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결혼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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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결혼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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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결혼 전주곡
2022.12.13.
“아현 엄마.”
등 뒤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에 화란은 새하얗게 질렸다.
“여, 여보.”
혹시 방금 아현이가 한 말을 들었나? 빠르게 표정을 살폈지만 재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잠깐 비켜봐.”
턱짓으로 화란을 물러나게 하고, 재호는 엄한 눈빛으로 아현을 바라보았다.
“아현이 너, 오늘부터 외출 금지야.”
“아빠!”
“방금 변호사 만나서 상담하고 왔다. 어떻게든 벌금형 정도로 넘어가게 막아줄 테니까, 넌 집에서 반성하면서 올해 안으로 시집갈 생각이나 해.”
딸을 향해 엄하게 말하고 나서, 그제야 재호는 화란을 바라보았다.
“그랜드호텔 건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당신은 빨리 아현이 선 자리나 찾아봐.”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화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
희선이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데,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일어나서 문을 열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로즈!”
희선은 안기는 대신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꾸만 내 방에 오면 어떡해요. 태하 보기 민망하게.”
레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희선의 방에 몰래 찾아와서 자고 갔다. 마치 줄리엣의 방에 숨어드는 로미오처럼.
“우리 아들 잠들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들어가면 모를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올라가요.”
“손만 잡고 잘게요. 그래도 안 돼요?”
“미안해요.”
시무룩해진 남자를 기어이 돌려보내고 문을 닫으며, 희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태하는 핑계고, 차마 레온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죽어도 용서 못 해. 절대 못 해!]
희선이 아까 낮에 화란을 향해 그토록 화를 낸 것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투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레온은 진작 아현을 내보내려고 했었다. 내키지 않아 하는 그에게, 남은 기간만 채우고 나가게 해 달라고 졸랐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만약에 아현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생각만 해도 희선은 등골이 서늘했다. 자칫하면 자식들의 행복을 제 손으로 망쳐놓을 뻔한 것 아닌가.
어리석은 자신을, 희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태하와 시현을 볼 면목도, 레온을 볼 면목도 없었다.
‘로즈, 이번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
레온이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면서도 그녀에게는 단 한마디도 탓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다정하고 너그럽기만 했다.
[그 아가씨는 내가 단단히 혼을 내 줄 테니 당신은 아무 걱정 말아요.]
마치 희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것이 도리어 그녀를 끝없이 비참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마치 제주도에서 손 씻는 물을 마셨을 때의 기분 같았다.
얼마 전에 이제 더는 숨지 않겠다고, 당당해지겠다고 결심한 것이 다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역시 나 같은 엄마는 차라리 없는 게 나았던 게 아닐까. 나 같은 여자가 그의 곁에 있으려고 했던 게 주제 넘는 짓이었던 거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만 같았다.
태하도, 시현도, 레온도 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들인데. 자신 혼자만이 더없이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땅굴을 파고 숨는 두더지처럼, 그새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이불 속에 파고들며 희선은 소리 죽여 울먹였다.
*
다음 날 아침, 카레 가게로 출근하는 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려는 희선을,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와서 붙잡았다. 레온의 비서인 장 비서였다.
“사모님, 제가 사모님께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한테요? 무슨 부탁이신지…….”
장 비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발 회장님께 넥타이 하나만 더 선물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넥타이요?”
“예. 브랜드나 디자인은 뭐든지 상관없습니다. 혹시 두 개 사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 사람, 넥타이 많을 거 아녜요?”
영문을 몰라 되묻자 장 비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넥타이가 백 개가 있고 천 개가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사모님이 사주신 거 하나 외에는 매지를 못하시는데요.”
희선은 당황했다.
“전 몰랐어요.”
“여태 그 넥타이 하나를 가지고 계속 관리해서 아침마다 대령하고 있습니다. 미국 출장 동안에도 매일같이 그 노릇을 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하소연을 듣고 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몇 개 더 선물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장 비서는 신이 나서 돌아갔다.
레온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생기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이 돈으로 그의 선물을 산다고 생각하니 카레 한 그릇을 팔아도 장사할 맛이 났다.
이날, 희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넥타이를 사러 호텔 옆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그나마 시현이 곁에 있어 주어서 괜찮았는데, 혼자서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명품 매장까지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에 넥타이를 샀던 매장에서 시현을 알아보고 자신까지 사모님 대접을 했던 게 떠올라서 더욱더 그랬다.
시현은 며느리가 맞지만, 자신은 사실 그의 아내가 아니지 않은가. 마치 그의 이름을 팔아 행세하는 것 같아 스스로가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희선은 저번에 넥타이를 샀던 명품 매장 앞까지 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돌아서고 말았다.
대신에 명품관이 아닌 일반 신사복 매장 쪽으로 가서 넥타이를 골랐다. 다행히 일반 매장은 명품관만큼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었고, 접객하는 직원들도 희선을 알아보지 못해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세 개나 골랐는데도 저번에 산 넥타이 한 개 값의 반밖에 안 됐다. 혹시 싸구려라고 싫어하지 않을까, 하고 움츠러드는 마음을 희선은 애써 달랬다.
‘장 비서님이 브랜드는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넥타이를 사서 내려오는데 주얼리 매장이 눈에 띄었다. 이곳도 명품 매장이 아닌 일반 주얼리 브랜드였다.
희선은 자연스럽게 옷 안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에게 목걸이를 선물 받았으니까, 나도 하나 사줘야 하는 거 아닐까.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예요?’
얼떨떨해하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무작정 사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저, 아이 아빠 선물을 사려고 하는데요.”
