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악연의 끝
(141/181)
141. 악연의 끝
(141/181)
#141. 악연의 끝
2023.02.03.
“엄마. 혹시 아빠가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
공장장이 나가고, 한참 만에야 아현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너 잘 들어.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화란이 딸의 어깨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맞췄다.
“우리 아직 망한 거 아니야. 아직 이 집이 있고, 네 아파트도 있잖아. 그것들만 지켜도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어.”
“이 집은 아빠 명의잖아. 차압 들어오면 어떡해?”
“그전에 얼른 명의 돌려놔야지. 빚쟁이들 들이닥치기 전에 보석이니 금붙이니 돈 될 만한 거 다 챙겨서 빼돌리고.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단 말이야.”
화란이 이를 악물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화란은 벌써 재호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열 살 많은 남편은 화란에게 있어 말하자면 돈 버는 기계 같은 존재였다. 망가진 거야 안타깝지만, 원래 기계란 돌아가지 않게 되면 효용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럼 내 결혼은?”
“당연히 없던 걸로 해야지. 차라리 잘됐어. 아직 초기니까 얼른 애부터 지우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란은 화들짝 놀랐다. 아현도 눈이 커다래져서 흠칫 고개를 들었다.
“결혼을 엎다니요?”
정임이 저승사자 같은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
그제야 여태 안마의자와 합체해 있던 정임의 존재를 떠올린 모녀가 나란히 굳어졌다.
*
그 시각, 우진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아, 새끼 진짜 능력 장난 아니네.”
“청첩장까지 돌리고 엎었다고 한 게 어제 같은데, 해도 바뀌기 전에 다른 여자한테 장가를 가?”
친구들이 방금 받은 청첩장을 펼쳐보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예전 제수씨랑은 어떻게 된 거냐?”
“그러게. 그 제수씨가 진짜 사람 진국이었는데.”
“솔직히 말해봐. 네가 새 제수씨랑 바람피운 거지? 어?”
“오래 사귄 여친 버리고 어린 여자한테 넘어간 거네, 의리 없는 새끼.”
“하, 이런 자식은 천벌을 받아야 되는데.”
바람을 피운 것은 맞지만 상대가 아현은 아니었고, 또한 그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니들이 뭘 알아, 새끼들아!”
우진은 벌컥 화를 내고는 위스키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사실 결과만 놓고 따져 보면 전화위복이었다. 시현보다는 아현이 어느 모로 보아도 훨씬 나은 신붓감 아닌가. 일곱 살이나 어린 부잣집 외동딸이 잠실에 아파트까지 해 오는데, 자다가 로또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쯤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네가 떠오르는지.
왜 자꾸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지는지…….
“비싼 거 먹어, 자식들아. 양주 시키라고, 어? 안주도 더 시키고.”
우진은 분풀이를 하듯 큰소리를 땅땅 치며 돈을 써댔다.
“어쨌든 이왕 가는 거, 잘 살아라 새끼야.”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잔을 들었다.
“건배 한 번 할까? 김우진 쓰레기의 행복한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그러나 잔이 부딪치기 직전에 전화가 울렸다. 우진은 친구들에게 눈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 너 거기 어디야!
정임이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고막이 다 얼얼했다.
“나 오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술 먹는다고 했잖아. 청첩장 나눠주려고…….”
- 네가 지금 청첩장 뿌릴 때야? 그 결혼 물 건너가게 생겼어, 이놈아!
“뭐?”
우진은 심장이 멈출 정도로 놀라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길게 말할 거 없고, 당장 이리로 튀어와!
*
술자리를 박차고 나온 우진은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아현의 집으로 달려갔다.
도착하자 성난 고함 소리가 정원까지 새어 나왔다.
“예단이니 예물이니 실컷 다 받아 처먹고 이제 와서 뭐가 어째? 결혼을 엎어?”
“어디서 피해자인 척이야? 내 딸 몸 상한 건 생각 안 해?”
헐레벌떡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정임과 화란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고, 아현은 조금 떨어져서 관자놀이를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우진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현에게 다가갔다.
“아현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예?”
“내가 알아요?”
아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더 이상 진행해 봐야 의미 없어요. 어차피 우리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만 정리하고 각자 갈 길 가죠.”
영문을 모르는 우진은 일단 닥치고 싹싹 빌고 보았다.
“아현 씨,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내가 잘할게요. 예?”
그러는 사이에도 화란과 정임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회사 망해서 알거지 됐다며? 이미 들어간 예단비는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응?”
“누가 지지리 못사는 집구석 아니랄까 봐 푼돈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굴긴. 아 갖고 가서 반품하면 될 거 아니야?”
“여태 실컷 휘두르고 다닌 걸 어떻게 반품을 하라고!”
마치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경연이라도 하는 사람들 같았다.
“맨손으로 겉절이 무쳐대느라 망가진 내 손은 어떻게 해줄 거고!”
