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신혼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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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신혼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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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신혼을 지켜라
2022.12.23.
시현을 따라서 처음으로 아들의 신혼집을 구경하러 간 날. 희선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게 집이니 궁궐이니? 집안에서 술래잡기해도 되겠다, 얘.”
“엄마는요? 엄마도 신혼집 구하셔야 하지 않아요?”
“응. 그렇지 않아도 태하 아빠도 슬슬 여기저기 보러 가자고 하는데……”
시현에 이어 새신부가 될 희선이 새삼 수줍음을 탔다.
“엄마는 어떤 집이 좋으세요?”
“글쎄, 아직 생각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큰 집은 좀 불편할 것 같아.”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까지 넓은 집은 필요 없었는데…….”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시현은 손뼉을 쳤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엄마, 저희랑 같이 사시면 어때요?”
“응?”
“따로 신혼집 구하실 거 없이, 그냥 우리 넷이 여기서 같이 살면 되잖아요.”
“어머, 얘는! 우리가 왜 신혼부부를 방해해?”
희선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양손을 다 내저었다. 어차피 예비 부부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마치 자식들만이 지켜줘야 하는 신혼이라는 것처럼 펄쩍 뛰는 것이 시현의 눈에는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다.
“집이 이렇게 넓은데 무슨 방해가 돼요. 저희는 1층 쓰고, 엄마랑 아버지는 2층 쓰시면 되죠.”
생각할수록 시현은 가슴이 설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부모와 아들이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자신 역시, 불행한 어린 시절 가운데서도 희선이 곁에 있어 주었던 시기가 그나마 가장 행복했었다. 넷이서 한집에 살면 얼마나 즐거울까.
시현은 어린애처럼 희선을 졸랐다.
“저 옛날처럼 엄마 밥 먹으면서 회사 다니고 싶어요. 네?”
사실 이건 핑계에 불과했다. 시현은 희선을 밥하는 사람 취급할 생각이 없었고, 물론 그걸 보고 있을 레온도 아니었다. 단지 희선이 자식들 밥 먹이는 문제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밥이야 얼마든지 내가 해줄 수 있지만…….”
역시나 희선도 조금씩 솔깃한 기색을 보였다.
“태하가 싫어하지 않을까?”
“태하가 왜 싫어해요,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건데 당연히 엄청 좋아하죠! 저도 엄마 아빠랑 같이 살고 싶단 말이에요. 네?”
시현은 조르다 못해 짐짓 서운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혹시 엄마는 저희랑 같이 사는 거 싫으세요?”
희선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니? 나야 꿈만 같지, 우리 아들하고 딸하고 같이 산다는데.”
“그럼 허락하신 거죠?”
결국 희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해보자.”
*
“낮에 엄마랑 신혼집 구경 갔다가 생각해낸 건데요.”
그날 저녁, 가족이 모두 모여 화기애애하게 식사하는 자리에서 시현이 얘기를 꺼냈다.
“결혼하고 넷이서 다 같이 살면 어떨까요?”
그 순간, 레온과 태하의 숟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시현이 눈을 반짝이며 태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좋다면 나야 찬성이지.”
그러나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희선도 레온을 향해 말했다.
“집이 아주 넓고 좋더라고요. 1, 2층 나눠서 살면 서로 크게 불편하지도 않을 것 같고, 아이들 일하느라 바쁜데 살림도 내가 해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요. 시현이가 아기 낳으면 내가 봐줄 수도 있고요.”
레온이 대답했다.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연륜이 있는 만큼 레온의 미소는 훨씬 더 자연스러웠으나, 그 역시 말끝이 살짝 떨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렇죠? 다들 찬성이죠?”
시현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것 봐요, 엄마. 다들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요!”
잠시 후 레온은 아들을 향해 슬쩍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데도 시현과 희선은 자기들끼리 이야기에 푹 빠져 있어서 알아채지도 못했다.
한참 만에야 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들. 아버지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고 있지?”
“저도 사랑합니다, 아버지.”
