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첫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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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첫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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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첫 싸움
2022.11.29.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은 날아가고 있는데 정작 비행기는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었다.
왜 속도가 이것밖에 안 되냐, 빨리 좀 날아 보라고 기장을 들들 볶은 끝에 겨우 공항에 내리면서 레온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놈의 비행기를 새로 사야겠어.’
간신히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또 호텔까지 가는 차가 느려 터졌다. 이놈의 차도 새로 사야겠다고 레온은 또 생각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호텔에 도착한 순간, 레온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저어, 회장님.”
뛰다시피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레온에게, 비서가 옆에서 같이 뛰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께서 그쪽에 안 계시다고 합니다.”
“그럼 어디 있다는 거죠?”
“그게…….”
머뭇거리는 비서의 표정에 가슴이 철렁해서 레온은 걸음을 멈췄다.
“말해요, 로즈 지금 어디 있죠?”
다그치자 비서는 다른 엘리베이터로 레온을 이끌었다. 비서를 따라가는 레온의 심장이 불안감에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복도의 풍경이 심상치 않았다.
뭐야, 문이 왜 이렇게 많아.
잠시 후 비서가 그 중 하나의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들여다보인 안쪽의 풍경에 레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 골방이나 다름없는 작은 방은?
그 방에서 희선이 웃으면서 나오는 바람에 더 기가 막혔다.
“잘 다녀왔어요?”
그러나 그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당장 말해요. 누가 감히 당신을 이런 방에다 집어넣었죠?”
누가 됐든지 당장 모가지를 날려 버리겠다. 레온이 무서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비서들과 호텔 직원들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내 발로 온 거예요. 작은 방이 편해서요.”
희선의 말에 레온은 어이를 잃어버렸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희선을 수행하고 있던 비서를 추궁했다.
“최 비서님, 어떻게 된 거죠?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비서가 대답하기 전에 희선이 막아섰다.
“비서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당신 오면 내가 직접 말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럼 객실팀이라도 보고를 했어야죠!”
직원에게 화를 터뜨렸지만, 이번에도 희선이 먼저 나섰다.
“저분들도 아무 잘못 없어요. 오히려 없는 할인까지 만들어서 해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안 되겠다. 레온은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다들 나가요.”
문이 닫히고, 이윽고 작은 방에 둘만 남았다.
“내가 이런 방에 처박혀 지내는 당신을 보자고 여태 힘들게 일하고 온 줄 알아요?”
레온은 답답한 나머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미국에서의 스케줄은 정말이지 살인적이었다. 레온은 아침부터 밤까지 30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놓고 움직였다. 그도 사람인데 왜 힘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 모든 노력들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느껴졌다. 사업을 하면 무슨 소용이고 돈을 벌어봐야 다 무슨 소용인가, 내 여자가 이런 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 방이 어때서요. 볕도 잘 들고, 아침밥도 주고, 아주 좋은데요.”
정작 그 여자는 뭐가 좋은지 생글거리고 있어서 한층 더 속이 터졌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괜히 호텔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달래듯 가만히 뻗어 오는 손을 피하며 레온은 얼굴을 굳혔다.
“당신은 내가 당신 가게에 가서 밥 달라고 하면 돈 받을 건가요? 아니면 맨밥에 카레 소스만 끼얹어서 줄 건가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것 봐요, 당신도 나한테 돈 안 받을 거잖아요. 카레에 돈가스도 얹어주고 새우튀김도 얹어 줄 거잖아요.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이러는 거죠?”
“그게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같은 거잖아요, 나는 호텔 주인이고 당신은 식당 주인일 뿐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뭐가 다르죠?”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온 세상을 다 안겨주고 싶은데, 굳이 이 작은 방에 틀어박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여자가 미웠다.
예쁘게 꾸며진 방을 보고 행복해하는, 그 얼굴 하나를 상상하며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그런 제 마음 따위, 하나도 알아주지 않는 여자가 미웠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자칫하면 소리를 치고 말 것 같아서, 그는 등을 돌려 작은 방을 나와 버렸다.
*
화를 내고 나온 것은 레온인데, 화내고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레온이었다. 결국 퇴근해서 돌아온 아들을 붙들고 하소연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란다.”
여태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전전긍긍하는 아버지를 보고, 태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 혹시 어머니랑 싸우는 거 처음이세요?”
레온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는 싸울 수도 없었어. 말이 통해야 싸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겠니.”
자리에 앉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억지로 진정시켜 소파에 앉히고, 태하는 차근차근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부담을 주기 싫으신 겁니다.”
“누가 부담스럽다고……!”
“저도 어머니 고생하시는 거 보기 싫어서,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 보내드렸거든요. 그것도 한 푼도 안 쓰고 갖고 계시다가 고스란히 다 돌려주셨어요.”
