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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증거 있어? (110/181)


# 110. 증거 있어?
2022.10.18.



 
저만치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시현이었다.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죠?”

태하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처제.”

 

*

호텔 정원에서 고양이를 돌보는 아현을 처음 마주쳤던 날.

아현과 헤어져서 정원을 나오며, 태하는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비서님? 윤태하입니다. 부탁이 좀 있습니다만.”

- 예, 대표님.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장 비서는 흔쾌히 대답했다. 태하가 아버지와 함께 지낸 후부터, 아버지의 비서는 태하의 일도 이것저것 함께 돌보아 주고 있었다.


“호텔 직원 중에 클로이라는 이름의 인턴사원이 있습니다. 소속은 잘 모르겠고, 하여튼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아까 여자가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태하는 이게 연기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비록 부모는 없었지만 그는 시현에게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랐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진짜 다정함을 알기에, 가짜 다정함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작은 고양이는 눈곱을 가득 달고 있었다. 한눈에도 건강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고양이에게, 여자는 사람이 먹는 짜디짠 소시지를 먹이고 있었다.

벌써 한참 전부터 돌봤다는 식으로 말하던데, 강시현이었다면 불쌍해하는 척하기 전에 먼저 동물병원부터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 전용 사료를 사다가 먹였겠지.

그러니까 저건 연극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눈에 들기 위한.

객실로 돌아가서 기다리자 아버지의 비서에게서는 금세 다시 연락이 왔다.


- 말씀하신 직원은 컨시어지에서 근무하고 있고, 본명은 강아현이라고 합니다.

태하는 잠시 생각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인데…….

드디어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름이 뭐라고요?”

다시 한번 묻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 강아현 씨라고 합니다.

“혹시 올해 나이가 28세 아닙니까? 주소는 서울시 **구 **동 **번지.”

오히려 비서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 맞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태하는 이를 악물었다. 틀림없는 시현의 사촌동생이었다.

한참 말을 잃고 있던 태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당부했다.


“확인 고맙습니다. 제가 알아봤다는 건 절대 새어 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 예, 대표님.

전화를 끊고, 태하는 펜 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강아현…….”

시현의 사촌동생이 하필 이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게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분명 계획적으로 입사해서 접근한 것이다.

목적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착 달라붙어 오던 몸.

고양이를 이용해 본인의 동정심을 내세우는 행동.

방금 장 비서는 그녀가 컨시어지 소속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컨시어지 직원이 직접 수영장을 정리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 정확히 자신이 수영하는 시간에 맞춰서.

그러니까, 처음부터 자신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제 사촌언니의 약혼자인 걸 뻔히 알면서!

태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로 보였나. 불쾌감도 불쾌감이었지만, 그보다도 시현이 무시당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모가지야 당장이라도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취업이 목적이 아닌데, 해고해 봐야 그게 무슨 보복이 될까.

이걸 어떻게 되갚아줘야 할까. 이를 갈면서 태하는 아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강아현.

어릴 때부터 시현의 입에서 수도 없이 들은 이름이었지만, 그중에 좋은 내용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아현이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작은어머니한테 혼났어.]

[아현이 숙제 해주느라 늦었어.]

시현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십중팔구는 그 모녀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시현이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하루는 들뜬 얼굴로 와서는 웬 작은 기계를 꺼내 자랑을 했다.


[이것 봐, 이게 전자사전이라는 거다?]

돌아가신 시현 아버지의 친구가 시현을 보러 왔다가, 공부 열심히 하라면서 선물로 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고장 안 나게 잘 쓰다가 나중에 너 중학교 가면 줄게.]

어린 태하는 전자사전이 뭔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시현이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뻤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시현은 어깨가 축 처져서 왔다. 무슨 일이냐고 캐물은 끝에 겨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전자사전, 아현이한테 빼앗겼어.]

사촌동생이 시현의 전자사전을 보고 갖고 싶다고 졸랐고, 작은어머니가 그까짓 거 동생한테 며칠 빌려주면 좀 어때서 그러냐고 야단을 치고는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말이 빌려주는 거지 다신 안 돌려줄 게 뻔해. 한두 번 당하나, 뭐.]

시무룩하게 말하고, 시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에잇, 강아현. 확 시험이나 망해버려라.]

그때 어린 태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여자애를, 때려주고 싶다고.

그런데 그 여자애가 어른이 되어, 이제는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어미를 잃어버렸나 봐요.]

아까 아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부모 없이 자란 걸 알고, 일부러 노리고 한 소리겠지.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썩 꺼지라고 고함을 치고 싶은 것을, 태하는 억지로 참았다.

조금만 참자.

반드시, 몇 배로 돌려주고 말겠다.

가짜를 보고 나니 진짜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워졌다. 시계를 흘깃 쳐다보고, 태하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지금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을 시현에게 달려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라도 전자사전을 사서, 그녀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

시현이 태하의 전화를 받은 것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내일 저녁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나랑 식사 같이해.]

데이트 신청인가, 했더니 태하는 덧붙여 말했다.


[예쁘게 입고 와.]

