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죽어도 결혼식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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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죽어도 결혼식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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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죽어도 결혼식은 해야지
2023.02.10.
[아버님, 어머님이랑 러브 샷 한번 가셔야죠! 러브 샷! 러브 샷!]
[본부장님, 시현 씨 사랑하시는 만큼 쭈욱! 드세요!]
분위기 메이커인 미주 덕분에 분명 저녁식사였던 자리가 어느덧 술자리로 변해버렸다. 다섯 명이 먹었는데, 끝날 때 세어 보니 빈 와인 병이 열 개 가까이나 되었다.
결국 밤 늦게 미주만 겨우 차에 태워 보내고 나서, 시현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하와 함께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태하의 팔을 베고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다급하게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얘들아, 아직 자고 있니? 일어나 봐!”
레온의 목소리에 시현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화재라도 났나?
태하가 가운 바람으로 뛰쳐나가 문을 열자 두꺼운 패딩 점퍼에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낀 레온이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옷 따뜻하게 입고 나오렴, 빨리!”
레온은 뜬금없이 재촉만 남기고 어디론가 서둘러 가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12월의 늦은 해는 아직 얼굴을 내밀려면 한참 멀어서, 바깥은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태하와 시현은 영문도 모르고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정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머나!”
밤새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도로와 인도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온통 눈밭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꺅!”
비명 소리가 들려와서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희선이 레온에게 눈덩이를 마구 얻어맞고 있었다.
“엄마!”
“어머니!”
태하와 시현이 얼른 달려가서 희선을 도왔다. 셋이 합세해서 눈덩이를 만들어 던졌지만, 레온이 어찌나 요리조리 날쌔게 피하는지 단 한 번도 맞추지 못했다.
결국은 태하가 몸으로 달려들었다.
“어머니! 빨리요!”
태하가 움직이지 못하게 레온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동안 희선이 그의 옷자락 안에 사정없이 눈을 집어넣었다. 시현도 신이 나서 레온을 향해 눈덩이를 마구 던져 댔다.
“이 불효막심한 녀석들…… 악!”
그제야 레온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이른 새벽, 호텔 정문 앞에서 눈싸움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직원들까지 나와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내가 당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었다 이거죠?”
잠시 후 태하의 팔에서 빠져 나온 레온이 벨맨을 향해 분풀이를 하듯 눈덩이를 던진 것을 시작으로, 직원들까지 눈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다.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다. 벨맨은 회장님에게, 회장님은 프런트 직원에게, 프런트 직원은 사모님에게, 사모님은 아들을 향해 이를 악물고 눈덩이를 던졌다.
설탕가루처럼 고운 첫눈으로 뭉친 눈덩이는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대신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웃음만 터져 나왔다.
“으악!”
“아하하하!”
눈밭 여기저기에 비명소리와 함께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현도 여기저기 얻어맞고 한참 배꼽을 잡고 웃다 지쳐 눈밭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버렸다.
“…….”
눈을 감은 채 차갑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지금도 이토록 행복한데,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앞으로는 더욱더 행복할 일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결혼식과, 신혼여행과, 첫날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갈 미래가.
너무나 완벽한 순간, 시현은 문득 한 줄기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늘 쫓기듯 불안한 가운데서 살아왔던 삶. 여태 시현은 자신이 이토록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만 느껴졌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 눈을 떠 보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서 시현은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자는 거야?”
잠시 후 태하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시현은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아니.”
“그럼 왜 눈을 감고 있어?”
시현은 조금 망설인 끝에 중얼거렸다.
“눈을 뜨면 꼭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너도, 엄마와 아빠도, 이 완벽한 순간도.
내 주위를 둘러싼, 이 모든 행복한 것들이.
차마 입 밖에 내기가 두려워서 그렇게만 말했는데도, 태하는 용케 알아듣고 혀를 찼다.
“이 바보.”
가벼운 핀잔과 함께, 팔을 붙잡아 일으키는 느낌이 났다.
“눈 떠봐.”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다정하고도 단호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하가 시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봐. 사라지지 않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시현의 이마에, 태하가 제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난 언제나 여기 있을 거니까.”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스러져 가는 것을 느끼고, 시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주 웃어 주던 태하의 얼굴이, 한순간 확 굳어졌다.
“……!”
가슴이 철렁하는 것과 동시에, 시현은 제 몸이 뒤로 확 밀쳐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도 모른 채 눈밭에 나동그라지는 순간.
방금까지 시현이 서 있었던 자리에,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뛰어들었다.
끼이이익!
순간 시현은 시간이 멈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에 부딪쳐 저만치 날아가는 태하의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태하야!”
찢어지는 듯한 희선의 비명만이 귓가에 울렸다.
