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예비 신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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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예비 신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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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예비 신랑의 비밀
2023.02.14.
기나긴 악몽 속에서 헤매다 겨우 눈을 뜨자 병원이었다.
“괜찮니? 응? 이제 정신이 들어?”
침대 머리맡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화란이 퍼뜩 깨서 황급히 달려들었다.
“너 벌써 며칠째 정신 잃고 있었어.”
화란이 눈물을 글썽였다.
“불쌍한 것.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정신을 차린 아현은 제일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아기는?”
“애는 멀쩡하대.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확 유산이라도 돼버리고 말 것이지.”
화란이 훌쩍이며 중간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그러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병실은 무려 6인실이었다. 몰락한 현실이 그야말로 피부로 느껴져서, 아현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란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다 엄마 잘못이야.”
언제나 곱고 우아한 사모님으로만 보였던 얼굴이, 전에 없이 늙고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엄마도 평생 마음 편하게 산 적이 없었어. 네 생부가 널 빌미로 돈 내놓으라고 수시로 협박하는 바람에, 내내 사는 게 지옥이었어.”
엄마를 손가락질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에게는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화란이 딸인 자신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아현이 잘 알고 있었다.
아현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부녀의 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자.]
그런 느낌이었다. 세상에 어떤 풍파가 있어도 나를 지탱해 줄로만 알았던 단단한 줄 두 개 중의 하나가 뚝 하고 끊겨 나간 느낌.
처음으로 아현은 생각했다.
‘나도 이 아이에게는 그런 줄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자신은 부잣집 외동딸이 아니다. 갖고 있던 아파트까지 증여 취소를 당하고 나면 말 그대로 무일푼에다, 서른이 가깝도록 직업도 스펙도 없는 백수에 불과했다.
[너 똑바로 말해. 배 속에 있는 그 애, 내 새끼 맞아?]
아버지에게 버림받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우진에게, 아현은 원망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도 돈 때문에 하려 했던 결혼인데 상대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배신감을 느낄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결혼은 물 건너간 거였다. 그러니까 이제 이 아이는 없어지는 게 맞았다.
그런데…….
아현은 왠지 아이와 이어진 이 가느다란 줄을 차마 제 손으로 끊어 버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였다.
끊겨 나간 줄 대신에 생겨난, 또 하나의 줄이 아닐까.
왠지 배 속의 아이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싫어하는 남자가 뿌린 씨앗으로도, 제 발목을 잡는 존재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앞이 막막한 가운데 한 줄기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만 같았다.
내 피와 살을 받아서 생긴,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
생소한 감정이 아현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울지 마, 엄마.”
아직은 밋밋한 배를 쓰다듬어 보며, 아현은 중얼거렸다.
“살아야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
“네, 아빠. 태하 멀쩡해요!”
시현은 전화에 대고 울며 웃었다.
“주치의 선생님도 곧 오신다고 했어요. 엄마랑 빨리 오세요, 빨리요!”
전화에 대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시현에게서, 태하는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민망할 정도였다.
전화를 끊은 시현이 눈물을 훔치며 살짝 눈을 흘겼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제야 태하가 움찔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안.”
손을 뻗어 제 얼굴을 만져 보자 까칠한 감촉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며칠 동안 세수는커녕 잠도 거의 못 잤으니 지금쯤 꼴이 얼마나 초췌할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일 신부 화장이나 제대로 받을까 모르겠네. 너 누워 있는 바람에 피부 관리도 다 취소했단 말이야.”
“괜찮아, 그런 거 안 받아도 당신은 충분히…….”
말하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던 남자가, 잠시 후 불쑥 물었다.
“저기, 당신 말이야. 정말로 날…… 좋아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며칠 누워 있었다고 새삼스럽게.
“당연하지, 그럼.”
장난스럽게 대꾸했다가, 시현은 태하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고쳐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윤태하.”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
태하는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여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고백했는데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수줍어하는 것이 더없이 귀엽게 느껴졌다.
“너는? 나 사랑해?”
태하는 어색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알잖아.”
원래도 달콤한 말을 자주 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꼭 듣고 싶다. 시현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억지로 눈을 맞추자 태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말해줘, 듣고 싶어. 응? 응?”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어.”
결국 지고 만 태하가,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해 준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만 들어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아서,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죽는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진짜로 화낼 거야.”
야단치듯 말하고, 시현은 고개를 들어 태하의 입을 막듯이 제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태하가 숨을 멈췄다.
“……!”
왠지 시현은 그의 입술이 무척이나 뜨겁다고 생각했다. 걱정이 되어 얼마 못 가 금세 입술을 떼고 바라보자 역시나 태하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너 정말 괜찮아? 자꾸만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태하는 시현의 눈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더워서 그래.”
“더워? 난 딱 좋은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하가 더듬거렸다.
“어, 얼음물이 마시고 싶어.”
“얼음물?”
시현은 귀가 번쩍 띄었다. 북극 얼음이 먹고 싶다고 해도 쫓아가서 깨 가지고 올 판이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사가지고 올게!”
곧바로 시현이 뛰쳐나가고, 병실에 혼자 남은 태하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제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정작 시현이 사다 준 얼음물은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대신에 태하는 병실에 놓여 있던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20XX년 12월 X일
날짜에 한참 머물러 있던 태하의 시선이, 이윽고 그 아래 실려 있는 기사로 향했다.
