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 신데렐라의 데이트 (109/181)


#109. 신데렐라의 데이트
2022.10.14.



 
여섯 시간의 근무 끝에 30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휴식 시간이 채 시작되기도 전부터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는 아현을, 선배 직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어도 고쳐지지 않으니 이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럼 쉬고 오겠습니다.”

아현이 콧노래를 부르며 로비를 가로지르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손님이 이름을 불렀다.


“어머, 너 아현이 아니니?”

깜짝 놀라 돌아보자 친구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아현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뭐야, 너 요즘 회사 다닌다더니 그게 그랜드호텔이었어?”

친구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손뼉까지 쳐댔다.


“진짜 대박이다, 강아현! 그때 그 남자 때문에 취업까지 한 거야? 케네디 회장 아들…… 읍.”

아현은 달려들어서 얼른 친구의 입을 틀어막았다.


“따라와.”

그대로 아현은 납치하다시피 친구를 인적이 드문 곳까지 끌고 갔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놓아 주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너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케네디 회장은 그 여자 아니면 죽어도 며느리로 안 삼을 기세던데.”

확신하고 묻는 말을, 아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어 봐야 통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결혼은 아들이 하는 거지, 자기가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멀쩡히 약혼녀 있는 남잔데.”

“아직 결혼한 거 아닌데 뭐 문제 있어?”

아현의 생각에 다섯 살 위의 사촌언니 시현은 제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였다. 공부 하나는 저보다 잘했지만, 그 외에는 어림없었다. 나이도, 미모도, 몸매도, 집안도 제 쪽이 훨씬 뛰어나다.

그 남자가 시현을 좋아하는 건 단순히 어릴 때부터 시현만 봐서, 다른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런 것뿐이라고 아현은 생각했다.

아현은 자신이 있었다. 옛날부터 시현이 가진 것 중에 자신이 빼앗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남자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진전은 좀 있고?”

아현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뭐야, 진짜 잘돼가고 있나 보네?”

친구가 왠지 못마땅한 표정을 하는 것이, 오히려 아현에게는 묘한 쾌감으로 작용했다.

큰 회사 오너의 손녀라고 늘 자신을 한 수 아래로 깔보던 친구다. 보란 듯이 윤태하를 잡아서,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쨌든 잘 놀다 가. 난 근무 중이라, 나중에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고 아현은 돌아서서 걸음을 서둘렀다. 윤태하와 밀회를 나눌 시간을 1분이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아현은 정원에 나가 고양이를 돌보는 척을 했다. 그때마다 윤태하도 나와서 고양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현이 노렸던 대로, 그는 일부러 사료와 캔까지 챙겨다 줄 정도로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둘이서 함께 고양이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음, 꼬맹이 어떻습니까?]

[나중에 크면 안 어울릴 것 같아요. 튼튼하게 자라라고 튼튼이 어때요?]

고양이 덕분에 점점 윤태하와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클로이는 왜 호텔에서 일하게 됐죠?]

[호텔은 즐거운 공간이잖아요. 사람들이 웃고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게 좋아요.]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클로이 같은 사람이 꼭 정직원이 되어야 할 텐데.]

[노력해봐야죠.]

[꼭 일하고 싶으면,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해볼까요?]

[그러지 마세요. 제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합격하고 싶어요.]

그런 아현을, 윤태하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를 돌보는 정 많은 여자.

백을 써 주겠다는데도 마다하며 그저 열심히 살 줄만 아는, 올곧은 여자.

아마 그의 눈에는 아현이 그렇게 비치고 있을 터였다.

사실은 연기하면서도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캐릭터, 너무 후지지 않나? 옛날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신데렐라 캐릭터도 아니고.

그 많은 대단한 여자들을 놔두고 하필 강시현이랑 사귀는 거 보니 대충 취향이 짐작이 가서 맞춰주는 중이었다.

사실은 아현이 어엿한 부잣집 딸이고, 무엇보다 강시현의 사촌동생이라는 걸 알게 되면 배신감도 느껴질 테지만 그때는 이미 게임 끝일 터였다.

알게 됐을 때는 이미 자신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후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친구와 헤어진 아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정원으로 향했다.


“튼튼아, 맘마 먹자!”

챙겨 온 소시지를 흔들며 불렀는데, 평소 같으면 금세 야옹대며 나타났을 녀석이 웬일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튼튼아, 튼튼아?”

몇 번이나 불러도 고양이가 보이지 않아서 아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 멍청한 고양이 새끼가 어딜 갔지?’

운전기사를 시켜서 잡아 온 길고양이 새끼를, 남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 짓을 두 번 할 자신도 없거니와, 다른 고양이를 데려오면 눈치 빠른 윤태하가 의심하지 않을 리 없었다.

고양이가 없으면 윤태하와 매일 만날 핑계가 사라지는데!

아현은 초조해서 어쩔 줄 몰랐다.


“튼튼아, 어디 갔니? 튼튼아!”

소리 높여 부르며 두리번거리는데, 등 뒤에서 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태하는 왠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튼튼이 못 보셨어요? 네?”

