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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장어가 필요 없는 남자 (130/181)


#130. 장어가 필요 없는 남자
2022.12.27.



 


“그래도 다 자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보약을 해 먹더라도 받아줘. 단지…….”

침을 꿀꺽 삼키는 시현에게, 무당은 딱 잘라 말했다.


“결혼식 올릴 때까지는 가까이하면 안 돼.”

무당의 말에 시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어, 선생님. 저희가 사실은, 그러니까…….”

벌써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눈 사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민망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시현이 진땀만 흘리고 있자 무당이 알아채고 눈을 흘겼다.


“아, 누가 그걸 몰라? 지금부터라도 꾹 참으란 말이야.”

“혹시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둘이 궁합이 좋기는 한데, 이게 부부로서 그렇다는 얘기지 부부가 아닐 때는 정반대야. 그러니까 결혼식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 전에 자꾸만 몸부터 맺어지면 오히려 기운을 해친단 말이야. 예쁜 신랑 서른도 되기 전에 골골대고 아픈 거 보고 싶어?”

“아뇨! 절대 안 되죠!”

시현은 가슴이 철렁해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식이 언젠데?”

“두 달 정도 남았어요.”

무당은 얘기 끝났다는 듯이 선언했다.


“그럼 뭐, 얼마 남지도 않았네. 그때까지만 신랑 잘 달래서 참아봐.”

 

*



“감사합니다, 선생님.”

시현이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무당이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내가 무당 노릇 30년에 이런 짓은 또 처음 해보네.”

며칠 전, 웬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 하나가 찾아와서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곧 젊은 여자 두 명이 찾아올 건데, 그들이 얼핏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자매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라는 것이었다.


[절대 같이 사는 일만은 없게 해 주세요.]

그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주면서, 아가씨는 그렇게 부탁했다.

거기다 뽀뽀니 뭐니 사소한 부탁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딱히 해가 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무당은 그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즉 자본주의에 굴복한 점괘이기는 했지만, 두 부부가 다 궁합이 찰떡이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비록 부자(父子)의 얼굴은 못 봤지만, 둘 다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는 사주가 완전히 부전자전이었다.

그뿐인가. 네 사람이 다 서로서로 합이 맞는 사람들이어서, 아마 같이 살았어도 사이좋게들 잘 살았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 다 절대 같이 안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갔으니 합가는 안 할 것이고.

그럼 각자들 깨 볶고 잘 살겠지 뭐.


“자,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오늘 장사는 이만 접고 들어가 보실까나?”

콧노래를 부르며 상 위를 정리하던 무당이, 희선과 레온의 사주가 적힌 종이를 치우려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메오메, 잠깐만.”

종이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무당이 불쑥 중얼거렸다.


“이 양반들, 사주에 자식이 하나가 아니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레온은 잽싸게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결혼을 앞두고 몸만들기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였다.

신부에게 사랑받으려면 몸이 멋져야 하지 않겠는가?

피트니스에 가기 위해 기운차게 침실을 나서다, 문 앞에 서 있는 희선을 발견하고 그는 깜짝 놀랐다.


“로즈? 아침부터 내 방에는 웬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빼앗겼다.


“……!”

놀라서 얼음이 된 레온의 목을 꼭 껴안고, 희선은 그의 입술 안으로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마치 제 기운을 나눠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후, 희선이 입술을 떼고 수줍은 듯이 말했다.


“오늘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해야 해요.”

황홀경을 헤매고 있는 남자의 귀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치 천사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아침마다 내가 올 거예요. 밤에는 당신이 내 방으로 와요.”

새빨개진 얼굴로 겨우 말을 마치자마자 희선은 등을 돌려 도망쳤다.

다리에 힘이 풀린 레온은 비틀비틀 침실로 돌아갔다. 한참 베개를 껴안고 좋아서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 응접실로 나가자 마침 건너편 침실에서 태하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 효자!”

레온은 달려가서 아들을 와락 껴안았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니? 응?”

그러나 태하는 도리어 어리둥절해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글쎄 방금 네 어머니가……!”

얼굴이 상기된 레온이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자 그제야 태하가 쿡쿡 웃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이왕 하는 김에 그 친구가 몇 마디 보탰나 보네요.”

레온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세상에 그렇게 센스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니, 당장 호텔로 스카우트 해오고 싶다!


“네 부하직원이랬지? 이름이 뭐니?”

“이미주 대리라고 합니다. 시현 씨하고도 무척 친하고요.”

“그래, 다음에 꼭 한번 데려오렴. 내가 직접 만나서 인사하고 싶구나.”

그렇게 말하고 레온은 명함을 꺼내 사인해서 내밀었다.


“이거, 그 친구에게 전해주고.”

 

*

두근두근. 태하는 설레는 가슴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키스를 받게 되었다. 그럼 나에게는 대체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 같았다.

마침 출근하다 복도에서 미주를 딱 마주쳤다.


“이미주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태하는 얼른 미주에게 눈짓을 해서 사람이 없는 회의실로 이끌었다. 괜히 시현에게 들켰다가는 큰일이니까.


“어떻게 됐어요? 합가는 취소하기로 하셨나요?”

