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그 여자, 왜 쫓겨났는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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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그 여자, 왜 쫓겨났는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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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그 여자, 왜 쫓겨났는지 아니?
2022.11.01.
“나 이제 인턴십 얼마 안 남았어. 어차피 선배들한테 찍혀서 정규직 전환도 안 될 텐데, 그 정돈 언니가 눈감아줄 수 있잖아.”
시현이 대답이 없자 아현은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제발 기간만 채우고 나가게 해줘. 응? 언니.”
애처롭게 매달리는 아현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현은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난 아무 힘도 없어.”
아현이 흠칫하며 시현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내가 널 자르고 붙이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언니!”
말뜻을 알아들은 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시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근데 괜한 수작 부릴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시현은 아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너한테 이것저것 수도 없이 빼앗겼었지. 하지만 더 이상은 빼앗겨 줄 생각 없어, 단 하나도.”
“…….”
“그러니까 혹시나 또 엉뚱한 생각 하고 있는 거라면 거기서 멈춰. 다음엔 뺨 한 대로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뻣뻣하게 굳어 있는 아현을 어깨로 밀치고, 시현은 그 자리를 떠났다.
“……!”
혼자 남겨진 아현이,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
레온과 희선, 시현에 태하까지 네 사람이 한식당에 둘러앉았다.
왠지 이상하게 표정이 어둡다 했더니, 한참만에야 레온은 무겁게 입을 뗐다.
“난 미국에 돌아가기로 했단다.”
태하와 시현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럼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 거라고 하셨던 말씀은 뭔가. 이미 인수한 호텔이랑 백화점은 어쩌시려는 건가. 무엇보다 이모는,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서, 열흘 후에나 한국에 돌아올 거야.”
“아버지!”
“아저씨!”
둘이서 동시에 눈을 흘겼지만 레온은 진심으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케줄을 짜봐도 도저히 그 아래로는 단 하루도 줄일 수가 없었어.”
내가 못 살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희선의 손을, 레온이 테이블 아래에서 꼭 잡았다.
“그러니까 아들, 내가 없는 동안 호텔에서 어머니 좀 모시고 있어줄래?”
“예, 아버지.”
“어떤 놈이 어머니한테 허튼 수작 걸지 못하도록 잘 지켜 드리렴.”
“걱정 마세요. 제가 어머니 곁에 꼭 붙어 있겠습니다.”
손발이 딱딱 맞는 부자를 향해 눈을 흘기던 희선이, 문득 시현에게 물었다.
“시현이는? 태하 아빠 없는 동안 시현이도 같이 지내지 않을래? 방도 넓다는데.”
시현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어차피 저희야 결혼하면 계속 붙어 있을 텐데요, 뭐. 모처럼 아드님하고 오붓하게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오랜 세월 동안 헤어져 있었던 모자가, 모처럼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데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호텔에서 지내면 아현을 또 마주치게 될 텐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 그러면 이모하고도 마주치게 될 거 아냐?’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희선이 작은어머니 가족들을 편하게 여길 것 같지 않았다.
‘역시 레온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아현이 내보내달라고 할걸 그랬나?’
시현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레온이 귀신같이 그 얘기를 꺼냈다.
“참, 아들. 웬 아가씨하고 데이트를 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태하는 아버지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고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대꾸했다.
“컨시어지에 시현 씨 친척 동생이 인턴으로 들어왔길래 셋이서 같이 식사 한번 했습니다.”
“오, 그래? 우리 시현이 친척이면 내가 신경 써줘야 하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태하가 딱 잘라 말하자 레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친척 동생인데 왜,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시잖아요. 저 작은아버지 댁하고 연 끊은 거.”
시현이 덧붙여 말하자 그제야 레온이 아차 하는 얼굴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쪽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혹시 아현 아가씨 말이니?”
희선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네. 객실 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차피 임시직 같은 거라 얼마 후면 나갈 거래요.”
“그렇구나.”
희선은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계속했지만, 시현은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희선이 가정부 일을 그만둘 때, 아현은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것일까.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옛날에 말이에요. 저희 작은어머니 댁에서 갑자기 나가게 되셨잖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일하다가 실수로, 사모님이 아끼시는 접시를 깨뜨려서. 그래서 그랬어.]
얼마 전에 물었을 때, 분명 희선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왜 이모는 나에게까지 거짓말을 했을까.
시현의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어두워졌다.
*
레온이 미국 출장을 떠나기 전날, 희선은 레온과 함께 호텔에 머물렀다.
“그때, 당신이 내 비행기 티켓을 사줬었죠.”
옛일을 떠올린 희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인터넷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서울까지 버스 타고 가서 공항에서 겨우 샀어요.”
“많이 비쌌죠?”
“어휴, 비쌌죠. 기껏해야 편도 티켓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비쌌는지,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희선은 웃었지만 레온은 따라 웃지 못했다.
“그 돈, 당신이 대학 입학금으로 쓰려고 열심히 모았던 돈이었죠.”
그 일을 떠올리면 레온은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희선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었다. 늦게라도 대학에 가고 싶다며, 그녀는 열심히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한푼 두푼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 귀한 돈을, 나 때문에…….”
오히려 희선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땐 이미 태하가 배 속에 있었으니까, 어차피 대학은 못 갔을 거예요.”
