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 당신이었어요 (128/181)


#128. 당신이었어요
2022.12.20.



 


“내가 좋은 사람이 될게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희선이 그의 옷깃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요……!”

레온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한순간에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곧바로 천국의 꼭대기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랄까.

늘 제 쪽에서 목을 매달고 애타게 사랑을 구걸했던 여자가, 제게 매달려서 헤어지지 말자고 울며 애원하고 있는 이 상황이 끔찍하게 황홀했다. 난로 앞의 초콜릿처럼 온몸이 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당장 풀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살면서 이 여자 입에서 당신 없이 못 살겠다, 너무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일이 대체 있기나 할까.

나중에 등짝을 맞아도 좋다는 각오로 레온은 입을 열었다.


“그, 그러게 진작 좀 나한테 잘해주지 그랬어요.”

제 귀에는 무척 어색한 발 연기로 들렸지만 희선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울어서 새빨개진 토끼 같은 눈이 매달리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많이 서운하게 했어요? 네?”

자칫 여기서 눈이 마주쳤다간 그대로 와락 껴안으며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다 불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에요, 내가 당신하고 왜 헤어져요, 나는 죽어도 당신을,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레온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밤에 찾아가도 매정하게 쫓아내고.”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 정말로 안 그럴 거예요.”

레온이 끝내 외면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다가 제 손가락까지 걸면서 약속했다. 손에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데 정작 그런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침 식사 때도 그래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죠?”

가장 울화통이 터지는 부분 중 하나였다.

백번 양보해서 방이야 스탠더드 룸에서 묵는다고 치자. 그런데 자기는 일반 객실 손님이라 라운지 못 올라간다면서 조식도 일반 뷔페에서 줄 서고 있는데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안 그럴게요. 당신하고 같이 먹을게요.”

레온은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하고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레온 프랜시스 케네디, 참아야 한다. 일생에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한 끝에 그는 한껏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냈다.


“그, 가끔씩은 뽀뽀도 좀 먼저 해줄 수 있잖아요? 왜 늘 나만…….”

레온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

말하는 중간에 입술을 빼앗겼기 때문에.

처음 데이트에 나온 아가씨처럼 서툴기 그지없는 키스에, 레온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입맞춤이 이렇게나 황홀한 것이라고.

말 그대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입술을 뗀 희선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불안한 듯이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안 헤어지는 거예요?”

더는 못 버티겠다. 레온은 그녀를 와락 껴안고 동그란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이고…….”

이 작은 머릿속에 뭐 그리 복잡한 생각들이 들어 있는지, 가끔은 열어 보고 싶어진다.


“대체 내가 당신과 헤어지고 싶어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왔죠?”

“……아니에요?”

품 안의 작은 몸이 놀란 듯이 흠칫 굳어졌다.


“당신에게서 날 떼어놓느니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게 빠를 거예요.”

힘주어 대답하자 잠시 후 희선이 울먹이며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출장 갔다고 나한테 거짓말하고, 여기 숨어 있으니까……. 혼자서 뭔가 고민하고 있는 줄 알고……. 그런데 당신이 고민할 만한 거라면,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서러움이 느껴져서 레온은 제 가슴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기분을 풀어주겠답시고 꾸몄던 일이 이렇게 역효과가 나버릴 줄이야.


“미안해요.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해서 당신을 불안하게 했어요. 내 잘못이에요.”

울먹이는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레온은 사과했다.


“야단은 이따가 맞을게요. 일단 이리 와봐요.”

그는 안았던 팔을 풀고 희선의 손목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커다란 창이 있는, 채광이 좋은 방으로 데려갔다. 방금까지 그가 작업하고 있던 방이었다.

이젤에 놓인 그림을 보고 희선이 숨을 들이켰다.


“……!”

아름다운 여자가 흐드러진 장미꽃밭에 맨발로 앉아 있었다.

천사의 날개 같은 흰옷을 입고 티 없이 미소 짓고 있는 여자에게서는 한 자락의 그림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에는 오직 순수한 기쁨만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밝고, 예쁘고, 좋은 것들은 모두 다 여자의 작은 몸에 모여 빛났다.

나비조차도 꽃이 아닌 그녀의 손끝에 올라앉아 쉬고 있었다.


“요즘 당신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물끄러미 그림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델에게, 레온은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희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내 상상했듯 기뻐하지도, 감동하지도, 눈물을 글썽이지도 않았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초조한 나머지 레온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갈 때쯤에야 희선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이었어요.”

잠시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그리는 그림이어서 좋아했던 거예요.”

그제야 레온은 깨달았다.


[Me, or my painting? (나예요, 내 그림이에요?)]

자신이 아주 오래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그는 늘 그게 궁금했었다. 그녀가 먼저 반했던 것이 자신인지, 아니면 그림이었는지.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을 물어도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준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 제주도에서 다시 물었을 때도, 생각나면 말해 주겠다면서 웃기만 했었다.

그 대답이 25년 만에야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당신이 그리면 뭐든지 아름답게 보였거든요. 지긋지긋해서 늘 도망치고 싶었던 시골 동네도, 우중충하기만 한 비 오는 날도, 심술궂은 동네 할머니도…….”

