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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희선의 과거 (107/181)


#107. 희선의 과거
2022.10.07.


집에 돌아온 아현이 현관에서부터 숨넘어가게 엄마를 부르며 달려왔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

얼굴에 팩을 붙인 채 소파에 드러누워 홈쇼핑 채널을 감상하고 있던 화란이 핀잔을 주었다.


“아유, 다 큰 계집애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어디 호떡집에 불이라도 났니?”

아현이 숨도 쉬지 않은 채 물었다.


“엄마 기억나지? 왜 옛날에 우리 집에서 일했던 가정부 있잖아!”

“가정부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누구 말인데?”

“제일 오래 일했던 젊은 여자 말이야! 맨날 시현 언니만 싸고돌던!”

“아, 그 여자? 갑자기 그 얘긴 왜?”

“나 오늘 그 여자 봤잖아, 그랜드호텔에서!”

화란은 코웃음을 쳤다.


“그새 남자라도 잘 물어서 팔자 폈나 보네? 주제에 그런 특급호텔도 다니고.”

“손님으로 온 게 아냐!”

“그럼 뭐? 객실 청소 일이라도 하고 있디?”

“엄마 놀라지 마. 글쎄 그 아줌마가 케네디 회장 와이프래!”

“뭐?”

화란은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네디 회장 와이프면 우리 안사돈인데 무슨 소리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아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진짜, 케네디 회장이 한국에 아들 있다고 했잖아? 그 아들을 낳았다는 한국 여자가 바로 그 아줌마라고!”

화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얼굴에 얹고 있던 팩이 굴러 떨어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그러니까, 시현 언니 시어머니 될 사람이 그 여자라니까?”

화란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잃었다.


“뭐 잘못 본 거 아니고?”

“잘못 보긴,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던데. 그 아줌마가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일했어? 확실하다니까 글쎄.”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별로 좋지도 못한 머리로, 화란은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그러다 한참만에야 시현이 그 계집애를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의 일이 번쩍 떠올랐다.


[신부수업 시킨다는 핑계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엌일을 많이 시키셨다고요.]

[아니 무슨, 가끔씩 설거지 한 번 시킨 걸 가지고…….]

[저희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 안 하시던데요.]

화란은 무릎을 탁 쳤다.


“세상에, 그게 그 소리였구나!”

그땐 조카사위 녀석이 대체 무슨 도깨비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맞네, 진짜로 안사돈이 그 여자네!”

이해하고 나자 화란은 뒤늦게 진짜 충격에 빠져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라니? 세상에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옛날에 시현을 자기 딸처럼 예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제 아들을 소개해서 며느리로 들였겠지, 싶었다.

분명 케네디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제 며느리 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제 아들을 돌보았다’고 말했지만, 뉴스 따위 담쌓고 사는 화란은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나마 그 기자회견에서 말한 며느리란 여자가 시현이라는 것도 아현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아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잘해줄걸!”

화란은 뒤늦게 땅을 쳤다. 그랬으면 그 자리가 우리 아현이 자리가 됐을 수도 있는데!

그 여자는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주민등록이 말소돼 있다고 했었다.

신분이 불확실한 것을 빌미로 데려다 반값에 부려먹으면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도 알차게 써먹었다. 어차피 우리 집 아니면 갈 데도 없을 테니까.


[아줌마! 여기 먼지 남은 거 안 보여?]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화란은, 툭하면 그 여자를 들볶고 부려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아무리 구박해도 말대꾸 한 마디 못하던 여자가, 그 잘생긴 회장 부인이라고?

심지어 감히 내 안사돈?

화란은 더할 수 없는 모욕감에 휩싸였다.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지. 아니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되지, 응?”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제 엄마에게, 아현이 일러바치듯 재잘거렸다.


“정식으로 결혼한 사인 아닌데, 케네디 회장이 엄청 목매달고 있나 봐. 호텔 직원들이 사모님, 사모님 하면서 아주 귀빈 모시듯 하더라니까?”

갑자기 아현이 물었다.


“근데 엄마. 그때 그 여자 왜 갑자기 집에서 쫓아냈던 거야?”

그제야 화란은 흠칫했다. 여태 잊고 있었던 것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떠올랐다.


“그러게. 쫓아냈었지, 그 여자.”

화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지?”

좀처럼 움직이는 법이 없는 화란의 두뇌가 오랜만에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이거, 써먹을 데가 있을 것도 같은데……?


“아 왜 갑자기 쫓아냈느냐니까?”

“글쎄 넌 몰라도 돼.”

딸이 재차 다그쳤지만, 화란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저녁.

희선은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근처 식당에서 레온과 함께 닭발을 먹었다. 희선이 닭발을 좋아하는 걸 알고, 레온이 먼저 제의한 것이었다.


“한국 사람도 닭발 못 먹는 사람 많아요.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요.”

아무리 한국말을 잘한다 해도 레온은 어디까지나 외국인이다. 희선이 걱정하자 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번에는 당신이 프렌치 레스토랑에 와줬잖아요. 나도 노력해야지요.”