“이따 저녁때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아마 잘될 것 같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태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신혼부부끼리 합가요? 말도 안 되죠! 저만 믿으세요.]

사실 미주는 시현과 친한 사이지 자신과 친한 게 아닌데, 사정을 듣고 흔쾌히 나서준 것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깜짝 선물도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미주가 아, 하면서 쿡쿡 웃었다.


“생각나서 덧붙여 본 건데, 마음에 드셨대요?”

“다음에 만나서 직접 인사하시겠다고, 일단 이걸 전해주라고 하시더군요.”

태하는 레온이 직접 사인한 명함을 꺼내어 미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그랜드호텔 프리패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거면 웬만한 객실이나 식당은 모두 무료로 이용 가능할 겁니다. 물론 횟수 제한 없이.”

“헉!”

미주가 눈을 빛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받으려다 말고 손을 거두었다.


“아쉽지만 제가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네요.”

“왜 그런 말을 합니까?”

태하는 영문을 몰라 미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미주는 방긋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힘내세요, 본부장님!”

 

*

그날 저녁, 네 사람은 한식당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아무래도 한번 한 말을 뒤집기가 쉽지 않아서, 시현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저어, 엄마랑 다시 상의해봤는데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여건상 같이 사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

한심해할까 봐 차마 무당이 안 된다고 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거 참 서운하게 됐구나. 무척 기대하고 있었는데.”

레온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저도 섭섭합니다. 아버지 어머니하고 꼭 같이 살고 싶었는데요.”

태하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현과 희선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합가했다가는 부모는 이혼하게 되고, 자식은 명이 짧아진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찌나 서운해하는지, 두 남자는 음식에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특히 레온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신 따로 살면서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걸로 해요.”

희선이 달랜 끝에야 겨우 분위기가 좀 진정되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건 뭐지?”

레온이 자기 접시에 담긴 장어구이를 젓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장어예요. 생선인데 미국에선 잘 안 먹죠?”

시현이 대답했다.


“일본 요릿집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어디 먹어볼까?”

레온이 장어를 집어 드는데, 갑자기 희선이 말없이 쓱 빼앗아갔다. 레온은 영문도 모르고 순순히 빼앗겨 주었다.


“아, 당신이 좋아해요? 그럼 당신 많이 먹어요.”

시현은 의아했다. 엄마가 먹을 것에 욕심을 부리는 타입이 아닌데, 왜 저러지.

그러나 빼앗아간 희선이 정작 먹지는 않고 도로 자기 접시에 슬그머니 내려놓는 걸 보고, 시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희선의 심정이 백번 이해되었다. 하기야 누구 아버지인데.

그때 태하가 장어에 손을 뻗어서, 시현은 얼른 젓가락으로 빼앗았다.


“나 줘.”

사실 시현이 빼앗은 것은 희선과는 다른 의미였다. 어차피 결혼식 전까지는 멀리해야 하는데, 괜히 쓸데없이 힘내 봐야 본인만 괴로울 뿐이니까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태하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이거 한 점 안 먹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봐?”

얼굴이 빨개지는 시현을 보고 레온이 어리둥절해했다.


“너희들 왜 그러니?”

시현이 깜짝 놀라서 제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태하는 몸을 일으켜 아버지의 귓가에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

이윽고 레온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로즈, 난 원래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는 젓가락으로 장어를 집어서 희선의 입에 넣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많이 먹어둬요.”

 

*

화란은 아현을 데리고 저녁 식사 자리에 나가 있었다. 같이 식사하는 상대는 전에 아현과 한번 선을 보았던 병원장 아들로, 그 자신도 전문의였다.

사실 조건으로만 따지면 이쪽이 기우는 자리인데, 전에 선을 봤을 때 상대가 아현에게 첫눈에 홀딱 반해서 여태 목을 매달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인데도 단둘이 만나지 않고 굳이 화란까지 끼워 넣은 것도, 나와서 제 편 좀 들어달라는 사윗감의 뜻이었다.


“어머님, 이것 좀 더 드셔 보시죠.”

벌써부터 싹싹하게 장모님 대접을 하는 바람에 화란은 모처럼 콧대가 높아졌다. 내가 딸 하나는 예쁘게 잘 낳았지.

그놈의 윤태하에게 목매달다 대형 사고도 쳤으니, 이제 마음잡고 저 좋다는 남자 중에 조건 좋은 놈으로 골라서 곱게 시집이나 갔으면 하는 것이 화란의 바람이었다.

당사자인 아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싫다고 뻗대지 않고 고분고분 따라 나와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현은 식사 중간부터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급기야 디저트가 나올 때쯤에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보다 못한 화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얘, 넌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러니? 즐거운 자린데 좀 웃지 못하고.”

“아까부터 속이 안 좋아서…… 욱!”

기어이 헛구역질까지 하는 아현을 보고 화란이 민망해했다.


“랍스터가 물이 좀 별로였나? 식중독 아냐?”

“급성 장염일 수 있습니다. 마침 저희 병원이 가까이 있으니까 같이 가시죠.”

화란이 아현을 부축하고 웃으며 일어났다.


“아유, 의사 사윗감이 든든하긴 든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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