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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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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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2022.11.04.
“그 여자가 김 기사하고 눈이 맞아서 애를 가졌지 뭐니.”
시현은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자 화란이 피식 웃었다.
“둘이서 몰래 다른 동네 산부인과까지 갔다가, 그만 아현 아빠 아는 사람 눈에 들키는 바람에 딱 걸렸지.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기가 차다는 듯이 피식거리는 화란을, 시현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요?”
“못 믿겠으면 가서 그 여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알 거 아니니.”
그러나 화란은 태연자약했다.
“김 기사 연락처, 내가 아직도 갖고 있는데. 뭐하면 불러다 대질신문이라도 시켜줄까?”
시현은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그래서, 그 얘길 이제 와서 저한테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사돈어른 되실 양반은 그 여자 과거를 알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듣자니 정식으로 결혼까지 한 사인 아니라던데.”
화란이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태연하게 굴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시현의 표정에서 당혹감을 읽어낸 화란이, 이윽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모르실 것 같은데, 아시기 전에 아들이 막아주는 게 낫지 않겠어? 괜히 생모가 아버지 눈 밖에 나면, 나중에 아버지 재산 물려받을 때도 곤란해질 텐데 말이야.”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시현은 겨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열흘 주마.”
화란은 핸드백에서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내서 우아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밀어놓았다.
“열흘 안에 입금 안 되면, 내가 사돈어른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
화란이 돌아간 후, 시현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레온과 재회하기 전에 희선이 했던 말을, 시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난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여태 처음 만난 순간처럼 가슴이 뛰거든.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아.]
분명 희선에게는 레온뿐이었다. 그러니까 희선이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하물며 아이까지 가졌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희선이 원치 않는 일을 강제로 당했을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여자 혼자 몸이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호소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못 믿겠으면 가서 그 여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알 거 아니니.]
화란의 자신 있는 태도로 미루어봤을 때도 그랬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레온이나 태하가 알게 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일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두 사람은 희선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감싸고, 어루만지고, 위로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선이 겪을 수치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희선은 분명 그 일을 숨기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다가 실수로, 사모님이 아끼시는 접시를 깨뜨려서. 그래서 그랬어.]
친딸처럼 생각하는 시현에게조차 그렇게 티가 나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아들에게는 오죽이나 숨기고 싶을까. 그 두 사람이 알게 되면 희선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할까.
시현은 희선의 그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이 알게 된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두 남자에게만은 절대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알게 되었다는 것조차도 희선에게는 숨기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하고, 모든 일에 두려워하고, 자꾸만 숨어들려는 경향이 강한 희선이었다.
이제 겨우 용기를 내어 한 발짝 한 발짝 세상으로 나오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녀에게, 아픈 과거를 들쑤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혼자서 무덤까지 지고 가고 싶었다.
문제는 혼자서는 화란이 요구한 돈을 구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20억 원.
레온이나 태하에게는 그다지 큰돈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일개 회사원인 시현에게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시현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레온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난 후, 희선은 정식으로 호텔로 짐을 옮겨 와서 지내게 되었다. 여태 태하와 레온이 함께 쓰던 객실이었다.
“태하 아빠 돌아오면 그땐 어떻게 하지요?”
혹시 레온이 아들을 쫓아내는 거나 아닐까, 걱정한 희선이 비서에게 물었다. 레온이 출장 가 있는 동안 붙여 준 여비서였다.
“회장님 미국 가 계신 동안에만 이 방에서 윤 대표님과 함께 지내시고, 회장님께서 돌아오시면 사모님은 이 옆에 있는 객실을 혼자서 사용하시게 됩니다.”
비서의 대답에 희선은 얼굴을 붉혔다. 바로 그 객실에서, 레온과 달콤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으니까.
“저기, 이런 방은 하룻밤에 얼마나 하나요?”
희선은 새삼스레 물었다.
“프로모션이 들어가면 많이 달라지게 되지만, 아마도 기준 금액은 이 정도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서가 귀엣말로 속삭이는 가격을 들은 희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희선을, 비서가 재촉했다.
“사모님,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추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밖에 차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 네. 죄송해요.”
희선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카레 가게 출근하는데 비서에 운전기사라니, 뭔가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 방을 나왔다.
비서와 함께 로비를 지나 정문으로 나가다, 호텔 직원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오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희선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사모님?’
늘 그녀를 쥐 잡듯 하던 시현의 작은어머니, 화란과 무척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화란은 지금쯤이면 훨씬 나이가 들었을 텐데, 눈앞의 여직원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럼…… 아현 아가씨?’
