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선물
(112/181)
112.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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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선물
2022.10.25.
“아현아, 밥 먹어야지, 응? 어제도 하루 종일 굶었잖아.”
굳게 잠긴 방문 앞에서 죽 쟁반을 든 화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데이트라도 하듯 예쁘게 차려입고 나갔던 딸은, 왠지 얼마 안 돼서 금세 집에 돌아오더니 그대로 방에 틀어박혔다. 그 후부터 월요일 아침인 지금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꼬박 굶은 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얘기를 해봐, 응?”
살살 달래봐도 아현은 대꾸조차 없었다. 화란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거실 전화기가 울렸다.
“짜증나 죽겠는데 누가 전화질이야. ……네, 전화 바꿨습니다.”
전화를 받은 화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혹시 가정부가 들었을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수화기에 대고 책망했다.
“미쳤어? 내가 집으로 전화하지 말랬지?”
그녀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니 무슨 투자를 또 해? 선물인지 뇌물인지 손댔다가 홀라당 말아먹어 가지고 막아준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이 웬수야!”
화란이 애꿎은 수화기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렇게 큰돈이 어딨어? 그 인간, 가정부 월급도 만 원 한 장까지 일일이 따져갖고 주는 인간인 거 몰라?”
그러나 끈질기게 구는 상대에게, 화란은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알았어,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좀 기다려봐.”
전화를 끊은 화란은 푸념을 하며 안방을 나왔다.
“어휴, 하여튼 이 개도 안 물어갈 놈의 팔자. 이놈이고 저놈이고 쓸만한 인간이라고는 하나도…… 엄마야 깜짝이야!”
푸념을 하며 안방을 나오다 화란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여태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딸이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발을 쿵쿵거리며 나오는 것이었다.
아현은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쟁반에서 죽사발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아현아?”
제 엄마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쳐다보는 가운데 죽을 원 샷 해 버린 아현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아줌마한테 내 옷 준비해달라고 해. 나 출근할 거야.”
*
지난 토요일 저녁, 그랜드호텔 직원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뺨에 손자국이 뚜렷이 새겨진 클로이가 씩씩거리며 혼자서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것을.
물론 그 뒤에 태하와 시현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것도.
“진짜 민망했겠다.”
“그러게. 데이트인 줄 알고 신이 나서 나갔는데 거기 약혼녀가 딱 나타난 거 아냐?”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클로이의 뺨에 새겨진 손자국에 대해서는, 시현이 대단한 인격자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양쪽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그 망신을 당했으니 그대로 인턴십에서 중도 하차할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클로이는 월요일 아침에 어김없이 출근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지없이 당당한 태도로.
“클로이, 토요일 저녁에 식사는 잘했어요?”
비꼬듯 묻는 선배 직원에게, 클로이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네. 사실은 윤태하 대표님이 저희 사촌 형부 될 분이거든요. 그래서 사촌언니랑 셋이서 같이 식사 한번 한 거예요.”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뭐야, 그럼 처음부터 데이트가 아니었던 건가?
그럼 뺨의 손자국은 대체 뭐였고?
인사팀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 놀랍게도 클로이의 주장은 사실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엄연히 회장님의 친인척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차마 막 대하지도 못하고, 클로이는 전보다도 한층 더 미묘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
아침에 장사 준비를 하던 희선은 레온을 향해 말을 걸었다.
“레온, 나 거기 식칼 좀 줄래요?”
대답이 없어서 흘깃 쳐다보니 레온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곁에서 감자를 깎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어디 갔을까.
희선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가게를 나왔다. 어디 갔나 했더니 가게 뒤편에 있는 골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홀시 회장이 무척 불쾌해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큰 계약을 앞두고 얼굴도 한 번 못 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장 비서였다.
“그것 말고도 직접 처리하셔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한번 미국에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싫습니다.”
조심스럽게 건넨 충언을, 레온은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왔다 갔다 최소한 일주일은 넘게 걸릴 텐데, 그동안 로즈 혼자서 어떻게 가게를 보란 말이죠?”
희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장 비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 걱정이 되시면 제가 회장님 대신 가게에 남아서 사모님을 돕겠습니다.”
“돈가스 튀길 줄도 모르는 분이 무슨.”
그러나 레온은 막무가내였다.
“안 돼요, 로즈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합니다.”
희선은 깨달았다. 아, 내가 여태 생각이 짧았구나. 저 사람이 돈가스나 튀기고 설거지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부끄럽고 민망해서, 희선은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
시현은 퇴근 후에 호텔 옆 백화점에서 희선을 만났다.
“이모가 웬일로 백화점에서 만나자고 하셨어요?”
“응, 태하 아빠 선물을 사려고 하는데 시현이가 좀 골라줬으면 해서.”
수줍은 듯이 말하는 희선을 보고 시현은 웃음을 참았다. 서로 선물을 살 때는 꼭 나를 부르시는구나.
“왜요? 아저씨 생일이세요?”
“아니. 이제 슬슬 알바 자를까 해서, 퇴직 기념 선물.”
“어머, 아저씨 우시겠어요!”
희선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잖니. 그 사람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가게에서 감자나 깎게 만드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건 그렇긴 하네요. 뭐 사시려고요?”
“넥타이. 그 사람 창피하지 않게, 제일 비싸고 좋은 거였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해놓고, 희선은 뒤늦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넥타이가 막 몇백만 원씩 하고 그렇진 않겠지?”
“에이, 설마요.”
시현은 희선과 함께 명품 매장으로 향했다.
“선물 받으실 분이 외국인이거든요? 머리는 갈색이고…….”