두 남자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당연하지, 신혼인데!”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두 남자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신혼의 로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밥 먹다가도 눈 맞으면 키스하고, 퇴근하자마자 번쩍 안아 들고 소파에 쓰러지고, 휴일이면 하루 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뭐 그런 것들로.
그런데 같이 살면 그런 걸 하나도 못 하게 되잖아!
태하는 젊은 만큼 뜨거웠고, 레온은 오래 기다린 만큼 절실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을 수 없었다. 설령 상대가 부모라도, 자식이라도.
그러나 두 신부는 도저히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신이 나서 커튼이 어쩌고 그릇이 저쩌고 하면서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새어 나왔다.
“이를 어쩌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고, 태하가 비장하게 말했다.
“저한테 생각이 있습니다.”
귓속말로 이야기하자 레온이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했다.
“통할까?”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결국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들. 그럼 너만 믿는다!”
*
“……그렇게 돼서 내가 무조건 빨리 가야 하게 생겼다, 이 말씀이야.”
“이야, 대박이다.”
시현이 이야기를 마치자 미주가 손을 들어 짝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내가 살다 살다 시부모님이 빨리 앞차 빼 달라고 뒤에서 빵빵거리는 케이스는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 본다.”
“좀 신기한 케이스긴 하지?”
“그래서 결혼식은 어디서 할 건데?”
“만만한 게 그랜드호텔이지 뭐. 원래는 후년까지 꽉 차 있었는데, 마침 12월 첫 주말에 취소한 커플이 생겼다고 연락이 와서 바로 잡았어.”
미주가 눈을 흘겼다.
“이야 진짜, 강시현 클래스 봐라. 만만한 게 그랜드호텔!”
“그러게, 내가 말해놓고도 살짝 재수가 없긴 하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부럽다. 우리 사촌언니가 그랜드호텔에서 웨딩 견적 내본 적 있는데, 꽃값만도 수천 들어서 포기했다고 하던데.”
“나중에 미주 씨 결혼할 때는 내가 싸게 해달라고 부탁드려볼게.”
“누구 놀려? 남자도 없는데!”
분개하던 미주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근데 본부장님하고 궁합은 봤어?”
“에이, 무슨 그런 미신을 믿어.”
시현은 웃었지만 미주는 왠지 무척이나 진지했다.
“무슨 소리야? 결혼 전에 궁합도 안 보는 사람이 어딨어?”
“……그래?”
미주가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시현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가? 원래 결혼 전에는 다들 보는 건데 나만 모르고 있었나?
“우리 큰언니 결혼할 때 갔던 데가 있거든? 사주랑 신점이랑 같이 보는 집인데 진짜 용해. 시현 씨도 가 보면 알아.”
미주는 절대 허풍을 떠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미주가 이렇게까지 장담을 하니 시현도 슬슬 솔깃해졌다.
“그렇게 잘 봐?”
“장난 아니야. 거기 예약 대기만 6개월씩 걸려.”
“에이, 그럼 텄네. 글쎄 나 올해 안으로 가야 한다니까?”
“마침 내가 6개월 전에 예약해 놓은 자리가 있거든. 이번 주말인데, 시현 씨니까 내가 양보해 준다. 나야 급할 것도 없는데 까짓 거 6개월 더 기다리지 뭐.”
“정말?”
귀가 번쩍한 시현이 물었다.
“그래, 귀한 자리니까 날리지 말고 꼭 가봐. 이왕이면 어머님 손 꼭 붙잡고 같이.”
미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렇게 해서 시현은 희선과 둘이서 점을 보러 가게 되었다.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시현은 밖에서 기다리고 희선이 먼저 들어갔다.
진하게 눈 화장을 한 무당은 희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젊어서 혼자서 애 낳고 고생을 많이 했구먼.”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온 말에 희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애 아버지 다시 만났으니 앞으로는 아무 걱정 없을 게야.”
희선은 떨리는 손으로 무당이 내민 종이에 자신과 레온의 생년월일시를 나란히 써넣었다.
“아이 아빠하고 제 사주예요.”
종이를 들여다보던 무당이 불쑥 물었다.
“자네 그 나이에 벌써 며느리를 보나?”
이쯤 되자 무서울 지경이었다.
