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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여기 엄마 없어, 나 불러 (113/181)


#113. 여기 엄마 없어, 나 불러
2022.10.28.



 
커피를 마시면서도 희선은 계속해서 넥타이 상자를 어루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태하 아빠가 마음에 들어 할까?”

마치 예전에 목걸이를 샀을 때의 레온의 반응과 똑같아서 시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잘 때도 안 풀려고 하실걸요?”

말하고 보니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이모는 왜 목걸이 안 하세요?”

“응? 무슨 목걸이?”

희선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되물어서, 시현은 눈치를 챘다. 아직도 못 주셨나 보구나.


“그냥 목이 좀 허전해 보여서요. 뭐라도 걸면 좋겠다 싶어서, 아하하.”

시현은 말실수를 감추기 위해 얼른 말을 돌렸다.


“근데 이모는 아저씨하고 언제 결혼하세요?”

“얘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한 희선이 커피 잔을 얼른 내려놓고 눈을 흘겼다.


“서로 좋아하시잖아요. 당연히 하셔야죠, 결혼.”

“우리가 급할 게 뭐 있니? 우선 너희들부터 먼저 결혼시키고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하지만 시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도 하루빨리 함께하고 싶지만,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레온과 희선이 더 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희는 아직 젊잖아요. 앞으로 같이 있을 날도 많고요. 하지만 두 분은 너무 오래 떨어져 계셨고, 또…….”

시현이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을, 희선은 이해한 모양이었다.


“응.”

생각에 잠긴 얼굴로, 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태하가 시현이한테 집을 사줬단 말이야?”

잠시 후, 희선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물었다.


“네. 엄청 크고 좋은 집이에요. 솔직히 제 주제에 너무 과분하긴 한데, 이미 산 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과분하다니? 우리 시현이 데려가려면 당연히 그 정돈 해야지.”

태하의 어머니인 희선이 마치 친정엄마처럼 이야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모, 이거 마시고 나서 잠깐 다른 곳도 둘러보면 안 돼요?”

“왜, 뭐 보고 싶은 거 있니?”

“신혼집에 쓸 침구나 커튼 같은 거요.”

찬찬히 집을 둘러보고, 시현은 태하가 참 세심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멋지게 인테리어를 해놓고도, 어디까지나 신혼집인 만큼 신부인 시현이 직접 꾸밀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주었던 것이다. 집이 워낙 넓기도 해서 채워 넣어야 할 것이 끝도 없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가 리빙 코너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팔짱을 끼고 쇼핑하고 있는 모녀가 눈에 들어와서, 시현은 희선에게 물었다.


“이모도 저렇게 구김살 없이 자란 집 딸한테 아들 장가보내고 싶지 않으셨어요?”

“응?”

“저는 엄마도 없이 자랐잖아요.”

희선이 걸음을 멈추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엄마가 왜 없니? 내가 있는데.”

말투는 엄했지만, 눈빛에는 애정이 흘러넘쳤다.


“아직은 결혼 전이니까 이모라고 불러도 놔두지만, 식만 올리면 어림도 없어.”

희선은 시현의 손목을 붙잡고 한눈에도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브랜드로 향했다.


“자, 어디 너 갖고 싶은 거 다 골라봐.”

이번에는 시현이 당황할 차례였다.


“이모, 여기 되게 비쌀 거 같아요.”

“걱정 마, 나 돈 있어. 여차하면 카드도 있다?”

희선은 잠시 망설이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얼마 전에 레온이 강제로 쥐여 준 것인데, 여태 한 번도 써 본 적은커녕 꺼내는 것도 이게 처음이었다.


“와, 블랙 카드!”

시현이 눈을 반짝이는 바람에, 이게 뭔지도 몰랐던 희선이 오히려 놀랐다.


“이게 다른 카드랑 뭐가 다른 거니?”

“저도 잘 모르는데 그냥 엄청 좋은 거래요.”

서로 소곤거리다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빛이 있었다.

*



“좋은 아침, 로즈!”

활기차게 출근한 레온이 앞치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 앞치마 어디 있어요?”

희선이 주방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너무 낡아서 갖다버렸어요.”

“그럼 난 뭐 입고 일해요?”

“일 안 해도 돼요. 오늘이 당신 마지막 출근이에요.”

깜짝 놀란 레온에게, 희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새로 구했어요. 시장에 반찬가게 언니가 마침 가게 리모델링한다고, 당분간 와서 도와주기로 했어요. 조금 있으면 출근할 거예요.”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레온이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나 지금 잘린 거예요?”

“그동안 수고했어요. 이건 퇴직 기념 선물이에요.”

희선이 넥타이 상자를 건넸다. 평소 같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을 남자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 ‘왜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는 거죠?’ 하는 것 같은 눈길로 바라만 볼 뿐.


“…….”

그가 끝내 받지 않자 희선이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레온의 셔츠 단추를 잠가 주고, 손수 상자를 열어 넥타이를 꺼내서 매어주었다.


“이제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나서, 희선은 넥타이를 살짝 붙잡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국에도 갔다 와요. 할 일 많은데 나 때문에 계속 못 가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레온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면 대체 우리는 언제 만나죠?”

“저녁에 당신 일 끝나고, 나도 가게 문 닫고 나서 만나면 되잖아요.”

“그럼 정말 잠깐밖에 못 보잖아요!”

레온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요, 당신은 늘 그런 식이죠. 늘 나만 짝사랑하고, 늘 나 혼자만 애가 타고…….”

비를 맞아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희선은 어린 소년을 달래듯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마지막까지 꼭꼭 숨겨두었던 말을 건넸다.


“대신, 내가 호텔로 옮길게요.”

그제야 레온은 귀가 번쩍했다.


“정말이에요? 정말 와줄 거예요?”

