다.


“어휴, 춥다.”

자연스럽게 제 겉옷을 벗어주려다 태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시현의 입에서 옷 벗어달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이제 9월 초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추우면 겨울은 어떡하지?”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리는 시현에게, 태하는 말했다.


“옷을 너무 얇게 입어서 그래.”

“그러게, 좀 두껍게 입고 나올걸.”

맞장구를 치면서도 역시 그녀는 옷을 벗어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는 여자에게 몸이 달아서, 태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잘못하면 감기 걸리겠어.”

그제야 시현은 뭔가 깨달은 듯이 아, 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추우면 내 옷 입을래?”

그러더니 진짜로 제 옷을 벗어주려는 듯 단추까지 풀기 시작했다.

나한테 벗어줘봐야 맞지도 않을 텐데, 이 바보.

태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현을 와락 껴안았다.


 


“뭐 하는 거야, 길거리에서!”

놀란 시현이 파닥거렸지만 태하는 놓아주지 않았다.


“왜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달라고 안 해?”

“응?”

“추우면 옷 벗어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너도 춥잖아?”

시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안고 있어서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을 기회 삼아서, 태하는 속마음을 내보였다.


“반지도 그래. 친구도 기대하는데, 왜 당신은 받을 생각도 안 해?”

“어머. 아까 주은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어?”

시현이 뒤늦게 민망해했다.


‘그놈한테는 프러포즈 받고 싶어 했잖아. 목걸이 받는다고 기대했었잖아.’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가 없어서, 태하는 꿀꺽 삼켜버렸다.


“너 나한테 목걸이 열 개도 더 사줬잖아. 그거면 됐지 또 무슨 프러포즈를 바라겠어.”

시현이 일깨워주듯 말했지만 태하는 납득하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프러포즈는 프러포즈다. 게다가 목걸이는 자신이 사다 준 것이지, 그녀가 사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태하는 호소하듯 말했다.


“나한테도 좀 달라고 해. 옷 벗어달라고 하고, 프러포즈해달라고 해. 왜 그렇게 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거야?”

“지금도 잘해주는데 뭘 더 바라.”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해준 게 없었다. 온통 받은 것뿐이다.

이렇게 어른이 됐는데, 이젠 뭐든 다 해줄 수 있는데, 해주고 싶은데. 아직도 어린 시절의 윤태하와 달라진 게 없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잖아. 넌 뭐가 그렇게 늘 불안하니?”

태하를 마주 안고, 시현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태하는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제 겉옷을 벗어서 시현에게 입히고, 단추까지 잠가 주고 나서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하고 약속해.”

“뭘?”

“내가 주는 거, 그게 뭐라도 받아줘야 해.”

태하는 다짐하듯 말했다.


“달라고 안 하는 것까진 참겠지만, 주는 건 거절하지 말라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 시현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았어.”

 

*

태하는 같이 저녁을 먹은 후 집까지 시현을 태워다 주었다. 으레 따라 올라올 줄 알고 무슨 말로 돌려보내나, 했는데 웬일로 곱게 내려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분간은 좀 많이 바쁠 것 같아.”

“왜? 네 회사 일 때문에?”

“나중에 얘기해줄게. 아마 주말에도 자주 못 만날 거야.”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태하를 보내고 혼자서 들어오며 시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쟤는 왜 맨날 짝사랑하는 것처럼 저래.”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태하가 때때로 저렇게 불안해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빨리 결혼을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우체통에 꽂혀 있는 고지서를 꺼내서 펼쳐 보았다. 재산세 고지서였다.


“천만 원?”

믿을 수 없는 금액에 시현의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 다시 확인해봐도 쓰여 있는 것은 제 이름이 맞았다.

잠시 생각하다 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 나왔나 보네.”

재산이 없는데 재산세가 나올 리 없다. 그러니까 내일 구청에 가봐야겠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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