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 굴러들어온 떡 (127/181)


#127. 굴러들어온 떡
2022.12.16.



 
밤중에 희선의 방에 갔다가 그대로 쫓겨났던 다음 날.

자기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레온이 이윽고 한숨을 쉬며 펜을 저만치 내던져버렸다.


“……미치겠네.”

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요 며칠 희선이 왜 저렇게 기가 죽어 있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아현이 벌인 일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희선의 잘못이 아니었다. 못된 짓을 꾸민 본인의 탓이고, 딸을 그따위로 키워 놓은 부모의 탓이지. 그녀의 잘못이라면 그저 제 자식뻘인 아이를, 부모의 심정으로 너그럽게 봐주려던 것뿐이다.

레온은 추호도 그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희선은 원래 그렇게 마음이 약하고 동정심이 많은 여자다.

그러니까 굶고 있는 외국인을 모른척하지 못하고 카레니 뭐니 챙겨다 줬던 것 아닌가. 그녀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태하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희선은 자칫 자기가 아들의 결혼을 망쳐 버릴 뻔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레온이 봤을 때는 애초에 성공할 리가 없었던 계획이었다. 내 아들은 어둠 속이라고 해서 제 여자를 몰라볼 만한 머저리가 아니니까.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태하와 시현에게는 아무 일 없었으니까 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괘씸했는데, 이참에 제대로 혼을 내줄 수 있게 됐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여자가 저렇게 끙끙 앓고 있으니…….

꼭 동굴 안에 숨어든 다람쥐를 보는 기분에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줘야 기분이 좀 풀리려나.’

레온은 팔짱을 낀 채로 고민했다.

가진 게 이렇게 많은데 정작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호텔 수백 개의 방이 다 제 것인데, 기어이 그중 제일 작은 방에, 그것도 자기 돈 내고 들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 아닌가.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기뻐해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

무언가를 떠올린 순간, 레온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림.

그녀는 어느 때고 제 그림을 좋아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장미꽃을 살 돈이 없어서 장미를 그려 줬을 때도, 반지를 살 돈이 없어서 반지를 그려 줬을 때도, 진짜를 선물 받은 것보다도 더 환한 얼굴로 기뻐해주었다.

그래, 왜 진작 그림을 그려 줄 생각을 못 했을까.


‘너무 예뻐요!’

기뻐하는 희선의 얼굴을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레온은 당장 비서를 호출했다.


“출장을 좀 가야겠습니다.”

손깍지를 끼고 손목을 풀면서 말하자 비서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네? 갑자기 어디로 말씀입니까?”

“빌라 동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기간은 한 사흘이나 나흘 정도.”

호텔 본관 뒤쪽에 빌라 몇 채가 따로 있었다. 독립된 공간을 원하는 고객들을 위해 운영하는, 마치 별장과도 같은 분위기의 시설이었다.


“오랜만에 작업 좀 하려는 거니까, 내 미술 도구들 가져다 놔요.”

지시하고 나서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으니까, 로즈한테는 절대 비밀로.”

그제야 지시를 이해한 비서가 덩달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예, 비밀로.”

 

*

장 비서는 그렇게 말했다.


[식사를 할 정신이 아니신가 보네.]

대체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데 밥도 못 먹는 걸까. 일이라면 사무실에서 하면 될 텐데.

아무래도 희선은 그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했던 사람이, 출장 갔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자신을 피하고 있는데 도대체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젠 나한테 질린 걸까.’

하긴 제가 생각해도 그만큼 멍청한 짓이기는 했다.

자식의 결혼을 망칠 뻔하다니, 아무리 사랑해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한계치라는 걸 넘어선 게 아닐까. 겉으로는 한마디도 탓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지간히 정이 떨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와 레온 사이에 비록 태하가 있지만, 그들은 엄연히 부부가 아니라 연애하는 사이였다. 즉 마음이 변하면 어느 때든 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희선은 그가 빌라에 틀어박혀 생각하는 동안 방해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 사람도 고민이 되겠지.’

나는 그의 아들의 어머니니까. 그토록 오래도록 찾아 헤맨 여자니까. 책임감도, 물론 좋아하는 마음도 있을 테니까. 헤어지자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겠지.

일단 마이너스 방향으로 향한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만약에 태하나 시현이 곁에 있었으면 희선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어떻게든 나서서 바로잡아 줬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은 앱 출시 직전의 크런치 모드(*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 상태라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레온과는 그 후 몇 번인가 더 통화했지만 내용은 처음 통화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간단히 밥은 먹었는가, 잘 잤는가, 하면서 안부 정도만 묻고 끊는 일의 반복이었다.

희선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도 그는 그냥 얼버무리기만 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그토록 얼굴 보고 싶다고 늘 영상통화를 고집했던 남자가, 단 한 번도 영상통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희선은 점점 혼자서 결론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 헤어지고 싶은 거구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지만, 희선은 레온의 결정을 존중해주자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가 헤어지자고 말해도 웃으면서 대답하자고 결심했다.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웠어요. 앞으로는 태하 부모로서 사이좋게 지내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카레 가게를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희선은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레온은 진작 그녀가 가게를 접고 편히 쉬기를 원했다. 그걸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은,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올까 봐.