희선은 머뭇거리며 매장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딱히 반지를 사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남성용 액세서리라는 게 거의 시계와 반지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결국은 자연스럽게 반지가 되어 버렸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서 고른 것은 화이트 골드로 된 몸통 주위를 옐로 골드 라인으로 감싸고 있는 심플한 모양의 반지였다. 갈색 머리에 흰 피부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혹시 남편 분께서 손가락이 좀 굵으신 편이신가요?”
사이즈를 결정하느라 묻는 직원의 말에 희선은 조금 슬퍼졌다. 아이 아빠는 맞지만 남편은 아닌데.
계산을 마치고 포장한 선물을 받아들고서야 희선은 겨우 현실을 깨달았다.
‘이건 줄 수 없겠구나.’
넥타이를 받고도 그토록 좋아했던 남자가, 액세서리를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에 무작정 샀던 건데 반지는 넥타이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며칠 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차마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식의 결혼을 망쳐놓을 뻔하고 무슨 낯으로 반지를 내밀 수가 있을까. 나 같은 여자가 그의 곁에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마당에.
결국은 줄 수도 없는 선물을 산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희선은 의기소침해진 채로 호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비서들이 고생하고 있으니 일단 넥타이라도 줘야겠다 싶어서 그의 방으로 올라갔는데, 레온 대신에 그의 비서 중 한 사람이 희선을 맞이했다.
“회장님은요?”
“급하게 지방으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희선은 놀랐다. 미국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출장이라니.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아마 사흘이나 나흘 정도 걸리실 겁니다.”
“아, 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장을 갈 때마다 그토록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서 끝까지 뭉그적거렸던 남자가, 왜 이번에는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가버렸을까.
희선은 방에 앉아서 태하를 기다렸다. 그러나 왠지 태하도 오늘따라 퇴근이 늦어서,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어보았다.
“응, 태하야. 혹시 오늘 시현이하고 데이트 있니?”
없다고 하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물은 것이었는데,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대답했다.
- 어머니,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시현 씨도요.
희선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 저희 앱이 곧 출시되거든요. 앞으로 며칠 동안은 회사에서 먹고 자야 할 판입니다.
“힘들어서 어쩌면 좋니. 밥은 먹고 있어? 갈아입을 옷이라도 좀 가져다줄까?”
- 먹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옷은 비서님이 챙겨 주셨습니다.
그렇게 희선은 혼자서 쓸쓸하게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사람이라는 게 참 우스웠다. 그토록 긴 세월을 혼자서 살아왔는데, 가족이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혼자 남겨지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입맛이 없어서 저녁도 걸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레온에게서는 전화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낮에도 내내 메시지 한 통 오지 않았다. 여태 없던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생각다 못해 희선은 먼저 전화를 걸어보았다. 한참 만에야 레온은 전화를 받았다.
“당신 출장 갔다면서요.”
- 아,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어디로 간 거예요?”
- 응? 아, 여기? 여기가, 음…… 부산이에요.
“언제쯤 돌아와요?”
- 글쎄…… 한 사흘? 나흘?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돌아오는 대답 한마디 한마디가 어딘가 붕 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상태에서 건성으로 하는 대답 같았다.
그는 어느 때든지 그녀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온 시선과 신경이 늘 그녀를 향해 있었다. 희선이 다른 곳을 보다가 힐끗 레온을 바라보면 늘 눈이 마주치며 그녀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런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받는 느낌에 희선은 가슴이 다 철렁했다.
“당신 바쁜데 내가 괜히 전화했나 봐요. 미안해요.”
평소의 레온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한테 당신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놀랄 만큼이나 쿨한 것이었다.
- 그래요. 그럼 이따 자기 전에 또 통화해요.
물론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태도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희선은 고민했다.
‘혹시 어젯밤에 그냥 돌려보낸 것 때문에 화가 났나?’
하지만 별로 화가 난 목소리 같지는 않았는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도 못 자고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레온은 결국 끝까지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희선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호텔 사무동에 있는 레온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출장을 갔어도 비서가 한 사람쯤은 남아 있을 테니,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볼 셈이었다.
복도에서 비서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미국에서부터 레온의 밑에서 일하던 장 비서, 또 한 사람은 레온이 미국에 간 사이에 희선을 수행했던 최 비서였다.
“최 비서님. 빌라에는 가 봤어요? 아침은 좀 드셨던가요?”
“아뇨. 커피만 드시고 나머지는 손도 안 대고 그대로 내놓으셨더라고요.”
최 비서의 대답에 장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식사를 할 정신이 아니신가 보네.”
“어제저녁도 거르셨는데, 저러다 건강 해치실까 봐 걱정입니다.”
희선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산에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빌라는 또 뭘까.
그러고 보니 출장을 갔다면 왜 장 비서가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 비서는 절대 레온의 곁을 비우지 않는 사람인데.
“아침에 뭐 가져갔었죠?”
“크루아상하고 샐러드, 커피 준비했었습니다.”
“저녁도 거르시고 빵은 좀 그렇지. 전복죽 주문해놨으니까, 내가 가져가 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장 비서는 당부했다.
“어쨌든 절대 사모님이 아시면 안 되니까 반드시 말조심하고.”
“예.”
희선은 저도 모르게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내가 알면 안 된다는 걸까.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있자 잠시 후 장 비서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장 비서는 프런트에서 종이로 된 꾸러미를 찾아서 어디론가 향했다.
희선은 살짝 장 비서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호텔 본관 뒷문으로 나가서 5분 정도 언덕길을 오르자 별채처럼 보이는 1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별도 시설 같았다.
‘저게 빌라인가 보구나.’
몰래 뒤를 따라가면서도 희선은 설마, 하고 생각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다. 레온이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지 않을까.
“회장님, 장 비서입니다.”
장 비서가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와요.”
틀림없는 레온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