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회장 사모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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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회장 사모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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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회장 사모님이세요
2022.10.04.
아침에 일어난 태하는 호텔 내의 실내수영장에 갈 준비를 했다.
아침 일찍 수영을 하고, 레온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나서 출근. 호텔에서 지내게 된 후로 정착된 매일 아침의 루틴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려니, 생각하고 조용히 나가려는데 마침 객실로 들어오는 레온과 마주쳤다.
“아버지. 일찍부터 어디 갔다 오세요?”
“응, 짐(gym)에서 좀 뛰고 왔단다.”
젖은 머리의 레온이 빙긋 웃어 보이고, 근육질인 아들의 팔을 흐뭇하게 만져보았다.
“우리 아들, 몸이 참 멋지구나. 나도 트레이닝 받으면서 근력운동을 좀 해야겠어.”
갑자기 왜 저렇게 몸에 신경 쓰시는지 알 것 같아서, 태하는 슬쩍 놀리듯 말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네요.”
“음? 우린 플라토닉한 사이인걸.”
아버지가 시치미를 뚝 떼는 바람에 웃음이 났다.
“그럼 저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레온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너는 황새가 물어다 주었단다.”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아들의 등을, 아버지가 다정하게 두드렸다.
“얼른 수영하고 오렴, 아드님. 아침 먹고 출근해야지.”
비록 나이가 든 후라고 해도, 부모에게 사랑받는 기분이라는 것은 제법 따뜻하다. 태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호캉스 시즌도 지나고, 평일 이른 아침의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영장 주변을 돌면서 흐트러진 선 베드를 정리하고 있는 직원 한 사람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물을 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과 함께 풍덩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꺅!”
돌아보니 방금까지 수영장을 정리하고 있던 직원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태하는 그쪽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갔다. 상대는 전혀 수영을 하지 못하는 듯, 팔을 붙들어 끌어올리자마자 태하에게 온몸으로 매달려 왔다.
“사, 살려 주세요!”
정말 깊은 곳이었으면 자칫 함께 위험해졌을 테지만, 다행히도 키가 큰 태하에게는 바닥을 딛고 설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착 달라붙어 오는 바람에 맨 살갗에 여자의 몸이 밀착되었다. 뭉클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울컥 치밀었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을 강제로 떼놓을 수도 없었다.
그대로 몸에 여자를 매단 채로 얕은 곳으로 나와서 밖으로 밀어 올려 주었다. 그새 물을 마셨는지, 여자는 수영장 바닥에 주저앉아 새빨개진 얼굴로 한참 콜록거렸다.
물에 젖은 새하얀 블라우스가 살갗에 착 달라붙었다. 그 바람에 굴곡 있는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태하는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괜찮습니까?”
어찌나 놀랐는지, 여자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별로 엮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태하는 선 베드에 올려두었던 제 타월을 집어 들어 건넸다.
타월을 받아 든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친 데가 없어 다행입니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기 전에 딱 자르고, 태하는 등을 돌려 수영장을 나갔다.
*
아침에 출근한 시현은 팀장에게 가서 양해를 구했다.
“팀장님, 저 이따 점심시간 후에 잠깐 자리 좀 비워도 될까요?”
“왜, 어디 가?”
“재산세가 잘못 나와서 구청에 좀 다녀오려고요.”
“아이고, 그놈의 재산세!”
재산세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팀장은 죽는 소리를 했다.
“내가 세금 낸다고 아주 허리가 휜다, 허리가 휘어. 글쎄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올해 재산세가 600만 원이 넘게 나왔다니까?”
푸념에 은근히 자랑을 섞어서 말하고, 팀장은 물었다.
“근데 강 과장도 재산세 내?”
“재산이 있어야 재산세를 내죠. 저 여태 원룸 월세 사는데요.”
시현은 어제 집 우체통에 꽂혀 있던 세금 고지서를 보이며 웃었다.
“다른 사람 게 저한테 잘못 나왔나 봐요.”
현재 시현의 앞으로 된 재산이라고는 원룸 보증금 천만 원뿐이었다. 잘못 나온 걸 뻔히 알면서도 잠깐 설렜다. 나도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이만큼 세금 내는 사람이 돼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좀 봐.”
천만 원 가량이 찍힌 세금 고지서를 보고 팀장이 지식을 뽐냈다.
“재산세는 7월, 9월 두 번에 나눠서 내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재산세만도 1년에 2천만 원씩 내는 사람이야. 거기다 종부세까지 합치면 6천만 원도 넘을걸?”
시현은 혀를 내둘렀다. 1년 세금을 내 연봉만큼 내다니!
“와, 그럼 엄청 부자네요?”
그러고 있는데 마침 태하가 들어왔다.
“강시현 과장님. 어제 부탁드린 시안은 다 됐습니까?”
“아직 작업하는 중입니다. 이따 구청 갔다 와서, 오후에 마무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구청? 무슨 일 있습니까?”
“재산세가 잘못 나온 게 있어서 정정하러 가려고요.”
순간 태하가 움찔했다. 시현은 태하에게도 고지서를 내보이며 웃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되게 부잔가 봐요. 잘못 나온 거 뻔히 알면서도 잠깐 설렜지 뭐예요?”