매달리듯 묻자 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잖아요. 걱정이 돼서 아침 일찍 와 봤더니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멍청한 고양이 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울컥한 것을, 태하는 우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울지 말아요.”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는 바람에 아현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때다!

아현은 당장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흑……!”

“클로이 잘못이 아닙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우는데도, 눈치 없는 남자는 좀처럼 껴안고 달래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현은 고개를 숙이는 척 슬쩍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우리 튼튼이, 얼마나 추웠을까요?”

남자는 놀란 듯 흠칫 몸을 굳혔지만, 밀어내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조심스럽게 아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무 불쌍해요, 흑흑!”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현은 그의 품에 파고들어 흐느껴 울었다.

*



‘좋았어!’

근무처로 돌아오며, 아현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아깝지만 이렇게 윤태하와 또 한 발짝 가까워진 것은 큰 성과였다.

넓은 품에 폭 안겼더니 어쩌면 그렇게 눈물이 펑펑 나는지 몰랐다. 하나도 안 슬픈데.


‘배우를 할 걸 그랬나?’

우느라 화장이 망가져서, 고치느라 5분 정도 늦게 돌아왔더니 선배 직원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클로이,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인턴이나 하고 있으니까 사람 우습게 보이나.

친구들한테는 중소기업이라고 무시당하지만 아현도 어디까지나 운전기사에 정원사까지 두고 사는 부잣집 딸이었다. 애초에 생계 때문에 일해야 하는 팔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까짓 게 이래라 저래라야?’

확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어쨌든 이 호텔에 다니는 동안에는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매니저님. 주의하겠습니다.”

짜증을 감추고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데, 저만치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태하였다.


“클로이.”

아현은 얼른 친절한 미소를 띠고 응대했다.


“네, 손님.”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도 근무합니까?”

아현은 영문을 모르고 대답했다.


“이번 주말에는 근무가 없습니다만…….”

“잘됐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태하는 말했다.


“그럼 토요일 저녁에 나하고 식사 같이하죠.”

아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아현을 야단친 매니저는 물론, 다른 선배 직원들도 놀란 얼굴로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현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태하는 말했다.


“일곱 시에 레스토랑 르 블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오너 아들이 인턴 직원에게 공개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객실부서는 물론이고 사무부서에 식음료부까지, 호텔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지배인부터 메이드까지 둘 이상만 모이면 하루 종일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아니, 약혼녀는 어쩌고?”

“누가 봐도 클로이가 훨씬 어리고 예쁘잖아.”

“결국 남잔 어쩔 수 없나.”

“그 약혼녀분, 굉장히 친절하고 매너 있는 분이셨는데.”

시현을 직접 본 사람들은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케네디 회장님은 아시려나?”

“모르시겠지, 알면 가만히 있으시겠어?”

그 와중에 용감하게 총대를 멘 사람이 있었다. 평소 아현의 근무 태도를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긴 선배 직원이었다.

정직원조차 시켜 주기 싫은 마당에, 저따위 것이 호텔 후계자 부인이 될 수도 있다니! 나름 그랜드호텔의 미래를 걱정한, 즉 애사심에서 나온 돌발 행동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장님.”

왠지 케네디 회장은 요즘 부쩍 몸만들기에 신경 쓰고 있었다. 오늘도 호텔 내 피트니스로 향하는 회장님의 앞을 가로막고, 용감한 직원은 말을 건넸다.


“뭔가요?”

“토요일 저녁에 윤태하 대표님께서, 레스토랑 르 블랑에서 컨시어지 인턴으로 근무하는 여성 직원과 단둘이 식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직원은 단둘이, 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케네디 회장이 놀란 듯이 되물었다.


“예 회장님. 틀림없습니다.”

케네디 회장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레스토랑에 연락해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로 모시도록 해요. 최고로 좋은 와인을 준비하도록 하고요.”

“네?”

“아들이 데이트를 하는데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황한 직원을 향해, 케네디 회장은 빙긋 웃었다.


“미리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드디어 약속한 토요일 저녁 일곱 시.

신데렐라는 확 달라진 모습으로 호텔에 나타났다.

청순한 디자인의 원피스에 보석 장식이 달린 구두, 반짝이는 눈동자.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묶고 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호박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말 그대로 무도회에 온 신데렐라 같았다.

왕자님은 호텔 정문까지 나와서 신데렐라를 맞이했다.


“오늘 무척 멋지네요, 클로이.”

아현은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대답했다.


“윤 대표님도 멋지세요.”

평소보다도 더 완벽한 몸차림을 한 태하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나한테도 특별한 날이니까.”

도어맨부터 프런트 직원까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시선을 즐기며, 아현은 태하의 에스코트를 받아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황홀한 야경이 펼쳐진 프라이빗한 좌석에 안내되어 마주 앉았다. 테이블 전담 웨이터가 두 사람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주문은 조금 이따가 다 모이거든 하죠.”

“네?”

태하의 말에 아현은 흠칫했다. 다 모이다니? 의아하게 바라본 순간, 그가 아현의 어깨너머를 바라보고는 반가운 얼굴을 했다.


“아, 마침 왔네요.”

아현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저만치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시현이었다.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죠?”

태하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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