지금까지 호텔 레스토랑에 몇 번이나 갔었지만, 태하는 한 번도 시현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뭘 입어도 예쁜데 왜 신경을 쓰느냐는 식이었다.

그래서 시현은 눈치를 챘다. 아, 프러포즈구나!

다행히 보라의 결혼식에 가던 날, 여분으로 몇 개 더 골랐던 옷과 구두가 있었다. 핸드백이야 레온에게 수도 없이 받았고.

시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꾸미고 호텔로 향했다.

완벽한 기분이었다. ……태하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현을 볼 때까지는.

시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뭐야? 아현이 네가 왜 여기 있어?”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현이 대답 대신에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는 태하에게 묻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처제하고 셋이 저녁식사나 함께할까 해서 불렀어.”

태하가 의자를 권해주었지만 시현은 너무 놀라서 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대체 네가 아현이를 어떻게 알았는데?”

“처제가 우리 호텔에서 일하고 있더라고. 컨시어지 인턴으로.”

“인턴?”

아현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어. 내가 호텔리어에 관심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시현은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턱걸이로 겨우 대학 졸업하고 여태 집에서 놀던 애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을 할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하필 그랜드호텔에서.

태하의 행동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현과 좋은 사이가 아닌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셋이서 밥을 먹자고 한 이유는 뭘까.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됐는데 밥 한 끼 못 먹을 것은 없었다.

작은아버지 댁과 연을 끊기는 했지만, 주된 이유는 아현이 아니라 그 부모였다. 무엇보다 시현은, 밥 먹자고 모여 앉은 자리를 일부러 박차고까지 일어날 정도로 모진 성격이 못 되었다.

그래서 시현은 픽 웃고 자리에 앉았다.


“철들었네, 강아현? 웬일로 일할 생각을 다 하고.”

그렇게 조금은 기묘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현은 어딘가 무척 불편해 보였고, 반대로 태하는 이상할 정도로 느긋해 보였다.


“그래, 처제. 컨시어지 일은 할 만한가요?”

태하가 아현에게 물었다.


“아, 네.”

“고생이 많은 것 같던데. 수영장 청소까지 혼자 도맡아 하고.”

“무슨 소리야?”

시현이 묻자 태하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마침 내가 수영하고 있을 때 처제가 수영장에 빠졌길래, 내가 구해줬거든.”

아현이 황급히 시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 언니. 그건 정말 실수로……!”

평소에 늘 거만하고 도도하던 아현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시현은 뭔가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컨시어지 인턴이 수영장 청소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태하가 계속해서 말했다.


“참, 고양이 건도 있었죠.”

“고양이?”

“응. 처제가 호텔 정원에서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더라고. 고양이 때문에 한동안 저녁마다 처제랑 계속 만났지.”

태하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데, 반대로 아현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우리 처제가 참 마음씨가 고와. 고양이 없어졌다고 얼마나 슬프게 울던지, 달래주느라 혼났어.”

아, 하고 태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현을 향해 말했다.


“참, 그 고양이는 아무래도 이런 데서 지내긴 힘들어 보여서. 내가 구조해서 좋은 곳으로 보냈으니 걱정 말아요, 처제.”

듣다 보니 점점 어떻게 된 일인지가 확실해졌다.

시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아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밥 먹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한참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아현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둘이서 짜고 날 갖고 놀았어?”

갑자기 아현이 이를 악물고 시현을 노려보았다.


“난 네가 태하랑 아는 사이인 줄도 몰랐는데.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었니?”

조용히 되묻자 아현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왜, 내가 설마 언니 남자 따위한테 꼬리라도 쳤을까 봐?”

아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거리기까지 했다.


“미친 게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아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지만 시현에게 붙들렸다.

짝!

경쾌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아현은 시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날…… 때렸어?”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현의 의식 속에서, 시현은 말이 언니이지 제 화풀이 상대나 다름없는 만만한 존재였으니까.

늘 제게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찍소리 한마디 못 하는 게 정상인 상대에게 뺨까지 맞았으니, 넋이 나갈 만도 했다.


“착각하지 마, 태하 때문 아니니까. 네가 뭘 해봐야 태하가 눈 하나 깜짝하겠니.”

아픈 손을 주무르며, 시현은 픽 웃었다.


“그냥, 네가 어릴 때 내 전자사전 빼앗아 간 게 갑자기 생각나서.”

이제야 시현은 얼마 전에 태하가 밤중에 불쑥 사무실로 찾아왔던 이유를 알았다.

뜬금없이 전자사전 운운했던 이유를.

다시는, 무엇도 빼앗기지 않게 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는지, 아현은 시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두고 봐,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내가 언제?”

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 있어?”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시현의 노트에 일부러 우유를 부어 놓고, 시현이 아끼는 물건을 가져가 놓고, 시현의 몫인 간식을 먹어치워 놓고, 아현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늘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이제 그 말을, 시현이 아현을 향해서 하고 있었다.


“너 내가 때리는 거 봤어?”

태어나서 거짓말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표정으로, 태하가 대답했다.


“못 봤는데.”

시현은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져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들에게도 물었다.


“혹시 뭐 보셨어요?”

분명히 손님을 주시하고 있었을 웨이터 두 명이, 귀신같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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