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당신 집이야
(111/181)
111. 당신 집이야
(111/181)
#111. 당신 집이야
2022.10.21.
얻어맞아 한쪽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아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지만, 시현도 태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진작 한 대 때려줄걸.”
아직도 얼얼한 손을 문지르며, 시현은 픽 웃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참 오래도 걸렸네.”
아주 오래 전부터 딱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었었다. 그랬다간 작은어머니가 길길이 날뛸 게 뻔해서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지만.
“쟤가 내 사촌동생인 거, 언제부터 알았어?”
태하가 아현을 직접 본 것은 단 한 번. 예전에 시현이 우진과 그랜드호텔에서 상견례를 했을 때 아주 잠깐 마주친 것뿐이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나이는? 어떻게 만났고?]
아현은 그때부터 태하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만, 태하는 자신에게 말을 거느라 아현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아마 기억도 못 했을 것이다.
“처음에 수영장에서 구해줬을 땐 몰랐어.”
태하가 대답했다.
“그런데 자꾸만 내 눈에 보이는 데서 고양이니 뭐니 뻔한 연극을 하고 있으니 수상하다 싶어서 좀 알아봤더니, 당신 사촌동생이더라고.”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아현이 머리가 나쁜 거야 잘 알고 있는 터다. 그 주제에 태하를 속이려 들었으니…….
“네 성격에 알고도 모른 척하느라 고생했네.”
“참았지, 단단히 망신을 주고 싶어서.”
시현은 아까 아현이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한껏 차려입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너 설마 사람들 앞에서 데이트 신청한 거야?”
“온 호텔이 다 알고 있지.”
태하가 잘생긴 입술에 조소를 떠올렸다.
“방금 혼자 나간 것도 곧 모두가 알게 되겠지.”
원래 태하 성격대로라면, 사실을 안 순간 그 자리에서 바로 호통을 쳐서 쫓아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진작 알고도 여태 놔둔 걸 보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시현은 태하가 한동안 무척 바빴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동안 아현이랑 데이트 놀이 해주느라 바빴던 거야?”
“아니, 그건 정말 다른 일.”
그렇게 말하고, 태하는 갑자기 서둘렀다.
“대충 먹었으면 슬슬 일어날까.”
시현은 조금 당황했다. 뭐야, 아현이는 아현이고, 오늘 프러포즈 하는 거 아니었어?
하긴 이미 분위기도 다 망쳐 버린 마당에, 그럴 기분도 아니긴 했다. 시현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하는 시현을 데리고 호텔을 나왔다. 당연히 집에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차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나온 김에 집 구경이나 하러 갈까 해서.”
“아, 레온 아저씨 집 구하셨구나?”
레온은 집을 구할 때까지 호텔에서 지내겠다고 했었다. 언제까지 호텔에 있을 수 없으니, 드디어 집을 마련한 모양이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태하의 차는 그랜드호텔 근처에 있는 신축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거대한 문주가 설치된 입구에 제복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서 있는 것부터가 일반적인 아파트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펜트하우스의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일단 현관부터 거실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현대미술 작품들이 걸린 복도를 걸으니 집이라기보다 무슨 미술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아.”
거실에 도착해서도 시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통 집의 서너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층고에다 복층 구조로 2층이 존재하는 것이 보였다.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밝은 색깔의 원목과 화이트로 되어 있어서, 자칫 썰렁해 보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따뜻한 느낌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련된 조명과 적절히 배치된 미술품, 묵직한 느낌의 가구들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도 놓치지 않았다.
사생활 침해 걱정이 없는 펜트하우스답게 전체적으로 창이 많았는데, 특히 전면에 위치한 가장 큰 벽은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화려한 서울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작은아버지 댁인 단독주택도 꽤나 넓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가구 하나하나조차도 모두 최고급으로 보여서, 시현은 감히 소파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게 대체 몇 평이야?”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태하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해 보고 말했다.
“복층면적 빼고 160평쯤 될 거야.”
“레온 아저씨, 역시 스케일이 다르시네.”
말해 놓고 시현은 웃었다.
“하긴, 나중에 이모랑 같이 살 생각이실 텐데 어련하시겠어?”
여태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 살고 있는 희선이 이 집을 보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괜히 제가 다 설레기 시작하는데, 태하가 불쑥 말했다.
“당신 집이야.”
“응?”
“이 집, 당신 거라고.”
듣고도 시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현에게, 태하는 다시 말했다.
“당신 재산세 고지서 나왔던 거, 이 집 때문이야.”
시현은 한참 눈만 깜빡였다. 이 집이 내 거라고?
“왜, 이걸, 대체, 어떻게……?”
두서없는 질문들 중, 태하는 제일 먼저 ‘어떻게’부터 설명했다.
“전에 어머니 가게 당신 명의로 바꿀 때, 바빠서 내 비서가 당신 대신 처리했었잖아. 그때 당신 인감도 줬었고. 멋대로 도용해서 미안.”
“…….”
“재산세는 내가 처리했어. 증여세도 확실히 납부했으니까 걱정 말고.”
다리가 떨려서, 시현은 아까부터 앉고 싶었지만 차마 죄송해서 앉을 엄두를 못 냈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가죽 시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현의 몸을 탄력 있게 받아냈다.
“프러포즈 선물 준비한다는 게 이거였어?”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 싶다고 했었잖아, 펜트하우스.”
“내가 언제?”