“그래요.”

“약속하는 거예요?”

“당신 미국 출장 다녀온다고 약속하면요.”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희선을 번쩍 안아 들었다.


“세상에, 로즈!”

그대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레온을 보고, 마침 출근하던 새 아르바이트 아줌마가 화들짝 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기운도 좋으셔라!”

 

*

퇴근 후, 시현은 태하와 함께 신혼집으로 향했다.

요즘 틈만 나면 매일같이 신혼집에 들러서 어떻게 꾸밀지 상의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사실 상의라기보다 시현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가까웠지만.

오늘은 침실을 어떻게 꾸밀지 이야기 중이었다.


“창에는 새하얀 커튼을 달 거야. 늦잠 잘 수 있게 암막커튼이랑 이중으로 말이야.”

태하가 선물해 준 태블릿pc에 한바탕 메모를 하면서 시현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베개랑 이불은 그랜드호텔에서 쓰는 거랑 똑같은 걸로 하고 싶어. 그거 되게 푹신하던데, 객실 팀에 물어보면 어디 건지 가르쳐주겠지?”

팔짱을 끼고 시현이 하는 양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태하가 불쑥 물었다.


“그렇게 신나?”

“당연하지. 왜냐면 저번에는…….”

저번에는 우진 오빠네 어머니가 신혼집 다 꾸며서, 나는 내 손으로 이불 하나, 접시 한 개 골라 보지도 못했거든.

그렇게 말하려다 시현은 얼른 말을 돌렸다. 굳이 태하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하나하나 다 고를 거야.”

물론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태하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해.”

팔을 뻗어 시현을 끌어안고, 태하는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다 해.”

미국인으로 태어난 제 아버지와 달리 감정 표현이 서투른 남자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입 밖에 내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입 속으로만 가만히 속삭였다.

내 사랑.

물론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시현도 아니었다.

아직 가구도 다 들어오지 않아 썰렁하기만 한 방 안에 금세 따스한 공기가 차올랐다.


“있잖아, 저 방에. 피아노랑, 운동화랑, 뭐 그런 것들 말이야.”

넓은 가슴에 기대서 시현은 물었다.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었어?”

“당신이 속상해할 때마다 늘 생각했었어. 내가 나이만 많았으면, 돈 벌어서 다 해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시현은 깨달았다. 정작 자신보다도, 해주지 못하는 태하가 더 속상했다는 것을. 그래서 언젠가는, 하면서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겨두었다는 것을.


“이제 이렇게 어른이 됐잖아. 당연히 다 해줘야지.”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어떡하니, 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왜 없어.”

“뭐? 뭐 해줄까, 내가?”

귀가 번쩍해서 얼른 고개를 들었다가 시현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왜 그새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을 하고 있는 건데!

시현은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어, 진정해, 윤태하. 너 지금 이 시점에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안 되지.”

오늘은 호텔에서 레온과 희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늦어도 30분 후면 나가야 한다고. 부모님 기다리시게 할 거야?”

태하가 넥타이를 풀어내며 대꾸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볼게.”

“웃기지 마, 네가 퍽이나.”

“믿어봐.”

“못 믿는다고! 꺄악! 엄마!”

“여기 엄마 없어, 나 불러.”

“……!”

 

 

*

뭐든지 잘하는 남자는 다행히 운전도 잘했다. 결국은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옷매무새는 잘 가다듬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른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울을 꺼내서 다시 체크하는데, 블라우스 목깃 안쪽에 선명한 키스 마크가 눈에 띄는 바람에 시현은 기겁을 했다.


“너 이거 뭐야?”

제 목덜미를 가리키며 다그치자 태하가 민망해했다.


“미안. 너무 좋아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그나마 요 며칠 날이 쌀쌀해서, 가방에 스카프를 넣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허둥지둥 스카프를 꺼내 목에 감으며 시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한 번 체크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두고 봐. 이따 아저씨한테 다 이를 거야.”

태하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정말? 아버지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어?”

어머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던 시현은 그만 새빨개지고 말았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주먹을 쥐어 때렸지만 커다란 등짝은 언제나 그렇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을까.


“너 진짜…… 따라오지 마!”

시현은 씩씩대며 먼저 차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섰다. 잰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한식당으로 향하다, 시현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프런트에 서 있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니폼을 입은 아현이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너 잠깐 나 좀 봐.”

시현은 다가가서 아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대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자마자 손목을 내동댕이쳤다.


“미쳤니? 어떻게 계속 출근을 할 생각을 해?”

어차피 아현의 목적은 태하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인턴십 따위 그만뒀을 줄 알았는데, 계속 출근하고 있었다니. 시현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아직도 포기를 못 했니? 왜, 이번엔 고양이 말고 강아지라도 들이밀어 보게?”

반대로 아현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인정할게. 솔직히 형부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했어. 그때 언니가 형부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해서 혼자 감정 키웠고, 그러다가 빼앗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던 거 사실이야.”

아연실색해 있는 시현을 향해, 아현은 고개까지 숙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렇게 사과할게.”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한집에서 살았지만, 처음으로 듣는 사과였다.


“근데 나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어. 그렇지 않아도 뒤에서 말 많은데, 인턴십 중간에 그만두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 아니야. 사촌 언니 약혼자한테 꼬리치다 잘렸다고 소문이라도 퍼지면 나 어떻게 시집가?”

“그러게 그런 짓을 안 하면 됐겠네.”

시현이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아현은 매달리듯 말했다.


“나 이제 인턴십 얼마 안 남았어. 어차피 선배들한테 찍혀서 정규직 전환도 안 될 텐데, 그 정돈 눈감아줄 수 있잖아.”

시현이 대답이 없자 아현은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제발 남은 기간만 채우고 나가게 해줘. 응?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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