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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지옥의 상견례 (134/181)


#134. 지옥의 상견례
2023.01.10.



 


“아, 머리야…….”

시현은 아스라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옆에서 잠들어 있는 태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어떻게 집에 왔지?’

태하에게 업혀서 술집을 나왔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그 뒤는 그냥 새까맣다.


‘계산 누가 했지? 태하가 했겠지?’

안개 속 같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태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 일어났어?”

왠지 태하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평소 태하가 시현을 바라보는 눈은 둘 중 하나였다. 그지없이 다정한 눈이든가, 아니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이든가.

그런데 이건 제3의 눈빛이었다. 얄미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가 뭐 잘못했어?”

입을 꾹 다문 채 시현을 한참 노려보다, 태하는 불쑥 말했다.


“각오하고 있어. 나도 첫날밤에 숫자 셀 거니까.”

“숫자? 뭘 세는데?”

“뭐든지 다 세어버릴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시현의 얼굴에 대고, 태하는 뜻 모를 맹세를 했다.


“두고 봐, 나는 둘까지도 못 셀 거니까.”

 

*

대체 내가 뭘 셌지?

아무리 머리를 감싸고 생각해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 와중에 친구들이 준 결혼 선물 상자에는 터무니없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상자를 열었다가 시현은 후다닥 도로 뚜껑을 닫아버렸다.

식은땀이 났다. 딱 0.1초 봤을 뿐이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예사로운 속옷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하는 요즘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입 밖에 내서 말은 안 하지만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욕구가 일면 스위치가 켜지듯 눈빛이 확 달라지는 남자인데,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그랬다.

심지어 오늘 낮에는 회의 중에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기겁을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료 넘기는 손가락이 야해 보였다나. 어이가 없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돼 있는 남자 눈에 이런 걸 보였다간 자칫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첫날밤까지는 조심조심 다뤄야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으로, 시현은 결혼식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



“아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상견례 당일.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정임의 얼굴이 모처럼 확 피어 있었다.


“그 아성식품이라는 데를 내가 좀 알아봤는데, 꽤 건실한 회사라더구나.”

옆에 앉은 아버지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전에 시현이 상견례 때 좀 유심히 볼걸. 시현이랑 닮았던가? 당신 기억나요?”

정임의 말에 운전을 하던 우진이 타박을 주었다.


“아 시현이 얘기는 왜 또 꺼내? 하나도 안 닮았어.”

“그래도 작은아버지 딸이면 피가 섞였을 텐데, 조금이라도 닮았겠지.”

“글쎄 안 닮았다니까. 엄마, 괜히 이따 시현이 얘기 꺼내지 말고 말조심해요.”

“아유, 알았어. 이건 벌써부터 마누라 눈치 보느라 바빠.”

정임이 막내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우진으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결혼은 물 건너갔고, 그나마 모아뒀던 돈도 소송비로 다 날려서 알거지가 된 마당에 팔자에도 없는 부잣집 딸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거 아닌가.

그야말로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사랑해서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아현은 어리고 예쁜 데다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그 재산이 나중에 다 누구한테 가겠는가? 없던 사랑도 생길 판이다.

이 여자를 놓치면 내 인생은 진짜 끝이다. 우진은 그런 각오로 아현을 대하고 있었다.

교외의 조용한 한정식집에서 상견례가 진행되었다.

우진의 가족들이 한껏 들떠 있는 데 비해, 마주 앉은 아현의 가족들 쪽은 비교적 차분했다. 특히 화란은 사망 선고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사돈.”

“아, 예. 잘 지내셨습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아서도, 양가 부모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멤버로 상견례를 두 번째 하는 셈이었다. 딱 한 사람, 신부만 바뀐 채로.


“참, 드라마에 나올 일이네.”

한참 만에야 화란이 혼잣말처럼 피식거렸다.


“우리 아이들이 그만큼 인연이 깊었던 거라고 생각합시다.”

옆에 앉은 재호가 점잖게 말했다.


“따님께서 아이도 가졌겠다, 식은 최대한 빨리 올리는 게 좋겠지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혼여행이나 결혼식장은 저희 쪽에서 준비할 테니, 다음 달 초쯤이 어떻겠습니까? 다행히 겨울이라 비수기여서 식장 잡기는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재호는 시종일관 딸 가진 죄인 모드였다.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딸을 데려만 가달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우진의 부모에게는 흡족하고, 화란에게는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아니, 애는 아현이 혼자 가졌나. 뭘 그렇게 착 엎드리고 그래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여유 있는 쪽이 준비하면 되는 거지.”

화란이 불평하자 재호가 꾸짖듯 말했다.


“다음 달 초면 너무 촉박하긴 한데, 배부르기 전에 식 올려야 하니 어쩔 수 없겠네요. 그렇게 하지요 뭐.”

정임은 도리어 호의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제가 아현 씨에게 정말 잘하겠습니다.”

좋다고 벙글벙글 웃고 있는 우진을, 아현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산 욕심에 덜컥 청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진짜 저 남자랑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새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나저나 애들 신혼집은 어떻게 하지요?”

“잠실 쪽에 아현이 명의로 작은 아파트를 한 채 해놓은 게 있습니다. 지금 세입자와 이사 날짜 협의 중이니, 거기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실이면 우리 우진이 직장이랑도 멀진 않겠네요. 실례지만 몇 평짜린지요?”

“24평입니다마는.”

“아유, 좁기는 하네. 애 낳으면 어디 숨이나 쉬고 살려나 모르겠네요.”

