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위험한 상견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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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위험한 상견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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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위험한 상견례 (3)
2022.11.18.
“혹시 제가 김 기사 아이를 가졌던 일 말씀이신가요?”
푸웃!
방금 20억을 날려 버린 여자가, 허공에 와인을 뿜어냈다.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방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희선은 이 일을 죽도록 감추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레온과 태하가 다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자기 입으로…….
레온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시현을 향해 미세하게 입술 끄트머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걱정 마렴, 하고 안심시키듯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레온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긴 침묵이 흘렀다.
“…….”
방금 와인을 뿜어낸 화란이 그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가운데, 한쪽 뺨에 와인 세례를 맞은 재호가 낭패한 표정으로 냅킨으로 얼굴을 훔쳤다.
레온은 조용히 희선의 손을 잡고 있었고, 태하는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주먹은 새하얗게 손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저, 사부인.”
재호가 레온의 눈치를 보며 중재시키듯 말했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이제 자식들 나눠가지는 사이가 됐는데 다 지난 이야기는 그냥 묻어두도록 합시다.”
그 말로 시현은 깨달았다. 작은아버지도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하기야 그 일로 오랫동안 일했던 가정부와 운전기사를 동시에 내보내게 됐는데, 집주인만 모르고 있을 수도 없는 거였다.
“아뇨, 저는 말씀드려야겠어요.”
희선은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저는 댁에서 몇 년을 일했지만, 일에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김 기사님하고 따로 말 한마디 해본 적도 없어요.”
멍한 얼굴로 나이프 끄트머리만 쳐다보고 있는 화란을 똑바로 쳐다보며, 희선은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그분의 아이를 가진 적도 없고요.”
바로 그 말이 여태 굳어 있던 화란을 흔들어 깨웠다.
한순간에 20억이 날아간 것은 충격이지만, 이미 놓쳐버린 돈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더 큰 낭패를 당하기 직전이었다.
화란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응전 태세에 돌입했다.
“하, 이제 와서 발뺌을 하시겠다?”
“그때 저는 주민등록이 말소돼 있어서 아파 죽을 지경이 돼도 병원 문턱에도 못 가는 몸이었어요. 그런 제가 대체 무슨 산부인과를 가서 뭘 했다는 거예요?”
화란이 들으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주민등록이 무슨 상관이야? 불법 수술 받으러 가면서 누가 신분증을 들고 간다고!”
희선이 움찔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화란은 남편을 붙들고 동의를 구했다.
“아현 아빠, 그때 당신 친구가 똑똑히 봤다고 했잖아요. 김 기사하고 어떤 여자하고 같이 산부인과 들어가는 걸 봤다고. 그렇죠? 기억나죠?”
그러나 재호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척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정을 내며 아내의 팔을 뿌리쳤다.
“그만 좀 해! 대체 상견례 자리에서 이 무슨 망발이야?”
남편에게 매몰차게 뿌리쳐진 화란이 비참함에 입술을 깨무는 사이, 희선은 계속해서 말했다.
“친구분이 저를 봤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어떤 여자랑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수연 씨 당신이라고, 김 기사가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화란은 숫제 총알을 빗맞은 암여우처럼 날뛰었다.
“그때 김 기사한테 다 들었어. 수연 씨가 어느 날 밤부터 자기 방에 숨어들어 오더라고. 그러다가 그만 애가 생겼고, 그래서 자기가 산부인과에 데려갔었다고! 그게 다 거짓말이란 말이야?”
레온이 불쑥 말했다.
“혹시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김 기사가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득을 본다고요!”
레온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예를 들면, 그 친구분이 보았다던 어떤 여자가, 부군께 알려지면 안 되는 여자였다든가.”
재호가 움찔하며 고개를 든 순간.
희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밤중에 김 기사 방에서 사모님이 나오시는 걸, 제가 보았습니다.”
화란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핏기가 가셨다.
충격을 받은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
시현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란 가운데, 오로지 레온 한 사람만이 담담한 얼굴로 희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어요. 어차피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희선은 테이블 밑으로 레온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은 믿어주는 당신이 있으니까, 나는 말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봤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장님 출장 가실 때마다 반복이 되니까 이러다가 자칫 큰일 나겠다 싶어서 제가 더 겁이 나더라고요. 한번은 아현이가 자다가 깨서 엄마를 찾고 우는 바람에, 사모님 화장실 가셨다고 거짓말하고 대신 재워준 적도 있어요.”
새하얗게 질린 화란과는 반대로, 재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집에 살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줄 몰랐구나.’
시현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김 기사는 원래 작은어머니의 고향 후배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고용인을 대할 때와는 태도가 사뭇 다르기는 했었다.