“당신 생일 때.”
시현은 한참 생각한 끝에야 겨우 기억해냈다.
[말해봐. 뭐든지.]
[오, 완전 로또 맞은 기분인데? 그럼 나 차 사줘.]
[사줄게.]
[아니, 차 말고 집 사주라. 펜트하우스 같은 거. 드라마에 나오는 거 있잖아?]
[사줄게.]
그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진짜 아무 말 대잔치였는데!
“누가 들어도 농담 아니야?”
“약속했었잖아. 내가 어른이 되면, 당신 생일에 비는 소원은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지만 시현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프러포즈 선물이든 생일 선물이든, 이건 선물로 받을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은 고마운데, 도로 네 명의로 돌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뭘 했다고 이런 걸 받니.”
태하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도 여기 다 들어가 있어. 우리 둘이서 같이 신혼집 마련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제야 시현은 그가 밑도 끝도 없이 1억 5천을 달라고 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 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달라고 했던 거야?”
“응.”
시현은 할 말을 잃은 채 일단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출입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는 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난 말이야, 내 방을 갖고 싶어.
태하가 어렸을 때, 시현이 자신의 생일날 처음으로 빌었던 소원이었다.
- 가정부 아줌마랑 같이 쓰는 방 말고. 나 혼자 쓰는, 진짜 내 방 말이야.
그때 시현은 이미 고등학생. 어차피 소원 따위, 빌어 봐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이였다. 태하가 하도 누나 소원이 뭔지 궁금하다고 조르기에 말했던 것뿐.
- 방문에는 출입금지라고 써 붙여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싶어.
시현은 몸을 일으켜서 끌리듯 다가갔다.
방문을 여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흰색 피아노였다. 그다음으로는 창가에 세워진 이젤과, 커다란 곰 인형과, 알록달록한 화장품과, 새하얀 운동화와…….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씩 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시현은 가족들이 외출한 틈에 사촌동생의 피아노를 몰래 쳤다가 가정부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크게 혼이 났던 소녀를 떠올렸다.
이어서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소녀를 기억해냈다.
그 다음은 용돈을 아껴서 산 화장품을 사촌동생에게 빼앗겼던 소녀를.
제일 좋아하는 곰 인형을 작은어머니가 멋대로 갖다 버려서 울었던 소녀를. 새로 산 운동화가 버스가 끼얹고 간 흙탕물에 엉망이 돼 버리는 바람에 속상해했던 소녀를.
시현은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았다. 새까만 눈으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곰 인형을 껴안고 울먹였다.
“……대체 넌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니.”
너는 왜, 나 자신마저 잊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는 거니.
태하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기억 나?”
문 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비 내느라 당신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도 못 갔었던 거.”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시현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아픈 애를 팽개쳐 놓고 어떻게 여행을 가?”
“그래 놓고 내가 중학교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땐, 내가 안 가겠다고 끝까지 우기니까 우리 학교에 직접 와서까지 내줬잖아. 그 돈, 당신 대학교 졸업여행 가려던 돈이었는데.”
대학 시절에 그토록 쪼들리면서도, 시현은 친구들과 같이 한푼 두푼 여행비를 모았었다. 졸업 전에 비행기는 한번 타 보고 싶어서였다.
열심히 모은 덕분에 홍콩 2박 3일 정도는 다녀올 수 있었는데, 마침 태하가 수학여행을 가게 되는 바람에 시현만 막판에 포기하고 빠졌다.
태하는 계속해서 문밖에서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다 나한테 줬어. 하다못해 나한테 줬던 1억 5천, 그것도 당신 전 재산이었잖아.”
“…….”
“언젠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 여태 열심히 살았어. 이제 와서 당신이 안 받아 주면 내가 살아온 인생이 의미가 없어져.”
어릴 때부터 친척집에 얹혀서 자란 시현은, 늘 어딘가 끊임없이 불안함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래서 어릴 때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시현도 혼자서 방을 쓰게 되었다. 작은아버지 댁에서 독립한 후로는 진정한 의미의 내 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처럼 안온한 공간은 되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니까 확실히 편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도리어 가끔은 사무치게 쓸쓸해서, 작은어머니의 고함소리마저 아쉬워질 때도 있었다.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태하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힘들게 준비한 프러포즈 선물을 받아주지 않을까 봐, 꽤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특별히 허락해줄게.”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말끝은 기어이 흐느낌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너는 언제든지 들어와도 돼.”
방에서 나오는 시현을, 태하가 팔을 벌려 감싸 안았다.
넓은 품에 안기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 여기가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
평생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곳.
“왜 울어, 바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하의 목소리도 역시 떨리고 있었다.
“너도 울잖아, 바보야.”
그렇게, 두 바보가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내 반지 어디 있어?”
한참만에야 시현은 훌쩍이며 투정을 부리듯 태하의 가슴을 밀어냈다.
“프러포즈 하면서 달랑 집만 주면 어떻게 해. 반지도 줘야 할 거 아니야.”
누가 들으면 어이가 없어할 말이었지만, 남자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을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제게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거짓말처럼 행복해졌다.
“미안. 여기, 여기 있어.”
그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상자를 꺼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시현이 그에게 프러포즈했을 때 선물한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같은 걸 구하느라 꽤나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이 가상하다, 윤태하.”
태하가 끼워 준 반지를 들여다보며, 시현은 그제야 눈물을 훔치고 웃었다.
“결혼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