갑자기 태하가 고지서를 확 빼앗아 들었다.
“이따 구청 갈 일 있으니까 제가 대신 처리하죠.”
“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가야…….”
“주민등록번호 아니까, 내가 할 수 있습니다.”
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지서를 든 채로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
퇴근 후 태하는 시현과 저녁도 같이 먹지 못한 채로 호텔로 돌아왔다. 채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아버지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 윤 대표님, 디에이치 인테리어 담당자 도착했습니다.
레온이 인수하면서 그랜드호텔은 좀 더 글로벌 고객들을 지향한 서비스를 확대하기로 했다.
거기 맞춰서 서비스 개편은 물론 대대적인 객실 리뉴얼까지 앞두고 있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그 객실 인테리어를 맡은 회사의 디자이너였다.
물론 태하가 호텔 일에까지 관여할 리는 없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었다. 벌써 진행한 지 꽤 됐지만, 물론 시현은 모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서둘러 방에서 나오는데, 문 앞 복도에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서 있다가 태하를 보고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가볍게 마주 인사하고 지나쳐 가려는데, 직원이 불러 세웠다.
“저어, 잠시만요.”
“무슨 일입니까?”
“이거 돌려드리려고요.”
여자가 깨끗이 세탁된 타월을 내밀었다.
그제야 태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수영장에서 구해 줬던 그 직원인 모양이다.
그때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원래 강시현 외의 다른 여자들을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편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차피 개인 소지품이 아닌 호텔 비품인데, 굳이 돌려주겠다고 찾아온 데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 나가는 길이라. 미안하지만 문 앞에 놔둬 주십시오.”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역시나 상대는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저, 죄송하지만 부탁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태하는 한숨을 지었다. 귀찮게 됐군.
상대는 호텔 직원이고, 자신은 엄연히 손님이다. 그런데도 뻔한 수작을 걸어오는 게 무척 불쾌했다.
혹시 목숨을 구해 준 답례로 식사를 대접하겠다든가 하는 거라면 단번에 거절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여자는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아직 정직원이 아니라 인턴입니다. 전 꼭 그랜드호텔에서 일하고 싶은데, 손님께 폐를 끼쳤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순간 경계심이 탁 누그러지며 웃음이 났다.
아, 내가 자뻑이었나.
열심히 일할 생각밖에 없는 사람에게 괜한 의심을 한 것이 미안해서, 태하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가 달고 있는 명찰의 이름을 살폈다. 역시 글로벌 서비스 정책의 일환인지, 한국 이름 대신에 영문명이 쓰여 있었다.
“그럼 열심히 해요, 클로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기쁜 얼굴로 돌아섰다.
*
태하에게 타월을 건네고 돌아서며 아현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얼굴 도장 찍는 데는 성공.’
수영장에서 맨몸인 그에게 안긴 후로, 더욱더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금욕적일 정도로 철저히 갖춰 입은 슈트 아래에는 훨씬 더 멋진 것들이 숨어 있었다.
아름다운 근육과, 힘센 팔과, 탄탄한 허벅지와…….
수영복을 입은 태하를 떠올리며 아현은 야릇하게 입술을 핥았다.
저 남자와 함께하는 밤은 얼마나 황홀할까. 문득 그를 독점하고 있는 시현이 얄미워졌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 아는 맛을 빼앗기면 더 화가 나겠지.
빨리 그의 침대에 뛰어들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그냥 플랜 B부터 시작할 걸 그랬나?”
중얼거려 놓고 아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윤태하는 섣불리 다가가면 안 되는 남자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도 표정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만약에 거기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했으면, 분명 대번에 거절을 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공략할 생각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빠져들도록.
그게 아현의 플랜 A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근무지로 돌아가던 아현은 마침 로비로 들어서는 여성 고객과 마주쳤다.
“어서 오십시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자 상대도 상냥하게 마주 인사해 주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대로 지나쳐서 갈 길 가다가, 아현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왠지 방금 본 얼굴이 무척 낯익게 느껴졌다.
‘어디서 봤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생각났다.
“……아줌마?”
가슴이 철렁해서 아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분명히 저희 집에서 옛날에 일하던 가정부였다.
어린 자신에게 늘 꼬박꼬박 아현 아가씨라 부르며 존댓말을 했던 상대에게, 자신이 방금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던 게 뒤늦게 확 짜증이 났다.
‘뭐야, 가정부 주제에 왜 이런 데는 와 가지고.’
아현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가슴을 폈다. 가서 알은체를 해 줄 생각이었다.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돈 좀 버셨나 보네요? 특급호텔도 다 다니시고.’
그러나 아현이 채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직원이 어디선가 달려와서 여자를 맞이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컨시어지의 최고참 매니저는, 그지없이 사근사근하고 공손한 태도로 여자를 대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사모님?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귀띔해 주었다.
“회장 사모님이세요.”
“네?”
얼빠진 아현을 향해, 선배 직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케네디 회장 사모님이라니까요? 가끔 오시는데, 회장님께서 무척 귀하게 여기는 분이시니 잘 모셔야 해요. 클로이도 혹시나 사모님 대할 때 실수 없도록 주의해요.”
아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