레온과 떨어져 있는 동안, 희선은 혼자서 빨래를 개듯 차곡차곡 마음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레온이 거짓 출장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이 씨, 아줌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한산한 가게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희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남자는 카레 접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더러워서 진짜, 이걸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음식 안에 짧은 머리카락이 떡하니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얼른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희선은 깊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조리할 때는 늘 머리를 단정히 묶고 위생모를 쓰는데, 어쩌다가 머리카락이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됐어, 밥맛 다 떨어졌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식사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이 아줌마가, 누굴 거지로 아나!”

그러자 남자는 더욱더 화를 냈다.


“내가 꼭 구청에 위생 불량으로 신고를 해야 되겠어? 어?”

희선은 어쩔 줄을 몰랐다. 다시 만들어준대도 싫다, 식사비를 안 받는다고 해도 싫다니 대체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아르바이트 아줌마가 쪼르르 뛰어나와서 접시를 보더니 펄쩍 뛰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어디서 사기를 쳐? 나는 꼬불꼬불 파마머리고 여기 우리 사장님은 긴 머린데 이렇게 짧은 머리가 어딨다고!”

그제야 남자가 움찔하며 당황했다.


“경찰 불러갖고 CCTV 돌려봐야 쓰겄네!”

아줌마가 달려 있지도 않은 CCTV를 들먹이며 휴대폰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남자는 어물어물거리더니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내빼 버렸다.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희선은 다리에 힘이 빠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아이 씨, 아줌마!]

방금 들은 난폭한 말이 귓가에 계속해서 이명처럼 맴돌았다.

아줌마라는 말이 딱히 욕도, 비하하는 말도 아닌데.

나이도 먹었고, 곧 장가가는 자식까지 있으니 그렇게 불리는 건 당연한 일인데.

하루 이틀 들은 말도 아닌데, 훨씬 더 젊었을 때부터 어딜 가나 그렇게 불려 왔는데.

그새 그에게서 고운 이름으로 불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로즈, 내 사랑.]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절망과도 같은 막막함이 밀려왔다.

희선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아르바이트 아줌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유, 카레집 괜찮아? 요즘 제 머리털 뽑아 넣고 진상 떠는 인간들이 있다고 뉴스에서 나오더니 저런 인간인가 보네.”

희선은 급하게 앞치마를 벗었다. 도저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언니, 죄송하지만 저 좀 가볼게요.”

“응? 장사하다 말고 갑자기 어딜 가?”

“뒷정리는 제가 내일 나와서 할게요. 언니는 그냥 문만 닫고 퇴근해주세요.”

울먹이며 말하자 아줌마는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어여 회장님한테 가 봐. 원래 놀랐을 때는 서방 품이 제일이여.”

서방이라는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니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그 사실이 새삼스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그가 내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의 아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제 와서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력이라도, 매달려라도 보지 않으면…….

희선은 정신없이 가게를 뛰쳐나갔다.

*



“아이고, 팔이야…….”

레온은 저린 팔을 주무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처음 한국어를 배우던 시절에 ‘아이고’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그림을 완성해서 희선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거의 사흘 밤낮을 잠도 최소한으로 자고 식사도 걸러 가며 작업했더니 어깨부터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심지어 희선과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출장 중이라고 거짓말을 해놓는 바람에 들킬까 봐 길게 통화할 수가 없었고, 하필 그림이 수채화라 색칠하는 도중에 전화가 오면 붓을 놓기가 힘들어서 무슨 말을 해도 죄다 건성이 되어버렸다.

채 5분도 쉬지 못하고 그는 또다시 붓을 잡았다.


“자, 이제 거의 끝났다!”

여전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눈 딱 감고 무시했다. 팔은 떨어지면 다시 붙이면 되지만 내 로즈가 속상한 건 빨리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앞으로 대충 세 시간 정도만 더 마무리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선이 카레 가게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당장 데려오라고 해서 보여 줘야지.’

마지막 남은 집중을 붓끝에 끌어모아 색칠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들려온 초인종 소리가 집중을 흩뜨려놓았다.

보나 마나 또 장 비서가 밥 먹으라고 닦달을 하러 온 게 뻔했다. 레온은 계속해서 붓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 먹습니다!”

그러나 초인종은 끈질기게 계속 울렸다. 결국 레온은 붓을 내팽개치다시피 놓았다.


“글쎄 안 먹는다니까 왜 자꾸……!”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면서 문을 열었는데, 서 있는 것은 희선이었다.


“로즈?”

레온은 기겁을 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왔지?

새하얗게 질린 희선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내가 당신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 거 알아요.”

레온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에게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아요.”

“로즈!”

날벼락처럼 이별 선언을 당한 남자는 충격에 비틀거렸다. 방금까지, 그림을 보고 기뻐할 여자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순간, 엉뚱한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나오려던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갔다.


“이제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게, 대체, 무슨…….

레온의 머릿속이 정지해버린 동안에도, 희선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될게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기어이 희선이 그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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