테이블 아래로, 레온이 희선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서로 노력해요. 같은 세상에 살 수 있도록.”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호호 불어가며 매운 닭발을 먹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정작 레온은 맛있게 잘 먹었는데, 오히려 입에 불이 난 것은 희선이었다.

먹을 때는 그래도 먹을 만은 했는데, 다 먹고 나니 후폭풍이 몰려왔다.


“너무 매워요!”

어쩔 줄 모르는 희선을 보고, 레온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래요? 단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제주도에서 당한 일을 떠올리고 희선은 화들짝 놀라 얼른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가렸다.


“그럴 것 같아서 이번엔 미리 준비했어요.”

레온이 쿡쿡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주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눈을 흘기며 받아드는데, 레온이 성큼 다가섰다.


“……사탕값.”

 

 
그렇게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입술을 빼앗기고 만 희선은 얼굴이 확 빨개졌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자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비서도 계산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레온!”

레온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요.”

“어디 가는데요?”

“보고 싶어도 5분만 좀 참아요.”

레온이 윙크만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희선은 가게 앞에 혼자 남아서 그를 기다렸다.

사탕 포장이 잘 안 뜯겨서 한참 고생하다 겨우 뜯어 입안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고사리 같은 손이 다가와서 사탕을 휙 채갔다.


“……?”

깜짝 놀라 바라보자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제 입에 사탕을 넣고 있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상대는 미취학 아동이다. 희선은 금세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탕 먹고 싶었어? 아줌마한테 말을 하지.”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만 보면 마음이 찌르르해지는 희선이었다. 우리 태하도 어릴 때 이렇게 예뻤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 살이니? 엄마 아빠는 어디 계셔?”

상냥하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아이는 사탕을 빨아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꺄아아악!”

희선은 깜짝 놀랐다. 무슨 사고라도 벌어졌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서 희선과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여자가 달려왔다.


“너 누가 이런 거 줬어!”

아이가 물고 있는 사탕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아이 엄마는 희선을 노려보았다.


“저기요! 남의 집 애한테 허락도 없이 아무거나 막 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매우 격앙된 목소리였다.


“아니, 저는…….”

“여태 과자 한번 안 먹이고 키운 애한테 사탕을 주면 어떡하냐고요! 미치겠네, 진짜!”

희선이 뭐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상대는 길길이 날뛰었다.

조금 억울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아이가 혼날까 봐, 희선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몰랐네요.”

“죄송하다면 다예요?”

그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댁의 아드님이 빼앗아가던데요.”

언제 돌아왔는지, 레온이 희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네?”

아이 엄마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레온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준 게 아니라, 댁의 아드님한테 빼앗긴 겁니다.”

그러더니 허리를 낮춰서 주울까 말까, 하는 눈빛으로 땅바닥에 버린 사탕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향해 물었다.


“우리 친구, 솔직히 얘기해볼까? 사탕 뺏은 거니, 아니면 받은 거니?”

엄한 눈빛에, 아이는 조금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뺏었어요.”

그제야 아이 엄마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죄송하게 됐네요.”

뒤늦게 제 아들의 등짝을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아이 엄마는 황망히 아이를 데리고 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짝도 못 가서 레온에게 붙잡혔다.


“사탕값은 물어주고 가셔야죠.”

레온은 몇 발짝 떨어져 서 있던 비서를 불렀다.


“장 비서, 아까 그 사탕 얼마였죠?”

“삼백 원이었습니다, 회장님.”

그랜드호텔 회장은 척 하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삼백 원 부탁합니다.”

현금이 하나도 없다고 곤란해하는 아이 엄마에게, 결국은 비서를 통해서 악착같이 계좌이체로 삼백 원을 받아 내고 나서야 돌려보내는 레온을 보고 희선이 한숨을 지었다.


“어린애가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할 거 없잖아요.”

“애는 그럴 수 있지만 부모는 안 되죠.”

딱 잘라 말하고, 레온은 희선을 향해서도 드물게 엄한 목소리를 냈다.


“빼앗겼으면 빼앗겼다고 말을 해야지, 왜 가만히 뒤집어쓰고 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아이가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서요.”

“아이는 혼나면 안 되고, 당신은 혼나도 되고?”

“나는 어른이잖아요. 한 소리 듣는다고 큰일 안 나요.”

“내가 큰일 나요!”

레온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보였다.


“어린아이고 뭐고, 나한테는 내 로즈가 제일 소중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혼나고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비서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희선은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 줄 몰랐지만,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 잘못도 아닌 거 뒤집어쓰고 욕먹고, 당신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뭘 이까짓 걸 가지고요. 이 정도는 억울한 일 축에도 안 들어요.”

아무렇지 않게 웃는 수연을, 레온이 아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동안, 당신은 대체 무슨 억울한 일을 그렇게 많이 당했나요.


“나한테 다 말해 봐요. 그동안 억울했던 거, 속상했던 거, 내가 다 들어줄게요.”

듣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가장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항변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하지만 이것만은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일이니, 이 사람도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글쎄요, 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나네요.”

희선은 웃어 보였다.


“다음에 생각나면 얘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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