정임의 말에 또다시 화란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화란이 뭐라고 끼어들려 했지만 정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아이 낳을 때까지는 일단 저희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게 어떨까요? 귀한 손주 가졌으니 제 손으로 직접 뒷바라지도 해주고 싶고, 살림도 좀 가르쳤으면 해서요.”

아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시부모랑 같은 집에 살라고? 나더러?

재호는 흔쾌히 승낙했다.


“저희 아현이가 외동딸이 돼놔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쪼록 사부인께서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아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아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같이 살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아요. 어머님도 연세가 있으신데 쉬셔야죠.”

“아유, 마음씨도 참 곱지. 그런 걱정은 마렴. 우리 집 귀한 손자 가진 며느리 수발드는 게 뭐가 힘드니?”

정임이 그지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재호는 반대로 엄한 표정으로 딸을 꾸짖었다.


“옛날에는 시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도 다 모시고 살았어. 너더러 조석공양하면서 모시라는 것도 아니고, 아이 태어날 때까지 돌봐 주시겠다는데 감사히 여기진 못할망정 무슨 소리야?”

재호는 그냥 애초에 뿌리부터가 옛날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우진의 부모는 암요, 하면서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작정한 듯이 몰아가는 가운데, 화란 하나만이 펄쩍 뛰었다.


“난 그렇게 못 해요. 우리 아현이가 얼마나 귀한 딸인데 시집살이를 당하게 만들라고요?”

“시집살이라니요. 사부인은 제가 며느리 시집살이나 시킬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얼굴을 굳히는 정임을 향해, 화란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내가 기억을 못 하는 줄 아세요? 전에 상견례 했을 때, 시현이가 겉절이 하나 제대로 무칠 줄 모른다고 흉보셨죠? 식 올리기도 전에 남의 집 딸을 데려다가 겉절이나 무치게 만들면서 흠을 잡고 있는데, 그게 시집살이가 아니면 뭡니까?”

숨도 안 쉬고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정임은 어이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앞으로 내 딸이다, 생각하고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부인.]

그때는 천하에 우아한 척 호호거린 주제에, 제 딸 일이 되니까 이제 와서 그때 얘기를 끄집어내서 생난리를 치다니.


“아니 사부인. 듣자 듣자 하니까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아무리 세상이 변했대도 며느리가 시댁 가풍을 배우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화란이 기어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보세요, 안사돈! 아들이라고 방울 두 쪽 달랑 붙여서 장가보내는 주제에, 이건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뭐, 뭐 두 쪽?”

정임이 펄쩍 뛰었다.


 


“여보!”

재호가 제지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글쎄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 봐요!”

그러나 화란이 더욱더 큰 소리로 바락 대드는 바람에 재호도 찔끔해서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이는 서른다섯이나 먹고 집은커녕 전세금 한 푼을 못 해 오는 주제에, 잠실 아파트가 좁네, 어쨌네, 불평도 모자라서 뭐요? 가풍? 가푸웅?”

화란이 우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자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가풍을 배워 나가도 모자랄 판에, 감히 얻다대고!”

우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오해십니다, 어머님. 저는 절대 합가할 생각 없습니다!”

“됐고, 혼사고 뭐고 다 없던 일로 하세. 내가 내 딸을 그냥 처녀로 늙혀 죽이는 한이 있어도 이런 막돼 처먹은 집안에는 못 보내겠네. 가자, 아현아.”

“엄마?”

오히려 아현이 당황한 듯 눈치를 보았지만, 화란이 강제로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당장 나오지 못해?”

결국 아현이 화란의 손에 질질 끌려나가고, 재호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아현 엄마!”

아현의 가족들이 나가고 나자, 우진이 제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미쳤어?”

살기 어린 눈빛에, 정임이 찔끔했다.

*



“아현 엄마!”

씩씩거리는 화란을, 재호가 식당 앞마당까지 따라 나와 붙들었다.


“아현이 넌 잠깐 저리 좀 가 있어봐.”

일단 아현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재호는 어떻게든 화란을 설득하려 애썼다.


“당신 정말 왜 이래? 전에는 저 친구 마음에 든다고 했었잖아?”

외동딸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화란이었다. 지난번 태하네 집안과의 상견례 이후로 내내 주눅이 들어 있던 화란이지만, 이렇게까지 성이 나 있자 재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건 시현이 짝이었을 때죠!”

화란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신도 눈이 있으면 좀 봐요! 저 남자가 우리 아현이한테 가당키나 한가!”

그때 우진을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시현의 신랑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 볼 일 없을수록 흡족했던 것이다.

이제 그 남자를 아현의 옆에다 데려다 놓으니 문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키가 큰가, 나이가 젊은가, 얼굴이 잘났나, 돈이 있길 한가. 어디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없는데, 심지어 시어머니 자리는 완전히 사이코였다.

사실 저번에 상견례를 할 때도 며느리 부려먹으려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지만, 시현이 시집살이를 당할 거야 제 알 바 아니니 알고도 모른 척했었는데.

그 시집살이가 돌고 돌아서 이리로 떨어질 줄이야!

성질 같아서는 당장 아현을 병원으로 끌고 가서 혼사고 뭐고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만, 이 벽창호 같은 남편이란 인간이 이미 작정을 하고 딸을 돈으로 구워삶아 놓았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화란은 재호에게 마구 분노를 퍼부었다.


“진짜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아현이가 당신 딸이라도 이럴 거냐고요!”

헙. 뒤늦게 말실수를 눈치챈 화란이 허둥지둥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뭐?”

재호가 되물었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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