희선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는 장미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요.”

레온은 정말 깜짝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미를 워낙 좋아해서 로즈라고 불렀던 건데, 이제 와서 그게 아니었다니. 아무리 말이 잘 안 통했다고 해도 그 정도였던가?


“그냥, 당신이 선물로 그려준 장미가 너무 예뻐서 그 그림을 좋아했을 뿐이에요. 그랬더니 당신이 내가 장미꽃을 좋아하는 줄 알고 매일매일 그려주더라고요.”

“아……!”

자그마치 25년 만에 밝혀진 진실에 레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신이 그린 것은 뭐든지 실제보다 아름답게 보여요. ……나도 그러네요.”

그림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희선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레온은 처음으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림보다 여기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 훨씬 더 아름다워요.”

“난 저렇게 웃지 못하는걸요.”

“아니, 당신은 원래 밝은 사람이에요. 잘 웃고, 용감하고, 다정하고…….”

그는 희선의 머리칼을 살짝 어루만지며 기억을 환기시켰다.


“기억 안 나요? 당신이 내게 먼저 다가와 줬었던 거.”

스무 살 때의 그녀는 지금처럼 소심하고 주눅 들어 있지 않았다. 수줍음은 좀 탔지만 밝고 씩씩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아가씨였다.

그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어둠에 물들여 버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나는 당신을 다시 저렇게 웃게 해주고 싶어요.”

희선이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한순간 기쁨에 찬 미소가 어렸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 아무리 애를 써도, 채 반도 담아낼 수 없었던 진짜 미소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 곁에서라면.”

레온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인 것 같은데.

왜 나는 반지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을까. 지금 당장 청혼을 해야겠는데!

아무리 겉모습이 젊어 보인다 해도 그는 벌써 40대 중반, 게다가 명문가에서 어릴 때부터 구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란 남자였다.

청혼을 하는데 도저히 결혼해달라는 말 한마디로 때울 수 없었다. 당연히 사랑하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반지를 바쳐야 했다.

원래는 장미꽃도 있어야 하지만, 사실 그녀가 장미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 그건 생략하더라도, 어쨌든 반지만은.

그나마 호텔 바로 옆에 백화점이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잠깐만, 딱 20분만 기다려줘요. 내가 지금, 나가서, 반지를……!”

당장 뛰쳐나갈 기세인 레온의 팔을, 희선이 가만히 붙들었다.


“저기, 이거.”

그녀가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당신이 사준 목걸이처럼 좋은 건 아니지만…… 받아줄래요?”

그 안에서 나온 반지를 보고 레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러면 내가 착각해버려요.”

너무 놀라서, 너무 과분해서, 레온은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꼭…… 당신이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것 같잖아요.”

“하는 거예요.”

희선이 조용히 대답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물감으로 얼룩진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는 순간, 레온이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정말 그래줄래요? 응? 진짜 내 아내가 돼줄 거예요?”

“나는 언제나 그러고 싶었어요.”

희선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로즈……!”

목이 메어 부르는 커다란 남자를 향해, 작은 여자가 발돋움을 해서 입을 맞췄다.


 

*

토요일 아침.

어제도 회사에서 밤을 새운 태하는 금세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호텔에 도착했다. 대체 며칠만의 귀가인지 기억도 잘 안 났다. 사흘인가, 아니 나흘이었던가?

사무실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는 동안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으니 어머니가 걱정하고 계실 게 뻔했다. 쓰러지기 전에 어머니 얼굴은 보고 싶어서, 그 와중에도 태하는 먼저 프런트로 향했다.


“어머니, 지금 방에 계시죠?”

확인 차 묻자 프런트 직원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께서는 객실에 안 계십니다.”

“그럼 어디 계십니까?”

“회장님하고 함께 프레지덴셜 빌라에 계신답니다.”

아니 이 양반들이, 하고 태하는 생각했다. 아들은 크런치 모드로 다 죽어가는 동안에 신혼부부 모드로 지내셨구나!

그럼 미련 없이 올라가서 쓰러져야겠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돌아보는 순간, 태하는 로비가 다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가 저만치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게 뭔지 아니?”

손가락에 낀 반지를 내보이며, 레온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약혼반지란다!”

순간적으로 피로가 확 날아갔다.


“축하드립니다!”

태하가 활짝 웃는데, 갑자기 레온이 애처로운 표정을 했다.


“이왕 가는 거, 아버지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고 싶구나. 그런데 네 엄마가, 죽어도 너희부터 먼저 결혼시켜야 한다고…….”

“딱 두 달만 주십시오.”

태하가 아버지의 말을 잘랐다.


“저희 앱 출시됐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 서비스 안정시키고, 11월 안에 결혼 준비해서, 12월 되자마자 결혼하겠습니다. 그럼 아버지도 올해 안에 가실 수 있겠지요.”

레온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역시 너밖에 없다, 우리 효자!”

레온이 두 팔을 벌려 아들의 듬직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대신 저를 물어다 줬던 황새한테 하나만 좀 전해주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의 귓가에 은근슬쩍 속삭였다.


“……저는 귀여운 여동생이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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