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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더 이상 용서는 없다 (125/181)


#125. 더 이상 용서는 없다
2022.12.09.



“어디서 감히 잘난 척이야! 아빠도 엄마도 없는 주제에!”

“그래, 넌 참 좋겠다.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어서.”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시현은 웃음기를 거뒀다.


“그런데, 네 아빠인 건 확실하고?”

아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지금 뭐라고…… 했어?”

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들었잖아.”

“그러니까 무슨 뜻으로 한 소리냐고.”

“가서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

“당장 말해! 무슨 소리야!”

아현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매니저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시현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런 아현을, 시현이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다음번엔 뺨 한 대로 안 넘어간다고.”

시현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눈빛에, 오히려 아현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기억해둬. 지금부터 당하는 일은 모두 네가 스스로 자초한 거야.”

아현은 등골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사촌언니인 시현은 저희 집에 얹혀사는 신세기도 했지만, 원래 타고난 성격 자체가 물렀다.

자기가 다섯 살이나 많은 언니라는 생각도 있어서인지, 웬만하면 늘 먼저 양보해주곤 했었다. 아현에게 뺏기고 또 빼앗겨도, 속상해서 입술을 깨물지언정 저렇게 독한 눈빛으로 노려본 적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이 잘해봐.”

아현과 우진을 향해 마지막 말을 던지고, 시현은 태하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

타닥타닥.

플라스틱 코팅이 타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사진이 인쇄된 종이가 우그러지며 불길에 타들어갔다.

웨딩 앨범이 불타는 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태하가 불쑥 물었다.


“아까 강아현한테 했던 말은 뭐야?”

시현은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걔가 어릴 때부터 작은아버지랑은 닮은 데가 워낙 없었거든.”

자식이라면 얼굴이 아니라도 으레 부모와 닮은 구석이 어딘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체질이라든가, 체형이라든가, 피부색이라든가, 하다못해 소설 제목처럼 발가락이라도. 하지만 아현은 작은아버지와는 신기할 정도로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상견례 자리에서 희선의 말을 듣고 나서, 자꾸만 엉뚱한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아현은 제 엄마인 화란을 많이 닮았지만, 딱 한 가지 얼굴형만은 눈에 띄게 달랐다. 화란이 약간 각진 턱이라면, 아현은 달걀처럼 갸름했다.


“김 기사 아저씨가 남자치고 얼굴이 되게 갸름했었던 게 기억나. ……꼭 아현이처럼.”

태하도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그게 증거가 되는 건 아니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자책하다 시현은 갑자기 무언가가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걔는 내 남자를 뺏으려고 했어. 꼬리치다 안 되니까 방에까지 뛰어들었다고. 난 어릴 때부터 걔한테 부모 없다는 소리 수백 번도 더 들었는데, 왜 나는 그런 말 한마디 못 해?”

“…….”

“왜 나만 못되면 안 돼? 왜 나만 늘 착해야 되냐고!”

갑자기 화를 터뜨리는 시현을, 태하는 안타까운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실 시현이 지금 화를 내는 대상은 아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제발 남은 기간만 채우고 나가게 해줘. 응? 언니.]

아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빌었을 때, 시현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사촌이라고, 그래도 같이 자랐다고, 한 가닥 남은 정을 차마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아현이 태하에게 꼬리치다 걸린 후였는데도!

이제 와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용서도 할 사람에게 했어야 하는 거였다.


“두 번 다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를 악물고 말하던 시현이, 태하를 바라보았다.


“고소, 할 거지?”

사건을 보고받자마자 레온은 호텔 법무팀을 소집해서 아현을 고소하라고 지시했다. 아현은 태하가 사용하는 객실에 침입한 것이니, 호텔과는 별개로 태하도 고소할 수 있을 터였다.


“해야지. 당신이 용서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어.”

태하가 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시현은 더욱더 용기를 얻었다.


“그때 거기 마침 그 인간이 없었어봐,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끌어 안겼다.


“그놈이 없었어도 난 속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당신하고 다른 여자를 헷갈릴 수가 있겠어.”

시현을 꼭 안고, 태하는 달래듯 등을 토닥거렸다.


“최근에 내가 제일 기분이 좋았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언젠데?”

“당신이 강아현 뺨을 때리는 걸 봤을 때였어. 아, 이제 이 여자가 좀 그만 참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시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당신은 여태 충분히 착하게 살았어. 충분히 많이 손해 보고, 충분히 많이 참았어.”

“…….”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못되게 살아. 나쁜 말 들으면 똑같이 나쁜 말로 돌려주고, 누가 상처 주면 당신도 똑같이 상처 줘. 남 걱정하기 전에 내 거 먼저 챙겨. 용서하기 싫으면 용서해주지 말고, 참지 말고 되갚아주고.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

따뜻한 품에 안겨서 시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앞으로는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살자. 그래도 태하는 나쁘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줄 테니까.

서로를 안고 있는 사이에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불이 꺼지기 전에, 시현은 앨범의 마지막 장을 찢어서 불에 넣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시현의 미소가 불길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태하가 조금 아쉬운 듯이 말했다.


“……예뻤는데.”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건 가짜야.”

사진으로 보면 무척 행복한 신부처럼 보이지만 저건 다 연출에 불과하다는 걸, 누구보다 시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포토그래퍼의 지시에 따라서 억지로 웃고는 있었지만 저 때 자신의 심정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었다.

이 남자가 또 배신하지는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마지막 사진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시현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훨씬 더 예쁘게 찍을 수 있어.”

 

 

*



“희선 씨!”

아침에 출근한 희선이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다짜고짜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화란이었다.


“제발 우리 아현이 한 번만 용서해줘요. 내가 이렇게 빌게요.”