*
그 후로 벌어진 일들은 마치 악몽 속의 일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시현아, 내가 잘못했어!]
울부짖는 우진의 목소리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현은 왜 우진이 거기 있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새빨갛게 얼어 버린 손으로,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하얀 눈밭만큼이나 새하얀 얼굴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태하의 얼굴만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자세한 사정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알게 되었다.
술에 잔뜩 취한 우진이 차를 몰고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한 거라고 했다. 사고가 나기 직전에 알아챈 태하가, 제 몸을 날려 피하는 대신에 시현을 밀쳐내고 혼자서만 차에 치인 것이었다.
다행히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던 데다, 워낙 온몸이 강건한 근육질이었다. 게다가 마침 내린 눈이 쿠션 역할을 해 준 덕까지 보아서 타박상을 입은 것 외에는 어디 한 군데 금 간 곳조차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고 직후에 잠시 심장 박동이 멈췄던 것이었다. 시현이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덕분에 호흡은 금세 돌아왔지만, 태하의 의식은 이틀을 지나 사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시현이 눈 좀 붙였니? 밥은 먹었고?”
금세 쓰러질 것처럼 초췌한 얼굴로, 희선은 도리어 시현을 걱정했다.
시현과 함께 계속해서 태하의 곁을 지키는 희선을, 레온이 먹이고 재우겠다고 강제로 데려갔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태하가 얼마나 귀하고 애틋한 자식인가. 차마 두 사람을 볼 면목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모든 게 다 저 때문이었다.
애초에 사람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우진 같은 인간과 얽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게다가 태하는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도 있었는데, 나를 구하느라…….
끝없이 자책하는 시현을 향해, 희선이 눈물을 글썽였다.
“왜 그런 말을 하니? 너나 태하나 나한테는 똑같은 자식인데.”
그런 희선의 어깨를 힘주어 안으며 레온이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단다. 난 내 아들을 알아. 평생 기다려왔던 날인데, 반드시 눈을 떠서 결혼식장에 들어갈 거야.”
어느덧 결혼식이 바로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하객들에게 사고를 알리고 식을 연기한다고 연락을 돌려야 하는데, 레온이 단호하게 반대하는 중이었다.
“두고 보렴. 우리 아들이 얼마나 효자인데 내 결혼식까지 못 하게 만들 것 같니?”
누구보다도 그 말을 믿고 싶은 것은 시현이었다.
“그럼요. 금세 정신 차리고 일어나겠죠. 저 걱정 안 해요.”
시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태하는 곧 일어날 테니까 당신도 걱정 말고 이제 가서 밥 먹고 한숨 자요.”
죽은 듯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희선을, 레온이 반강제로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이따 저녁때 다시 올 테니까, 시현이도 밥 챙겨 먹고, 잠도 자야 해. 계속 태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지 말고. 알았지?”
희선을 데리고 나가며 레온은 시현에게도 당부했다.
“네, 아빠.”
애써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현은, 두 사람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힘없이 무너졌다.
“너, 내가 나만 살려줬다고 고마워할 것 같았어?”
시현은 태하의 침대머리에 매달려 울먹였다.
“착각하지 마. 하나도 안 고마워.”
이대로 태하가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같이 차에 치이는 편이 백번 나았을 것 같았다.
“제발 눈 좀 뜨란 말이야. 우리 결혼식이 내일이잖아……!”
결국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울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태하가 거짓말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현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태하야, 괜찮아? 나 알아보겠어? 응?”
달려들 것처럼 묻자 태하가 힘없이 웃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몰라보겠어.”
시현은 태하의 품에 뛰어들며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안도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태하야……!”
시현이 와락 안기는 순간, 태하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
어째서인지 태하는 우는 시현을 마주 안아주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큰 기쁨에 벅찬 나머지 시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바보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한참 후에야 조심스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져서 더욱더 눈물이 났다.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바탕 소리 내어 울고 나서야 시현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다.
“저기,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잖아.”
어색하게 말을 꺼내는 태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한참 만에야 태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내일이, 우리…… 결혼식이라고……?”
시현이 눈물을 훔치고 웃어 보였다.
“그래, 벌써 내일이야. 너 사흘 동안이나 누워 있었어.”
태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새하얀 침대 시트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
혹시 몸이 안 좋아서 걱정하는 건가, 싶어서 시현은 얼른 말했다.
“너 힘들면 미뤄도 괜찮아. 지금이라도 하객들한테 연락 돌리면 돼.”
그까짓 결혼식이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미룰 수 있다. 중요한 건 태하가 멀쩡하게 눈을 떴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시현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태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 거야!”
어딘가 꿈꾸는 듯한 눈으로, 태하는 새삼스레 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죽어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