그러고 보니 아현이 이 호텔에서 일한다고 했었다. 가슴이 철렁해서 상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쳐다보았지만 chloe라는 영어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여사님?”
미소를 지으며 묻는 직원에게, 희선은 흠칫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도망치듯 돌아서는 희선의 뒷모습을, 아현이 묘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
복도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시현을 발견한 태하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태하는 얼른 잰걸음으로 다가가서 슬쩍 물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어머니하고 셋이 저녁 먹을까?”
시현은 태하의 눈조차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미안. 나 집에 일찍 가서 쉬고 싶어.”
그제야 태하는 시현의 얼굴빛이 어두운 것을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러고 보니 시현이 왠지 요 며칠 계속 기운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
마침 아버지가 출장 간 후부터 어머니가 호텔에 옮겨 와서 같이 지내게 되는 바람에, 진작 시현에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태하는 뒤늦게 후회했다.
“어제도 피곤하다고 집에 일찍 갔잖아. 무슨 일 있어?”
걱정이 되어 물었지만 시현은 고개만 저었다.
“아무 일도 없어.”
하지만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니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더욱더 걱정이 되어, 태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제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일단 꼭 안아주기부터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면 나한테…….”
“글쎄 아무 일도 없다는데 왜 자꾸 그래!”
갑자기 시현이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태하는 깜짝 놀라 시현의 팔을 놓았다. 멀리서 지나가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미안.”
그제야 시현이 사과했다. 여전히 태하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냥,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화란이 지정한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돈을 구할 길은 없었다. 시현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신혼집을 파는 것뿐이었다.
‘제정신이야?’
화가 난 태하의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돈은 둘째 치고, 그가 얼마나 정성 들여 선물해준 집인데. 화를 내도, 혹시 파혼하자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시현은 어떻게든 희선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를, 레온과 태하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하에게는 나중에 무릎을 꿇고 빌더라도 우선은 희선이 중요했다.
결국 시현은 신혼집을 팔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다행히 부동산에 상담하자 펜트하우스는 워낙 드문 매물이라 매수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시세보다 싸게 초 급매 조건을 걸면 화란이 제시한 날짜에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수자를 만나기로 한 전날 밤, 시현은 한밤중에 혼자서 신혼집을 찾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집을 꾸미고 채워 넣을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하나하나 다 해보고 싶었는데.
시현은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방문을 열었다. 피아노와, 곰인형과, 그 밖의 많은 것들과……. 태하가 그녀를 위해 갖춰 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건 집이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태하의 마음이자, 그녀를 사랑하며 살아온 그의 인생 그 자체였다.
“못 하겠어.”
곰인형을 껴안고 시현은 왈칵 눈물을 흘렸다.
“나 도저히 못 하겠어……!”
문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가도 돼?”
시현은 숨을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태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 어떻게 알고…….”
“여기 있을 것 같았어.”
조명이 어두워서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태하가 손을 뻗어 가만히 시현의 눈가를 어루만져 보았다. 물기가 묻어나자 그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정말로, 내가 도와줄 게 없는 거야?”
대답 대신 한 걸음 다가서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자 거짓말처럼 여태껏 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내가 돈이 필요해. 아주 많이 필요해.”
시현은 울먹였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그 돈을 구할 데가 없어.”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있는데.”
“나 그 돈이 왜 필요한지, 너한테 말 못 해.”
태하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시현은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냈다.
“……20억.”
“현금으로 준비하면 돼?”
그 순간, 잠시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왜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봐?”
“말 못 한다며.”
눈물범벅이 된 시현이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그래도 일단 물어는 봐야지.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20억인데. 내가 어디서 무슨 사고를 쳤을지 어떻게 알고?”
태하는 시현을 감싸 안고 진정시키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전에 내가 그냥 바쁘다고만 말했을 때, 당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뭐, 그렇게만 말했잖아.”
“그거랑은 달라. 이건 때가 돼도 말 못 해줘, 어쩌면 평생……!”
“그래도 괜찮아.”
태하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당신이 말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면 나도 굳이 듣고 싶지 않아.”
시현은 결국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살면서 어떻게든 다 갚을게.”
“…….”
“돈으로는 못 갚아도, 평생 내가 널 사랑하는 걸로 갚을게.”
“그럼 죽을 때까지도 다 못 갚을 텐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웃음기까지 묻어났다.
“늘 내가 더 사랑할 테니까.”
넓은 품 안에서, 시현은 목이 쉴 때까지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