“혹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는 분이라면 산뜻한 색깔이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웃음기 어린 대답에, 시현은 매장 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전에 레온과 함께 와서 쇼핑했을 때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직원까지 셋이서 한참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고른 것은 산뜻한 파란색의 넥타이였다.
사는 김에 시현도 태하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하나 골랐다. 오히려 태하는 아버지와 달리 차분한 분위기라 짙은 고동색으로 선택했다.
“이모, 온 김에 우리 가방도 구경하고 가요.”
원래 구매 실적이 없는 고객에게는 특정 가방 따위 보여주지도 않는 콧대 높은 브랜드였다. 하지만 매장 측에서는 이미 이 두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역시나 곧바로 비밀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거 참 얌전하고 예쁘다. 많이 비쌀까?”
셀러가 보여주는 여러 가방들 중에서, 희선은 제일 수수하게 생긴 갈색 가죽 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모, 그거 제가 선물할게요.”
“응? 갑자기 왜?”
“이모가 제 시어머니 되실 거잖아요. 예단 받으셔야죠.”
“어머, 싫어!”
시현이 한때 그놈의 시어머니 예단 가방 때문에 한바탕 마음고생을 했던 것을 잘 아는 희선은 대번에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이건 진짜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글쎄 됐다니까? 너 그런 거 안 해와도 나 시어머니 노릇 안 해.”
“저 태하한테 집도 받았어요. 그럼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한참 실랑이를 하는 두 사람을, 셀러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희선의 품에 가방을 강제로 안겨주고 나서, 시현은 셀러에게 살짝 귀엣말로 물었다.
“저거 얼마예요?”
셀러가 미소를 짓고 똑같이 귀엣말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하고 며느님 쇼핑하시는 금액은 회장님 비서실에서 결제하게 돼 있습니다.”
이제 보니 미리 지침이 다 내려가 있는 모양이다. 시현은 레온의 치밀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시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시아버지 돈으로 살 수는 없었다.
시현은 제 카드를 꺼내어 건넸다.
“저건 제가 살 거예요. 죄송하지만 24개월 할부로 좀 부탁드릴게요.”
태하의 넥타이 값까지 포함된 카드 영수증을 받아 들고 보니 천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찍혀 있어서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얼마나 했니?”
희선이 걱정스레 물어서, 시현은 얼른 영수증을 아무렇지 않게 구겨버렸다.
“백만 원 좀 넘네요.”
십분의 일로 낮춰 말했는데도 희선은 깜짝 놀라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세상에, 무슨 가방이 그렇게 비싸니? 우리 시현이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인데 미안해서 어떡해.”
세상 물정 모르는 희선이 귀여워서, 시현은 카드 값 걱정도 깜빡 잊어버렸다.
“죽을 때까지 아껴서 쓸 거야.”
가방이 든 쇼핑백을, 희선은 산타에게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사모님, 결제는 회장님 비서실에서 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희선이 넥타이 값을 결제할 때도 매장에서는 똑같이 안내했지만, 희선도 시현과 똑같이 말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살 거예요.”
삼십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을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지불하면서, 희선은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을 했다. 희선에게 줄 목걸이를 사면서 설레하던 레온이 그 얼굴에 겹쳐 보였다.
사이좋게 매장을 나오면서, 희선이 말했다.
“역시 사람 많은 데 나오니까 지치네. 어디 좀 앉아서 쉴 데 없을까?”
“그럼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요?”
대답하다 시현은 문득 어디선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자 저만치서 누군가가 급하게 몸을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글라스를 쓴 화려한 차림의 여자였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연예인인가 싶었지만 왠지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작은어머니?’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선이 물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현은 얼른 웃어 보였다. 에이, 잘못 봤겠지.
라운지니 뭐니 하는 곳들은 익숙하지 않아서, 일부러 백화점 내 카페로 향했다. 베이커리로 유명한 카페여서 매장 내는 거의 꽉 차 있었다. 빵 몇 가지와 커피를 사서 겨우 빈 테이블을 찾아 앉으려는 순간.
“야, 여기 자리 있다!”
시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 새치기를 하듯 날쌔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지금 저희가 앉으려고 했는데 뭐 하시는 거죠?”
당황한 시현이 이의를 제기하자 상대는 뻔뻔스레 오리발을 내밀었다.
“저희가 먼저 맡아 놓고 잠깐 화장실 다녀온 건데요?”
시현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아니, 자리에 가방 하나 안 놓여 있었는데 장난하나?
“저기요.”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데, 희선이 팔을 붙잡고 말렸다.
“시현아, 그냥 다른 데 가서 앉자. 응?”
성질 같아서는 한판 붙고 싶었지만, 희선이 불안해하는 게 보여서 시현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잠시 기다리자 다른 테이블이 비어서, 그쪽에 가서 앉을 수 있었다.
“아까는 왜 말리셨어요?”
“그냥, 누구랑 싸우고 큰소리 나는 게 불편해서 그래.”
희선이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이젠 안 그래도 된다는 거 아는데…… 워낙 습관이 돼서 그런가, 잘 고쳐지지가 않네.”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 내 생각이 짧았구나.
희선은 워낙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신분으로 살아왔다.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으니, 누군가와 시비가 붙는 상황 자체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가게 보증금을 사기당하고도,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못 하고 울먹이기만 하던 희선이 떠올라서 시현은 새삼 마음이 아팠다.
“이제 저도 있고 태하도 있고 레온 아저씨도 있잖아요.”
시현은 테이블 너머로 희선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 마세요. 앞으론 절대 아무 일 없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