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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위험한 상견례 (2) (118/181)


#118. 위험한 상견례 (2)
2022.11.15.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에요? 수연 씨는 어쩜 그대로네.”

“그건 옛날에 잠시 쓰던 이름이고, 원래 제 이름은 정희선이랍니다.”

희선이 잔잔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화란 씨도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화란은 충격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 옛날처럼 사모님이라고 부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씨 자 붙여 가며 이름으로 부를 줄이야.


“농담이에요, 사모님.”

다음 순간, 희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저도 이렇게 부르는 게 편하네요, 버릇이 돼서.”

“수연 씨, 아니 희선 씨도 참, 호호호.”

화란은 억지로 따라서 웃었다. 그러나 이미 굳어버린 얼굴로 짓는 웃음은 마치 경련처럼 보였다.

이어서 희선은 시현의 작은아버지인 강재호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장님,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허허, 사부인은 옛날 그대로시군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강재호는 원래 집안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딱히 희선에게 잘해준 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화란처럼 여기 닦아라, 저기 쓸어라 해가며 부려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희선은 화란에게보다도 재호에게 더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화란은 레온과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사돈 어르신. 제가 시현이 작은엄마예요.”

레온이 악수를 청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레온 케네디입니다.”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젠틀한 미소를 짓는데, 거기 있는 줄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심장이 다 팔딱거렸다.

도대체 이런 남자랑 사는 여자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나, 생각하다 화란은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옛날 자기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라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순간 화란은 말 그대로 가슴이 날카롭게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내 방 걸레질이나 하던 여자가, 어떻게 이런 남자하고!’

화란의 속마음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상견례가 시작되었다.

레스토랑 안쪽에 따로 마련된, 프라이빗한 좌석이었다. 작은집에서 아현이 빠졌기 때문에, 양가에서 각각 세 명씩 테이블 양쪽에 마주 앉게 되었다.

작은아버지 부부 옆에 앉아 있는 시현은 자꾸만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불편함에 시달렸지만, 어쨌든 상견례 자리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유. 무슨 상견례를 같은 데서 두 번을 하네, 호호.”

화란의 말에 시현은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형식상 내가 이쪽 편인데 참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시는구나.

희선과 레온은 말뜻을 알아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커버해주었다.


“아, 그때도 여기였나 보네요.”

“시현이가 우리 태하에게 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태하도 달래듯 눈빛으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잠시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프렌치에 익숙하지 않은 희선을 위해, 레온은 일일이 이렇게 먹으라고 시범까지 보여 주면서 그녀를 챙겼다.


“입에 맞아요? 소스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그런 레온의 모습에서, 화란이 내내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시현은 깨달았다.

평생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에게 깻잎 한번 떼어준 역사가 없는 양반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작은어머니가 좀 안됐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화란이 뭘 먹고 있건 말건, 재호는 일절 상관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온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다.


“저희 회사는 아성식품이라고, 주로 대기업에 납품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레온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도 일류 대기업에만 골라 투자하는 그가, 대기업의 하청업체 따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 신혼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시현 씨하고 둘이 합쳐서 마련했습니다.”

태하의 대답을 듣고, 시현은 그가 새삼 속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보태나 마나 한 1억 5천을 굳이 달라고 했던 거였구나. 남들 앞에서 내 기를 세워주고 싶어서.

물론 화란은 그 속을 헤아릴 그릇조차 되지 못했다.


“아니, 기사 보니까 자네 돈도 많다던데 굳이 벼룩의 간을 내먹었나 그래.”

태하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기더니, 시현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학자금대출 한 번을 안 시키고 대학교 학비도 다 대줬더니, 그 덕분에 돈깨나 모았나 보구나?”

그러더니 보란 듯이 어깨를 활짝 폈다.


“뉴스에서 듣자니까 우리 시현이가 자네를 어릴 적부터 키웠다던데. 어쩐지 옛날부터 용돈을 주면 금세 없다고 또 받아가고, 주면 또 금세 다 썼다고 또 받아가고 해서 이상하다, 싶더니 그 돈이 엉뚱한 데 흘러가고 있었던 줄은 미처 몰랐네.”

그제야 시현은 화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우리 돈으로 태하를 키웠다는 생색이었다. 시현은 가슴이 철렁해서 눈치를 보았다.

어찌되었거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기는 했지만, 그걸 듣고 있을 레온도 아니었다. 레온은 커트러리를 내려놓고 말했다.


“제가 제 자식을 스스로 돌보지 못해서 폐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 갚아드릴까 합니다.”

갑자기 레온이 재호를 바라보았다.


“대기업 하청 말고, 혹시 자체 브랜드로 사업을 키워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저희 회사는 미국 대형 마켓 체인에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아성식품 자체 브랜드로 미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재호가 사업 얘기를 할 때는 건성으로 듣는 것 같더니, 사실은 미리 다 생각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재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절대로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훨씬 젊은 레온에게, 재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와인을 따랐다. 그 손이 흥분에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화란의 시선이 복잡했다.

뜻밖에 남편의 사업이 대박의 기회를 맞이한 거야 물론 기쁜 일이지만, 하늘 같은 자존심에 대놓고 을이 된 기분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옛날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라면.


“자, 이렇게 두 집안이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 같이 건배 한번 하시지요.”

재호가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잔에 담긴 와인을 소주 마시듯 단숨에 마셔버리고 나서, 화란은 입술을 훔쳤다.