- 반 더 린드 LLC의 레온 케네디 회장과, 외아들인 유니온TA 윤태하 대표 부자가 내일 그랜드호텔에서 나란히 결혼식을 올린다.
부친인 케네디 회장의 예비 신부는 다름 아닌 윤태하 대표의 생모로, 중년의 나이에 재회하여 비로소 맺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하는 커다래진 눈으로 생모라는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왜 저러나, 싶어서 시현이 곁에서 힐끗 들여다봤지만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다른 신문에도 이미 여러 번 났던 기사의 재탕이었다.
“또 같은 소리야? 하여튼, 지겹지도 않나.”
시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 결혼식 기사는 미주 씨 남친이 잘 써주겠지?”
말하고 나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있잖아, 근데 아빠는 갑자기 왜 미주 씨한테 뭐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신 거야?”
그제야 태하는 꿈에서 깬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응?”
“아빠가 선물도 보내셨는데 미주 씨가 안 받았다며. 아빠가 미주 씨한테 뭐 신세 진 거라도 있었어?”
태하는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했다. 굳이 말하자면, 시현이 외계어로라도 말했다면 나올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시현이 왜 그런 표정을 하느냐고 다시 물으려는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태하야!”
“아들!”
숨이 턱에 닿은 레온과 희선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괜찮니? 응?”
“내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 아들은 반드시 눈 뜰 거라고 했잖아요!”
부모가 울고 웃으며 번갈아 끌어안는데도 태하는 저는 괜찮다, 걱정 마시라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로봇처럼 뻣뻣하게 몸을 맡기고 있을 뿐.
한참 만에야 희선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래도 내일 결혼식은 일단 미루는 게 좋지 않겠니?”
“아뇨, 할 겁니다.”
그제야 태하는 딱 잘라서 한마디 했다. 어찌나 무뚝뚝한 말투인지, 듣는 시현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내 아들은 반드시 눈을 떠서 결혼식에 갈 테니 두고 보라고 장담했던 레온마저, 막상 그 상황이 되자 역시나 걱정스러워했다.
“먼저 주치의 선생님하고 상의하고 나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혹시나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잖니.”
그러자 태하가 불쑥 레온을 불렀다.
“……아버지.”
마치 생전 처음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색한 말투였다.
“그래, 아들.”
“잠깐 단둘이서 이야기 좀 하고 싶습니다.”
시현과 희선에게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이었다.
무슨 얘기길래 나까지 나가 달라는 걸까. 시현은 조금 서운했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결혼식 전날이고 하니까, 부자간에 할 얘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
“엄마, 남자들끼리 실컷 얘기하라고 놔두고 우린 커피 마시러 가요!”
시현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희선의 팔짱을 끼고 병실을 나갔다.
병원 지하에 있는 카페에 희선과 마주 앉았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지?”
시현의 손을 꼭 붙잡고, 희선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태하 아빠 말이 맞았어. 태하가 시현이를 두고 어딜 가겠니?”
며칠 동안이나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얼굴은 금세 쓰러질 것처럼 파리했지만, 눈빛만은 기쁨에 차서 반짝이고 있었다.
내 얼굴도 저렇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희선이 머뭇거리며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시현아. 내일 말이야…….”
거기까지만 듣고도 시현은 희선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렸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저도 미뤘으면 하는데 태하가 고집을 부려요.”
희선이 한숨을 지었다.
“엄마도 지금 웨딩드레스 입을 기분이 아니야. 이렇게 된 거, 같이 미뤘다가 태하가 완전히 건강해지면 그때 마음 편히 식 올렸으면 좋겠는데…….”
“이따 올라가서 다시 설득해봐야죠, 뭐.”
그렇게 대답하고, 시현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그런데 엄마. 태하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태하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왠지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였다.
“응? 태하가 왜?”
정작 희선은 느끼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니, 왠지 엄마 아빠한테 좀 서먹해 보여서요.”
“그야 정신 차린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얼떨떨해서 그랬겠지.”
희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방금도 아버지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는 것 보렴. 제 편 들어달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니?”
“그건 그렇죠?”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결국 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삼십 분쯤 시간을 보내다가 병실로 돌아가자 역시나 희선의 예상이 맞았다.
“내일 결혼식 말인데,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좋겠어요.”
레온의 의견이 아까 전과는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지금 와서 취소하면 하객들에게도 민폐고, 무엇보다 나나 태하나 평생을 기다려 온 날인걸요. 그렇지, 아들?”
태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현이 당황해서 말했다.
“하지만 아빠, 주치의 선생님하고 먼저 상의해봐야 하지 않아요?”
“주치의는 아까 왔다 갔단다. 이따가 정밀검사는 해봐야겠지만, 일단 별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했어.”
희선은 못내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식장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온이 가로챘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의료진이 현장에 대기하기로 했으니 걱정 말아요.”
그녀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떠받들던 레온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니 희선도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래도 비행기 타는 것까지는 무리일 테니 신혼여행은 미루도록 하죠.”
희선을 향해 타협하듯 말하고, 레온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대신 내일 밤은 우리 호텔에서 가장 멋진 방에서 자도록 하렴.”
왠지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첫. 날. 밤. 이잖니?”
그 순간, 태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