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위기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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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위기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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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위기일발
2023.02.07.
주말에 태하와 시현의 결혼식을 앞두고 맞이한 월요일.
사무실에서는 동료들이 한바탕 곤욕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이고, 강시현이 결혼식 때문에 아주 여기저기서 연락을 해대고 난리도 아니야. 대체 같은 부서인 건 어떻게들 알았는지 원.”
팀장이 진저리를 치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증언이 흘러나왔다.
“저도 기자라는 사람한테 연락 받았어요. 결혼식 초대장을 백만 원에 팔라면서 어찌나 끈질기게 구는지.”
“저한테는 무슨 유튜버가 자꾸 연락하더라고요. 애인인 척하고 결혼식에 데려가 주면 이백만 원 주겠다던데요? 살짝 혹했네.”
“의리냐, 돈이냐, 고민 때리다가 눈물을 머금고 의리를 택했네. 잊으면 안 된다, 시현 씨?”
듣고 있던 시현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이참에 청첩장 팔아서 부자 돼볼 걸 그랬나 봐요.”
“아이고, 있는 사람이 더하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그렇게 부잔데 그래도 모자라?”
“에이, 제 돈은 아니잖아요.”
한참 웃고 떠들다가 시현이 문득 미주에게 물었다.
“미주 씨, 이따 저녁에 혹시 시간 괜찮아?”
왠지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던 미주가 뒤늦게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응? 뭐라고?”
“아빠랑 엄마가 결혼식 전에 미주 씨랑 따로 인사하고 싶다고,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자고 하셔서. 오늘 안 되면 내일도 괜찮고.”
“아, 아냐. 오늘 돼.”
대답하는 미주의 얼굴이 왠지 하얗게 굳어져 있어서 시현은 걱정이 되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주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
결혼식을 며칠 남겨 두고 희선의 낌새가 이상했다. 왠지 자꾸만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저녁식사 약속 때문에 객실에서 둘이서 미주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힘들게 꺼낸 말이 이랬다.
“저기 말이에요, 당신은 아주 부자라고 했죠?”
도대체 이 여자는 몇 살이 되면 그만 좀 귀여울까. 레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죠?”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서요.”
호텔에 근무하는 룸메이드 전원을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레온은 내심 놀랐다. 이 나이에 웨딩드레스 입기 부끄럽다면서 결혼식도 하기 꺼려 했던 여자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나도 옛날에 룸메이드로 일했었잖아요. 정말이지 몸 갈아 넣으면서 하는 일이에요.”
눈치 빠른 레온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희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호텔 안주인으로서 그분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은 거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희선은 또 그의 눈치를 보았다.
“물어보니까 한 150명 정도 된다던데, 다 초대하면 결혼식 비용이 너무 많이 늘겠죠?”
레온은 짐짓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뭐 부탁하지 말아요.”
그리고 희선의 얼굴이 빨개지기 전에 덧붙였다.
“당신은 그냥 하라고 지시만 하면 돼요.”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하다못해 호텔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해도 입에다 쏙 넣어줄 텐데.
“정말이에요?”
귀가 쫑긋한 표정을 하는 걸 보면 결혼식 초대 건 외에도 또 뭐가 있나 보다.
“정말 내가 해달라고 하면 뭐든지 들어줄 거예요?”
레온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요. 뭐든지.”
그러나 희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뭔데 그래요?”
“이런 식으로 가볍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지금 말해 보라고 몇 번을 캐물어도 고집스레 고개를 젓는 것이, 자기 딴에는 꽤나 어려운 일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뭐든지 레온은 들어 줄 자신이 있었지만, 희선이 워낙 조심스러워하니 장난기가 일었다.
“혹시 당신이 둘째라도 가지면, 정말로 뭐든 들어줄 텐데.”
은근슬쩍 속삭이자 희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 말이에요. 전부터 자꾸 그런 소리 하는데 설마 진심인 건 아니죠?”
“농담처럼 들렸어요?”
정색을 하고 되묻자 희선이 아무도 없는 주위를 새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 나이에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요?”
“태하는 딱 잘라 말하던데요? 여동생이 좋다고.”
말문이 막힌 희선이 입을 벙긋거렸다.
“자 그래서, 룸메이드 전원 우리 결혼식에 초대하는 걸로 하고.”
레온이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청첩장만 달랑 주는 것보다, 회장님이 특별보너스도 같이 주면 더 좋겠죠?”
“정말 그래줄 거예요?”
희선의 작은 얼굴이 금세 기쁨으로 가득해졌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 이미 레온은 돈이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입술을 가까이하자 희선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 객실 문 밖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자, 미주 씨.”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새빨개진 희선의 얼굴을 보고 이건 백 퍼센트 의심받겠다고 생각한 레온이 잽싸게 침실로 몸을 피하자마자 곧이어 시현과 태하, 미주까지 세 명이 객실로 들어왔다.
“어머니, 저희 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렴.”
“아빠는요? 어디 가셨어요?”
시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응, 잠깐 방에. 곧 나오실 거야.”
왠지 얼굴이 빨개져 있는 희선이 대답했다.
“인사해, 미주 씨. 우리 엄마야.”
희선을 처음 본 미주가 크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누가? 설마 이 언니가?”
“우리 엄마 진짜 예쁘지?”
시현은 자랑스러워했고, 희선은 민망해했다.
“어머니란 말이 안 나오는데……. 에이 모르겠다, 우리 시현 씨 엄마면 나한테도 어머니지.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미주예요!”
희선은 싹싹하고 활기찬 미주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여태 시현에게 미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덕분에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낯을 가리는 그녀답지 않게 금세 웃으며 미주의 손을 잡았다.