“참, 옛말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틀린 말 아니네. 그땐 이미 아들도 낳은 후였을 텐데, 대체 어쩌다 우리 집에서 일하게 됐던 거예요?”

희선 대신에 레온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못나서, 그만 두 사람을 다 고생시켰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태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조금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시현 씨를 만났으니까요.”

화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태하 같은 신랑감이 아현이 아닌 시현에게 간 것이 아직도 못내 아깝고 분했던 것이다.


“자네도 참, 보는 눈 없네. 나이만 먹었지 여태 철도 없는 아이가 뭐 그렇게 좋다고.”

화가 난 김에 화란은 예전에 상견례 때 했던 후려치기를 이번에도 시전했다. 하지만 그때는 마주 앉아 있는 상대가 우진의 부모였고, 이번에는 태하의 부모라는 것이 달랐다.


“시현이가 철이 없다니요?”

희선은 당장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고는, 고개를 돌려 레온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댁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그때가 김장철이었는데, 사모님이 배추 백 포기를 나한테 혼자서 다 절이라고 하셨거든요.”

형식상으로는 레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물론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하루 종일 절인 끝에 몸살이 나서 누워 있는데, 시현이가 저녁때 파스를 사다가 붙여주면서 그러는 거예요. ‘이모, 아프지 말고 빨리 나으세요.’”

재호는 화란을 노려보았고, 레온은 안타까운 듯 테이블 아래로 희선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그런데 다음 날 애가 손바닥이 온통 새빨갛게 부어서 집엘 왔어요. 왜 이러냐고 한참을 물어도 대답을 안 해요. 알고 보니까 준비물 살 돈으로 파스를 사 왔던 거지요. 준비물을 안 가져가서 선생님한테 손바닥을 맞았는데도 내가 속상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얘기를 안 했던 거예요.”

사실 시현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희선의 가슴속에는 그 일이 무척이나 아프게 남아 있었나 보다.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걸 보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커트러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태하가 손을 뻗어 살며시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른들 앞인데!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확 빼어 테이블 아래로 감추자 그가 눈빛으로 물었다.


‘많이 아팠지?’

시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별로 안 아팠어.’

둘이서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희선의 말은 계속되었다.


“시현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갔으니까, 그때 겨우 아홉 살이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철이 다 들어 있었던 아이예요, 시현이는.”

희선은 레온에게서 시선을 돌려 화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아이가 철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말씀 마세요.”

대놓고 면박을 당한 화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재호가 일부러 소리 내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사부인. 안사람이 겸손 떠느라 드린 말씀을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나 희선은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사실 오늘 저희가 굳이 이렇게 만나 뵙자고 한 것은, 아이들 결혼시키기 전에 정리할 것은 깨끗이 정리할까 해서입니다.”

시현은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 시현이는 우리 딸이라고 그쪽에다 딱 잘라 말하고 싶으신 거겠지.]

역시 태하 말이 맞았던 걸까.


“시현이는 진작 그 댁하고 연 끊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댁의 조카 아니고 저희 딸입니다.”

놀란 재호의 면전에 대고, 희선은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새끼 앞을 막아서는 어미고양이 같은 태도였다.


“남의 딸 가지고 철이 있네, 없네, 함부로 겸손 떨지 마시고 댁의 따님 철 안 든 거나 걱정하시라는 말씀이에요.”

마지막 말에 화란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것 봐요. 왜 남의 딸을 건드리고 그러실까?”

“아현이가 어릴 때도 철이 없더니, 커서도 마찬가지더군요.”

희선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화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를 보고도 인사도 않고 도리어 가정부 대하듯 아줌마, 아줌마, 해대는데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팔자 좀 고쳤다고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우리 아현이가 그쪽한테 왜 인사를 해요?”

삿대질까지 해대는 화란을 향해서 대신 싸늘하게 대답한 것은 레온이었다.


“인턴 직원이 회장 사모를 마주쳤으면 당연히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턴 직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우리 아현이가 이 호텔에서 일을 한단 말입니까?”

희선이 놀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조소했다.


“따님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시는군요?”

레온도 말했다.


“댁에 돌아가시거든 따님께 직접 여쭤보시지요.”

재호와 화란의 얼굴이 나란히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켜보는 시현은 불안감에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두 분이 자신을 위해 싸워주시는 건 고맙지만, 작은아버지 부부에게 있어서 아현은 어렵게 얻은 귀한 외동딸이었다. 그런 아현을 건드렸으니 화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나 화란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것 봐요, 수연 씨! 이젠 옛날 일은 싹 다 까먹은 것처럼 구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응?”

바야흐로 하면 안 될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작은어머니!”

시현이 주의를 주듯 강하게 불렀다. 그제야 흠칫 놀란 화란이 얼른 주위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성질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확 옛날 일을 미주알고주알 까발려서 개망신을 주고 싶었지만, 자그마치 20억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만둡시다, 그만둬. 상견례 자리고 하니까 내가 참지요.”

화란은 손을 내젓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분을 가라앉히듯 제 손으로 와인을 따라 벌컥벌컥 마셔버리는 화란에게, 희선이 물었다.


“참지 마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보시지요.”

“아유, 됐어요. 다 지난 얘기 이제 와서 끄집어내 뭐 한다고.”

“혹시 제가 김 기사 아이를 가졌던 일 말씀이신가요?”

푸웃!

방금 20억을 날려 버린 여자가, 허공에 와인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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