그래도 레온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태하를 갖게 한 것도 결국 자신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꿈을 펼칠 수도 있었던 여자의 날개를 꺾고, 기나긴 세월 동안 숨어 살게 만들고, 그 결과 여태 주눅 든 채로 살아가게 만들고……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내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레온을 보고, 희선은 안타까워했다.
“왜 그런 표정을 해요. 열 달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열흘 출장 가는 거 가지고.”
“그러게요, 겨우 열흘인데.”
레온은 애써 웃어 보였지만, 억지로 지어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어둑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갈 때도, 25년이 될 줄은 몰랐지요.”
희선을 남겨 두고 미국으로 간다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는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그는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진작 시현의 도움을 받아서 사놓고도, 거절당할까 봐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여태 건네지 못한 목걸이였다.
지금도 용기가 안 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거라도 걸어주지 않으면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장미 모양의 펜던트를 보고, 다행히도 희선은 홀린 듯한 눈을 했다.
“너무 예뻐요.”
그 말 한마디로, 레온은 온 세상의 보석을 모두 모아다 그녀의 발치에 갖다 바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떨리는 손으로 희고 가녀린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레온은 말했다.
“기다려줘요. 꼭 돌아올게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여자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까지라도.”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토록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세월은 이 여자의 마음 한 조각조차 흔들어 놓지 못했다.
여자의 작은 어깨에 기대어, 레온은 하염없이 울었다.
*
레온이 출장을 떠나는 날 아침. 호텔 앞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시차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한밤중이라도 괜찮으니까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전화해요.”
“알았어요. 늦겠어요, 어서 가요.”
“호텔에서 지내다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최 비서한테 얘기하면 돼요.”
“알았다니까요. 걱정 말고 얼른 가요.”
“아, 혹시 생각나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뭐든지 사갈 테니까…….”
“알았으니까 제발 좀 가라고요!”
견디다 못한 비서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회장님, 이제 정말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제야 레온은 울상을 하고 공항으로 떠났다. 그를 태운 차가 출발하고 나자 희선이 넌덜머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전쟁 나가는 군인도 저러고는 안 갔겠다.”
마침 토요일이라 배웅을 나왔던 태하와 시현은 한참 배꼽을 잡았다.
“집에 데려다줄게.”
“됐으니까 넌 어머니랑 있어. 짐 옮기는 것도 도와드려야지.”
태하와 희선을 호텔에 남겨 두고, 시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혼자서 보내는 주말. 뭘 할까, 생각하며 돌아왔는데 집 앞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어머니, 화란이었다.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 심상치 않았다. 시현은 경계심을 갖고 화란을 대했다.
“작은어머니가 저희 집엔 무슨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너 그 여자랑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 팔짱 끼고 쇼핑하는데, 누가 보면 모녀지간인 줄 알겠더라, 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역시나 백화점에서 봤던 게 작은어머니가 맞았구나. 시현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젠 제 뒤도 밟으시는 거예요?”
그나저나 희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속으로 생각하는데 화란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무섭긴 하구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따르더니, 이젠 시어머니라니.”
시현은 현기증을 느꼈다. 다 알고 온 거구나.
하기야 아현이 그랜드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마당에, 그 얘기가 화란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도 없는 거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이렇게 계속 밖에 세워둘 거니?”
대답 대신에 앞장서자 화란이 집으로 따라 들어왔다. 대충 물을 끓여서 녹차 티백을 담가 내놓자 화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집에 차가 이것밖에 없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놓은 찻잔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화란은 말했다.
“너, 파혼하고 우리 집 와서 연 끊자고 얘기했을 때 네 입으로 말했던 거 기억하니?”
“제가 뭐라고 했었죠?”
“키워준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다고 했었잖아.”
어쨌든 보육원에 보내지 않고 키워주고, 대학 등록금까지 대준 건 사실이니까 그 부분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상식적인 범위 내라면 충분히 갚을 용의가 있었다. 오히려 정리할 것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이쪽도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네요.”
순순히 시인하면서 시현은 머릿속으로 계산해보았다. 신용대출에 퇴직금 담보 대출까지 받으면 1억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화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식적인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한 20억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얼마요?”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네 남편 될 사람이 부자잖아. 기사 보니까 수천억 대 자산가라던데 그쯤이야 껌값 아니니? 너 얼마 전에 보니까 백화점에서 명품도 턱턱 사던데.”
“말이 되는 말씀을 하세요.”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더는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만 나가시라고 말하려는 순간, 화란이 말했다.
“어머니 일이 걸려 있는데 아들이 그 정도야 해 주지 않겠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서 왜 희선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시현의 심장이 불길한 소리를 낸 순간, 화란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 그때 그 여자 우리 집에서 왜 쫓겨났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꾸만 굳어지는 표정을 감추느라 시현은 애를 썼다.
“우리 집에서 일하던 김 기사, 기억나지? 운전기사 말이야.”
늘 정원 한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젊은 운전기사가 떠올랐다.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갸름하니 잘생겼던 것 같은데, 눈빛이 왠지 불량해서 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별채에 기거하며 꽤 오래 일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이 왜요?”
화란이 다리를 꼬며 대꾸했다.
“그 여자가 김 기사하고 눈이 맞아서 애를 가졌지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