정임이 고함을 지르며 제 손을 화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란의 생일날, 맨손으로 고춧가루 양념을 만지는 바람에 벌겋게 화상을 입은 손이 여태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화란이 코웃음을 치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원래도 돼지 족발 같았던 손을 나더러 어쩌라고 난리야?”
“뭐?”
정임의 눈이 휙 돌아갔다. 달려들어 우악스레 화란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화란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보?”
죽으러 갔다던 사람이 멀쩡히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임도 재호를 보고 놀라서 얼른 화란을 붙잡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당신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화란이 얼른 달려가서 호들갑스레 재호를 살피는 척을 했다.
“대체 어디 있었어요. 응? 아현이하고 나하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그런 화란을 싸늘히 바라보다, 재호는 툭 하고 내뱉었다.
“당신하고 나하고는 여기까지야. 내일 아침까지 짐 싸서 나가.”
화란이 펄쩍 뛰었다.
“아니,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란 말이에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친정으로 가든지, 아니면 김 기사한테 가든지.”
김 기사라는 말에 화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 또 그 소리예요? 왜, 또 그 가정부 년이 뭐라고 합디까? 예?”
아현도 화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아빠.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재호가 시선을 돌려 아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아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원래도 그리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마치 물건을 바라보듯 무감한 눈빛은. 도저히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현이 너도 네 엄마랑 같이 나가.”
덜컥 겁이 난 아현은 입술을 떨었다.
“뭐야, 갑자기 어디로 가라는 거야. 아직 잠실에 세입자도 안 나갔는데…….”
“그 집은 조만간 증여 취소 소송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허옇게 질린 우진이 매달리듯 말했다.
“아버님! 그럼 저희 신혼집은 어떡합니까?”
“알아서 하게. 둘이 아이를 낳건 말건, 결혼을 하건 말건 이제 나하곤 상관없는 일일세.”
아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언제는 결혼해서 아이만 낳으라더니 이제 와서 뭐?
“아빠 대체 왜 그래? 미쳤어?”
대답 대신에 재호가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내밀었다.
- 유전자감정서
맨 윗줄에 쓰인 제목을 보고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맨 마지막 줄에 이른 순간 그대로 멈춰버렸다.
- 감정결과: 의뢰인 A (강재호)와 의뢰인 B(강아현)은 친생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이를 든 아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네 아빠인 건 확실하고?]
시현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현은 혹시나, 하고 생각했었다. 짚이는 데가 있긴 했으니까.
옛날부터 엄마는 자신에게조차도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몰래 누군가와 통화하다 아현을 보고 화들짝 놀라 끊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늘 이상할 정도로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갖다 바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만 왜 이렇게 맨날 돈이 없어? 어디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냐?]
언젠가 아현이 장난삼아 물었을 때, 화란은 필요 이상으로 정색을 하고 화를 냈었다.
[미친 계집애가,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그래도 설마하니 진짜로 자신이 엄마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워 낳은 아이일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시현이 저를 모욕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빠 딸이 아니라고……?’
아현은 뻣뻣해진 눈을 들어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진짜야? 진짜로 내가 김 기사 아저씨 딸이야?”
아현이 내민 문서를 본 화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현아…….”
“말해보라고! 진짜 엄마가 바람피워서 나 낳았냐고!”
아현이 고함을 질러도 화란은 고개도 못 든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래도 30년 가까이 키운 정이 있어서 너만은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고 했는데…….”
아현을 향해 말하는 재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착잡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모든 미련을 끊어낸 사람의 표정이었다.
“부녀의 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자.”
이윽고 재호가 시선을 돌려 화란을 바라보았다.
“뻐꾸기 새끼 들여서 30년 가까이 키워 준 것도 치가 떨려. 내일 아침에 내가 돌아왔을 때까지 그대로 있으면 강제로 끌려나갈 줄 알아.”
최후통첩처럼 내뱉고 재호가 등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정임이 달려들어 화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이 더러운 여편네가!”
사실 원래부터 힘으로는 날씬한 화란이 퉁퉁한 정임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정임이 악귀처럼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머리채를 쥐어 잡고 흔드는 동안, 화란은 반항도 못 한 채 그저 당하고만 있었다.
“감히 서방질을 해서 낳은 딸년을 멀쩡한 내 아들한테 시집을 보내려고 해?”
“아악!”
“내 아들 인생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응?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곱게 손질한 머리카락은 우악스런 손길 앞에 속수무책으로 쥐어뜯겨 나갔다. 우진은 제 엄마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갑자기 아현의 손을 잡아다가 거칠게 반지를 빼냈다.
“악!”
아현이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우진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기어이 반지를 빼앗은 남자가 아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똑바로 말해. 배 속에 있는 그 애, 내 자식 맞아?”
“……!”
“너도 다른 놈 자식을 나한테 덤터기 씌우려고 한 거 아니냐고!”
비틀거리던 아현은 기어이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마치 악몽 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쓰러지는 아현을 보고, 여태 머리채를 잡혀 있던 화란이 비명을 질렀다.
“아현아!”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끝내 돌아보지 않는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