“네, 제가 아들을 일찍 낳았거든요.”
“며느리가 아주 복덩어린데, 예쁘다고 괜히 데리고 살았다가는 큰일 나. 자칫 아들 며느리 둘 다 단명하는 수가 있어!”
단명이라니. 희선은 눈앞이 다 캄캄했다.
“그러니까 절대 자식들 끼고 살 생각 말고, 따로 살면서 자주 만나. 알겠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희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레온의 생년월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무당은 또다시 물었다.
“혹시 바깥양반이 물 건너 온 사람인가?”
“네, 맞아요!”
무당이 쯧쯧,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 양반은 우리 땅하고 영 기운이 안 맞아. 이대로 살다간 시름시름 안 아픈 데가 없겠어.”
“그럼 어떻게 하죠? 자기 나라에 돌아가야 하나요?”
희선은 다급하게 물었다. 레온이 아플 수도 있다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꼭 그럴 필요는 없고. 우리나라 사람인 자네가 기를 시시때때로 불어넣어 주면 괜찮을 거야.”
“제가요?”
“아침저녁으로 안아주고 뽀뽀도 해주고 그러라, 이 말이야.”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희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다.
여태 먹고사느라 바빠 점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무당들이 재앙을 빌미로 부적을 쓰라든가, 굿을 하라든가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 무당은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게 겨우 뽀뽀라니 이 얼마나 양심적인가?
신뢰가 한층 더 짙게 피어올랐다.
어쨌든 합가는 없던 걸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희선은 방을 물러 나왔다.
“어때요, 엄마? 잘 맞춰요?”
소곤거리는 시현에게, 희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들어가 보렴.”
시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당은 시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툭 하고 말했다.
“얌전하게 생겨서는 재주도 좋네? 한참 어린 신랑을 얻고.”
시현은 뜨끔했다. 혹시 희선이 제 얘기를 했나, 싶었지만 분명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미리 입을 맞춰 둔 터였다. 하다못해 어떤 사이인지도 얘기하지 않았을 텐데.
“저희 궁합이 어떤지 좀 알고 싶어서요.”
희선이 가르쳐 준 태하의 진짜 생년월일시와 제 생년월일시를 함께 써내자 무당이 들여다보고는 혀를 찼다.
“천생연분을 가까이에 두고 참 멀리도 돌아왔구먼, 쯧쯧. 자네 엉뚱한 남자 만나서 한참 고생했지?”
시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용하다더니 미주 씨 말이 진짜였구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겠고, 어려서 친척 집에서 고생 많이 하고 자랐겠구먼. 은행에 다니는 것 같은데 돈 만지는 일은 또 아니고…….”
무당은 시현에 대해 아예 손바닥 들여다보듯 줄줄 읊었다. 직업에다 성격,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까지 나와서 시현은 내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혹시 내 속옷 색깔도 아는 거 아냐?
“멀리 돌아서라도 제 짝을 찾았으니 앞으로 사이좋게 잘 살 거야. 단지…….”
“뭔데요?”
저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앉는 시현에게, 무당이 딱 잘라 말했다.
“시부모랑 한집에 살지만 않으면 돼. 그것만 안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
시현은 밖에 있는 희선에게 들릴까 봐 조바심을 내며 대답했다.
“저희 시부모님 엄청 좋은 분들이신데요.”
“사람이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냐, 기운이 안 맞는 게 문제지. 자칫 억지로 같이 살다가는 그 두 양반이 늘그막에 이혼수가 있어!”
어떻게 다시 만난 두 분인데, 이혼이라니!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시현은 합가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희 궁합은 괜찮다는 거지요?”
무당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너무 좋아 탈이야.”
“네?”
“남편 될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예뻐해서 자네가 많이 힘들겠단 말이야.”
겨우 말뜻을 알아들은 시현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부채로 식혔다. 희선과 같이 들어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다 자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보약을 해 먹더라도 받아줘. 단지…….”
이번엔 또 뭔가.
침을 꿀꺽 삼키는 시현에게, 무당은 딱 잘라 말했다.
“결혼식 올릴 때까지는 가까이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