작은어머니가 가끔씩 이것저것 과일이나 간식 같은 것도 챙겨주면서 살갑게 굴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사이였을 줄이야…….
이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 기사와 바람을 피웠던 건 작은어머니였고, 그러다 아이가 생겨 산부인과에 갔다가 하필 작은아버지 친구에게 목격을 당하는 바람에, 둘이 입을 맞춰서 희선에게 누명을 씌워 쫓아낸 것이다.
그때 화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여자를 여태 내 집에 뒀다니. 우리 아현이 알기 전에 썩 내 집에서 나가!]
안주인과 운전기사가 작당을 해서 누명을 씌웠으니, 희선의 입장에서는 항변할 길도 없었을 것이다.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
심지어 화란은 세월이 지나도 희선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당시의 일을 빌미로 삼아서 자신을 협박해 거액을 갈취하려 들기까지 했다.
옆에 앉은 화란을 바라보며, 시현은 새삼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악할 수가 있을까.
시현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아내가 옛날에 저질렀던 불륜을 이제야 알게 된 작은아버지일 터였다.
“……증거는 있습니까?”
한참 만에야 재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없어요. 없으니까 그때 제가 뒤집어쓰고 쫓겨나면서도 말하지 못했던 거고요.”
씁쓸하게 고개를 젓고 나서, 희선은 화란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게 제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요.”
“…….”
“그러니까, 서로 마찬가지예요.”
또다시 침묵이 흐른 끝에, 레온이 정리하듯 말했다.
“저는 제 아들의 어머니를 믿습니다. 그러니 사돈께서도 아내를 믿으시면 되겠습니다.”
재호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말만 들으면 얼핏 비긴 것 같았지만, 누가 보아도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레온은 여전히 희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채였고, 재호는 화란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사람으로서도, 여자로서도.
‘내가 저런 여자 따위한테!’
화란은 분노와 수치심에 금세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음식을 한참 노려보다, 재호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 부부에게는 잔인하게도, 아직 망신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몸을 일으키는 재호의 뒷덜미를, 레온의 느긋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부인께서 조카를 협박하신 건 알고 계십니까?”
“협박이라니요?”
재호가 흠칫하며 도로 자리에 앉자, 레온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네 시어머니 될 사람이 과거에 운전기사의 아이를 가졌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이 얘기를 저한테 폭로하겠다……고 한 모양이던데요.”
화란이 이를 악물고 시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그러나 시현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태하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레온이 알고 있는 건지.
재호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시현이를 협박했다고? 당신이?”
“그게, 저어…….”
“당장 똑바로 말하지 못해! 대체 뭐, 얼마를 달라고 한 거야!”
화란은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치맛자락만 꽉 틀어쥐고 있었다.
“금액은 저도 모르겠군요. 얼마였니, 시현아?”
레온의 물음에 시현은 대답을 망설였다. 결국 대답은 시현이 아닌 태하의 입에서 나왔다.
“20억입니다.”
여태 태하가 아는 것은 오로지 금액뿐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된 태하의 눈에서도 새파란 불꽃이 일고 있었다.
금액을 듣고 화란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희선은 물론, 물어본 레온마저도.
“당신, 곗돈 탔다던 게 설마 그 돈이었어? 응?”
“아니에요! 아직 한 푼도 안 받았…….”
말하다 말고 화란이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다.
재호가 참담한 얼굴로 레온과 희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도 저도 다 제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어서 재호는 시현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너한테도 면목이 없구나.”
시현은 차마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작은아버지는 앞뒤가 꽉꽉 막힌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결코 좋은 사람이라고는 하기 힘들었지만, 최소한 작은어머니처럼 뿌리부터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구박받는 시현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집에 붙어 살아가는 것이 쫓겨나서 보육원에 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결국 조카를 직접 양육하는 것은, 사업하느라 바쁜 본인이 아니라 늘 집에 있는 아내였으니까.
물론 그것이 조카를 방치한 데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 시현 역시 이제 와서 용서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현에게는 좋은 숙부가 되지 못했다 해도, 최소한 재호가 자기 아내와 딸을 위해서 평생 열심히 일해 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화란은 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가정부에 운전기사까지 두어 가며 평생 사모님으로 살았다.
그런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미안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사과에, 시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시현아. 어떻게 하고 싶니?”
이윽고 레온이 시현을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협박을 당한 건 너니까, 네 의사가 가장 중요해. 혹시 고소하고 싶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해 주마.”
레온은 스스로를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라 칭했다.
시현은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화란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들춰보아도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들. 살면서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
“그냥,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요.”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서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