“시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내 결혼식에까지 와준다지요? 정말 고마워요.”
“어머 아녜요.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어머니!”
넉살 좋게 대답한 미주가 잠시 후 시현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역시 나 따위가 시어머니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었네. 고생 많이 하셨다면서 어쩜 하나도 안 늙으셨어?”
둘이서 쿡쿡 웃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미주를 불렀다.
“이미주 씨?”
레온이었다. 깜짝 놀란 미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레온이 희선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미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난번에 해준 일은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행복하네요.”
“벼, 별것도 아닌데요.”
미주는 수줍어서 레온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미주를 보면서 시현은 레온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내가 그때 딱 저랬었지.
그런 미주가 귀여운지, 레온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보낸 선물은 왜 안 받았죠?”
레온이 태하를 통해서 보낸 그랜드호텔 프리패스를, 미주가 사양했었다.
“너무 과분해서요. 제가 뭘 했다고…….”
“그렇다고 맨입으로 넘어갈 순 없지. 혹시 다른 소원이 있으면 뭐든 말해봐요.”
레온의 말에 미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뭐든지 들어주시는 건가요?”
“물론.”
얼핏 듣기에는 가벼운 말 같았지만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케네디 회장이었다. 말에 그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미주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혹시 회장님 결혼식에, 제 남자친구하고 같이 참석해도 될까요?”
“이런, 모처럼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원하는 게 겨우 그건가요?”
김샜다는 듯이 말하는 레온에게, 미주는 어렵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기자거든요.”
그제야 레온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해요.”
대답한 것은 희선이었다. 그녀는 레온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레온에게 헤어지지 말자고 울며 매달리던 날, 희선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될게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때 일은 결국 희선의 오해였지만,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케네디 회장 부인 될 사람이 언제까지 숨어 살 수 있겠어요? 나도 다 각오한 일이에요.”
이어서 희선은 미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시현이가 한창 마음고생할 때, 편 들어준 사람은 미주 씨밖에 없었다고 들었어요. 남자친구 되는 분한테 기사 쓰시라고 하세요. 결혼식 사진도 싣고요.”
시현도 덩달아 말했다.
“쓰는 김에 우리 결혼식 기사도 같이 써주라. 어차피 여기저기서 추측 기사 쓸 텐데, 한군데쯤은 팩트로 나가는 게 낫지. 미주 씨 남자친구면 예쁘게 잘 써줄 거 아냐?”
이미 케네디 부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온갖 뉴스를 장식한 후였다. 결혼식장에 취재진이 몰리는 게 싫어서 일절 사양한 것뿐, 기사가 나가는 것 자체에는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게다가 미주는 여태 언제든 제 편이 되어주었다. 보라에게 저보다 더 화를 내준 것도, 시현 씨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준 것도 미주였다.
미주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게 시현의 마음이었다.
태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주 대리님 남자친구라면 믿을 수 있죠.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고 나자 시현이 뒤늦게 미주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근데 대체 언제부터 사귄 거야?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고?”
“어차피 오래 만날 거 아니라서.”
“그게 무슨 소리야?”
미주는 대답 대신에 웃기만 했다.
*
프러포즈 반지까지 빼앗아 온 지 이틀째. 우진은 방문까지 잠그고 틀어박힌 채 술독에 빠져 있었다.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문을 따고 들어온 정임이 소주병을 빼앗으며 호통을 쳤다.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배 속에 있는 애는 네 자식인데 나 몰라라 할 거야, 응?”
화란의 머리채까지 잡아 놓고도 정임은 파혼까지 시킬 생각은 없었다.
여태 눈물 쏙 빠지도록 아현을 구박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쨌든 배 속에 아이는 우리 집안 자손이라는 게 정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걔 엄마 행실 좀 봐. 그게 내 새낀지 남의 새낀지 어떻게 알아?”
“진짜로 네 자식이면 어쩔 건데!”
“만에 하나 내 애라도, 일이 이렇게 됐는데 걔가 그 애를 낳을 것 같아?”
아현이 제 아이를 낳을 리도 없지만, 낳는다 해도 이쪽에서 사절이었다. 돈 한 푼 없는 허영덩어리와 엮여 봤자 한층 더 인생 답답해질 뿐이다.
정임이 주먹을 쥐어 가슴을 쳤다.
“너 그러다 천벌 받아, 이놈아!”
“내가 뭘 어쨌다고!”
우진이 별안간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다들 나한테만 난리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부잣집 외동사위가 되겠다던 꿈은 한순간에 날아가고, 뒤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여기저기 고소를 당한 건은 그대로인 데다, 거기에 반지니 예단이니 마련하느라 진 억대의 빚만 더해져 있었다.
거기다 사회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청첩장을 돌리고 나서 결혼을 엎는 게 벌써 두 번째 아닌가. 더는 회사를 다닐 면목도 없었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렇게까지 인생이 망가져야 하는 것일까. 억울함에 몸부림치다 우진은 문득 시현을 떠올렸다.
그래, 그거다. 내가 착한 시현이를 배신하고 상처를 줘서, 그 벌을 받는 거다.
모든 일이 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작정 시현에게 매달려 용서를 빌고 싶어졌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겉옷을 찾아 입는 우진에게 정임이 놀라 물었다.
“오밤중에 어딜 가?”
“가서 빌어야지, 지금이라도.”
그 말이 시현을 가리키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정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흘겼다.
“이 녀석아, 술이라도 깨고 날 밝거든 가!”
우진이 반쯤 꼬인 혀로 대꾸했다.
“아니, 지금 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