“내가 왜 용서해줘야 하죠?”

“우리 아현이, 아직 시집도 못 간 처녀예요. 이런 흉한 일로 고소를 당하면 애 앞길은 어떻게 해요?”

아현이 벌인 일을 보고받은 레온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실수했군요. 진작 쫓아냈어야 했는데!]

그는 법무팀에 지시했다. 가능한 모든 죄목을 다 적용해서 아현을 고소하라고. 합의고 선처고 절대 없으니 사정 봐주지 말라고.

희선도 면목이 없었다. 사실 실수한 것은 레온이 아니라 그녀였다. 진작 레온이 내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을, 자신이 남은 기간은 채우고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닌가.


[아현이도 많이 반성한 것 같았어요. 사과도 받았으니까 한 번만 넘어가 줘요, 네?]

[하여튼 로즈, 당신은 너무 다정해서 탈이에요.]

레온은 영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녀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이 들어 줬던 것인데, 돌아온 결과가 이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짓이니 자기가 책임져야지요.”

희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희선 씨, 아니 사모님!”

화란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에요. 내가 못나서, 자식한테 그렇게밖에 못 가르쳤어요.”

화란은 손까지 모아 싹싹 빌었다.


“희선 씨한테 했던 짓도 내가 다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아현이만 용서해줘요.”

“나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데요?”

“그러니까, 저어…….”

“얘기해보세요. 사과한다면서요.”

화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제 입으로 털어놓으려니 차마 입이 안 떨어졌지만, 지금은 자식이 중했다.


“맞아요. 김 기사랑 산부인과 갔었던 거, 나예요.”

희선이 이를 악물었다. 그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하필 아현 아빠 친구한테 들키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딸처럼 여기던 시현을 두고, 월급도 못 받은 채 쫓겨나던 그때의 서러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희선은 어제 일처럼 가슴이 무너졌다.

그날 제게 더러운 여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냈던 그 여자가, 이제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동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희선 씨도 나 사는 거 다 봐서 알잖아요. 열 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해서 남편만 믿고 고향 떠나 왔는데, 애 아빠는 사업한답시고 밖으로 나도느라 툭하면 집에도 안 들어왔어요. 혼자 집에 남아서 시조카까지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겠어요? 같은 여자로서 좀 이해해줄 수…….”

“이해라뇨!”

희선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25년을 떨어져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한눈판 적 없었어요. 그런데 다른 남자를 집에까지 끌어들여서, 그것도 자기 자식이 있는 집에서……!”

혐오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희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해요.”

“그래요, 내가 죽일 년이에요. 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나쁜 년이라고요. 내가 희선 씨한테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요.”

또다시 손을 모아 파리처럼 싹싹 비비던 화란이, 고개를 번쩍 들어 희선의 눈치를 보았다.


“사과했으니까 이제 우리 아현이는 용서해주는 거죠? 그렇죠?”

그러나 희선은 딱 잘라 말했다.


“난 당연히 받아야 할 사과를 받았을 뿐이에요. 따님 문제랑은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알고 돌아가요.”

“희선 씨!”

끈질기게 매달리는 화란의 손을, 희선은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 서슬에 화란이 휘청거리다 그만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당신만 자식이 소중한 줄 알아? 내 자식도 소중해!”

땅바닥에 엎어진 화란을 향해, 희선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 태하! 제 엄마가 누군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남의 손에서 학대받으며 자란 애야. 우리 시현이! 당신처럼 악독한 여자 밑에서 기 한 번을 못 펴고 살았던 애야. 그 가엾은 애들이 이제 겨우 둘이서 손잡고 행복해지려고 하는데, 그걸 망가뜨리려고 했다고! 그 잘난 당신 딸이!”

화란은 몸을 일으키는 것도 잊고 놀란 눈으로 희선을 바라보았다. 가정부로 일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지난번 상견례 자리에서조차 희선은 시종일관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었다.

그런 희선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더러 그걸 용서하라고? 내가 왜! 내가 어떻게! 차라리 당신을 용서하는 한이 있어도, 당신 딸만은 죽어도 용서 못 해. 절대 못 해!”

이윽고 희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화란을 노려보았다.


“당장 돌아가요. 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땐 당신도 고소해버릴 거야.”

 

*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화란은 쓰러질 지경이 되어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가정부 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옛 불륜 상대인 김 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 그놈의 돈 타령이었다.


“돈은 무슨 돈이야, 이 미친 인간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분간 전화하지 마!”

화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홧김에 휴대폰을 내동댕이쳤다. 눈앞에 있다면 머리털을 죄다 쥐어뜯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인간이 돈 해달라고 조르지만 않았으면 시현을 협박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랬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시현에게 받아낼 20억만 믿고 미리 흥청망청 사치를 해댄 탓에 생긴 빚이 벌써 몇억에 달했다.

남편인 재호와는 상견례 사건 이후 여태 냉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딸이란 것은 대형 사고를 쳐서 그랜드호텔로부터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으니……!

정말이지 화란은 확 한강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화통이 터져서 화란은 아현의 방을 박차고 들어갔다.


“강아현! 너 어떻게 이렇게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할 수가 있어!”

“부모?”

다짜고짜 소리를 바락 지르자 불 꺼진 방에 멍하니 앉아 있던 아현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엄마아빠 딸은 맞고?”

“그럼 네가 누구 딸이라는 거야?”

“하긴,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 딸은 맞겠네.”

화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너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야!”

아현은 화란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그건 엄마가 더 잘 알겠지.”

화란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얘가 뭘 알고 하는 소린가?

대체 무슨 소리냐고 다시 캐물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현 엄마.”

화란은 한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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