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하고 올곧은 분이에요. 저도 안타깝지만,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진작 위험한 길로 빠지셨을지 모르지요.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아들의 말이 옳았다. 젊고, 예쁘고, 팔자가 사나운 여자가 갈 수 있는 무서운 곳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의 집 가정부가 되고 식당 설거지를 할지언정, 그런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도 다 그녀의 올곧은 성격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하고 레온은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도 내 마음 정도는 좀 알아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너무 좋은 방은 부담스러워서 사양한다고 해도, 굳이 제일 작은 방에 들어갈 것까진 없지 않은가.
“어머니 계신 방이, 하룻밤에 30만 원 가까이 하던데요.”
태하가 불쑥 화제를 바꿔서, 레온은 갑자기 무슨 소린가 생각했다.
“할인을 받아도 한 달에 몇백만 원씩은 할 텐데, 그것도 어머니한테는 무척 비싼 겁니다. 그래도 아버지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만큼 내고서라도 여기 계시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레온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이 호텔에서 지내기 위해서, 그녀는 대체 하루에 몇 그릇의 카레를 팔아야 할까.
그러고 보니 아까 희선이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주말이니까 가게에 나가는 날도 아니고, 가게에서도 늘 맨얼굴로 있는 여자인데.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한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그런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예쁘다고, 보고 싶었다고 한마디 해주지도 않았다.
“그런 어머니 마음을, 아버지도 좀 알아주셨으면…….”
레온이 벌떡 일어나서 뛰쳐나갔다.
“……좋겠습니다.”
태하가 말을 맺었을 때는, 이미 레온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엘리베이터까지 느려 터졌어!
이놈의 엘리베이터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온은 내려가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다시 희선이 머무는 객실로 올라갔다.
“나예요, 레온이에요.”
아직 초저녁이라 잘 시간이 아닌데, 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안해요, 로즈.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사과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한테 실망했으면 어떡하지. 이젠 내가 싫어졌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호텔에 있기 싫다고, 도로 가게로 가버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다급한 마음에 그만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레온?”
흠칫 놀라 돌아보자 희선이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당신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레온은 희선을 와락 껴안았다. 만나지 못했던 동안에 쌓였던 그리움과 아까 화를 냈던 데 대한 미안함, 그녀가 제게 아직 질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그만 눈물샘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복도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회장님을, 당황한 희선이 얼른 방 안으로 이끌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줘요.”
“당신 잘못한 거 없어요. 나한테 잘해주려는 거 알아요.”
그녀는 커다란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냥, 내가 못난 사람이어서 그래요. 너무 크고 좋은 방에서는 괜히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서…….”
레온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호텔에 와서 지내기로 한 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사실 크게 노력한 결과라는 걸. 호텔의 높은 층고가,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이, 이 여자에게는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그렇게 생각하자 한층 더 사랑스럽고, 한층 더 미안해졌다.
“사랑해요, 로즈. 난 정말 당신뿐이에요.”
작은 여자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수도 없이 고백한 끝에야 겨우 그는 조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잠시 후, 아직도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주며 희선이 물었다.
“침대가 좁긴 한데, 자고 갈래요?”
“자고 갈래요.”
고개를 끄덕였다가 레온은 얼른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냥 올라갈게요.”
미치도록 그리웠던 여자와 왜 함께 있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도저히 손만 잡고 잘 자신이 없었다.
희선이 레온의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온이 출장 내내 목숨처럼 매고 다닌, 그녀가 선물해준 넥타이였다.
넥타이를 풀어내며, 희선이 살며시 속삭였다.
“오늘은 손만 잡고 자지 않아도 돼요.”
*
“회장님께서 오늘 사모님 계신 객실에서 머무신다고 합니다.”
회장 비서에게서 연락을 받은 컨시어지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양쪽 옆방은 비워 뒀죠?”
“예, 매니저님.”
“비서님들 계시겠지만, 우리도 복도에 한 명씩 대기하면서 혹시 소란 일어나지 않나 지켜봅시다. 두 시간마다 교대하도록 하죠.”
매니저가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해당 층에 주의할 만한 게스트는 없나요?”
“같은 라인에 어린 자녀들을 동반하신 가족이 있는데, 두 시간쯤 전에 옆 객실에서 소음 때문에 컴플레인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객실 업그레이드해서 다른 층으로 옮겨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디럭스 룸 쪽에 빈 객실 체크해보고, 가서 고객님께 안내드리도록 하세요.”
바삐 움직이는 선배 호텔리어들을 보며 아현은 속으로 조소했다.
회장 사모라는 여자가 채신머리도 없이 일반 객실에서 지내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결국은 아랫사람들만 이 난리가 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덕분에 절호의 기회가 왔다.
선배들이 정신이 없는 사이에 아현은 슬쩍 자리를 비웠다.
바야흐로 플랜 B를 실행할 때였다.
*
아현이 빠져나가고 난 직후.
“여기 윤태하라고 있습니까?”
그랜드호텔 프런트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김우진이 왔다고 하면 알 겁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