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신랑은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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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신랑은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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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신랑은 스무 살
2023.02.17.
“엄마, 남자들끼리 실컷 얘기하라고 놔두고 우린 커피 마시러 가요!”
시현이 희선을 데리고 나가고, 병실에는 레온과 태하 부자만이 남았다.
“말해보렴, 아들.”
“아버지. 제가 올해 스물여섯 살, 맞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으면서도 레온은 대답했다.
“그렇지, 곧 해가 바뀌면 스물일곱 살이고. 그런데 그건 왜?”
태하가 잠시 망설인 끝에 고백하듯 말했다.
“사실은 제가 지금…… 스무 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레온은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스무 살 이후로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제 귀를 의심하고 빤히 쳐다보자 태하가 덧붙여 설명했다.
“제가 군에 입대하던 날입니다. 훈련소 앞에서 시현 씨하고 헤어져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시현 씨가 울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 보니까…… 병실이었습니다.”
그제야 겨우 말뜻을 이해한 레온은 충격에 빠졌다.
“……!”
태하가 입대하던 날, 레온은 미국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가서 아들을 배웅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그날 도저히 빠질 수 없는 회의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시현에게 전화해서 태하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레온은 한참만에야 겨우 물었다.
“그럼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거니?”
“예.”
“시현이하고 사귄 것도? ……잠깐, 그럼 설마 네 어머니도?”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라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가 다른 여자분을 만나서 결혼하시는 줄 알았을 겁니다.”
레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일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도 자신의 가까이에서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아들은 이런 종류의 농담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시현이는? 뭐라고 하니?”
“시현 씨한테는 아직 말 안 했습니다.”
“뭐?”
깜짝 놀라는 레온에게, 태하가 말했다.
“제가 스무 살인 걸 알면 결혼 안 하려고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시현 씨는 그런 사람입니다.”
레온은 생각해보았다. 고지식할 정도로 올곧은 시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태하가 기억을 찾을 때까지는 결혼을 미루려 하지 않을까.
“저는 평생 시현 씨를 짝사랑해 왔습니다. 죽어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결혼식장에서 쓰러지고 싶습니다.”
결심에 찬 얼굴로 말하고, 태하는 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댈 곳이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내일 결혼식, 예정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레온은 태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았다. 하루아침에 6년 후의 세상에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결혼식을 앞둔 갓 스무 살 청년.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애정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그래, 내가 지금 네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언제 되어줄까.
“그래, 아들.”
레온은 팔을 벌려 아들을 꼭 껴안고 넓은 등을 힘주어 쓰다듬었다.
이미 다 커버린 아들인데도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하마터면 영영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자 새삼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반대로 태하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어색하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런 태하를 보고, 레온은 태하가 진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스무 살 때면, 아직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않을 정도로 서먹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데면데면하게 구는 태하가 서운하기는커녕 고맙고 기특했다. 가깝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 손 내밀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또한 한편으로는 먹먹하기도 했다. 기댈 데라고는 정말로 나밖에 없었구나, 우리 아들.
“아버지가 네 편 되어줄 테니 아무 걱정 마렴.”
레온은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러면 결과적으로 시현을 속이게 되는 셈이지만 이번에 한해서 레온은 눈 딱 감기로 했다.
물론 그 역시 시현을 진심으로 딸이라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아들을 영영 잃을 뻔한 직후 아닌가. 태하의 부탁이라면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었다.
잠시 후 포옹을 풀자 태하가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편들어 주마 약속은 했지만 역시나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온은 조심스럽게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져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정밀검사부터 받아보자꾸나. 혹시나 머리를 다쳐서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면, 지금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지 않니.”
“예.”
다행히도 태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서, 레온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현이한테는 언제쯤 사실대로 얘기할 거니?”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비밀로 하겠다는 얘긴데. 레온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혹시……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제가 스물여섯 살 윤태하에 대해서 배워야지요.”
이미 거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는지, 태하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십시오.”
레온은 하마터면 한숨을 내쉴 뻔했다.
잃어버린 6년 동안, 아들은 곁에서 보기에도 숨 가쁘게 살아왔다.
앱을 개발하고, 회사를 세우고, 키워내고……. 그 세월을 따라잡겠다는 게 말이 쉽지, 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당장 내일 결혼식장에서 제 회사 직원들을 마주쳐도 누군지조차 몰라볼 텐데.
앞으로 태하가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까 생각하니 눈앞이 다 캄캄했다.
“저는 지금 태어나서 제일 행복합니다.”
못내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해, 태하는 안심시키듯 처음으로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다음 날.
그랜드호텔에 있는 넓은 스위트룸의 응접실은 출장을 나온 뷰티 숍의 스태프들로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임시로 설치된 화장대 앞에 세 여자가 나란히 앉아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오늘의 신부인 시현과 희선, 그리고 시현의 들러리이자 축가 담당인 미주였다.
“이야, 좋다. 친구 잘 둔 덕분에 이렇게 비싼 메이크업도 다 받아보고.”
미주가 눈을 감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에 얼굴을 맡긴 채 중얼거렸다.
오늘의 메이크업을 맡은 것은 지난 번 보라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시현을 꾸며 주었던 뷰티 숍으로, 원장은 가히 국내 최고라 불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그 원장에게 메이크업을 받으며, 옆자리에서 똑같이 눈을 감은 시현이 물었다.
“그나저나 미주 씨 남친은 언제 와?”
“이따가. 결혼식 시작하기 전까지만 오라고 했어.”
“진짜로 인사 안 시켜줄 거야?”
“어차피 오래 만날 거 아니라니까.”
“그럴 거면 결혼식 기사는 왜 쓰게 해주려는 건데?”
미주는 대답 대신에 또 웃기만 했다.
신부화장을 마치고 나서 희선은 일단 한복으로, 시현은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아름답게 완성된 두 신부를 바라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자, 이제 신랑님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스태프가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옆방에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레온과 태하가 달려왔다.
두 남자 역시 각자 메이크업을 받고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워낙 타고난 외모에 체격까지 훌륭한 부자가, 제대로 단장을 하니 미모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응접실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두 남자는 각자 자기 신부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특히 태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시현을 보자마자 귓가까지 새빨개졌다.
“어머, 신랑님 얼굴 빨개지셨어요!”
스태프들이 손뼉을 치며 놀려대고, 미주는 놀라서 눈이 다 둥그레졌다.
“세상에, 본부장님이 수줍음을 타시다니!”
태하는 시현의 눈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백 마디 찬사보다도, 몸으로 보여주는 반응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아, 이 남자가 나를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도 태하가 너무 쑥스러워하니 덩달아 부끄러워서, 시현은 기쁘면서도 괜히 핀잔을 주었다.
“뭘 그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굴어? 드레스 고를 때 다 봐놓고.”
그러는 동안 한쪽에서는 레온이 희선을 한바탕 놀려먹고 있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은은한 파스텔 톤의 한복을 차려 입은 희선이 어색하게 물었다.
“예쁘긴 하지만…….”
왠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레온이, 성큼 다가서더니 희선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빨리 벗었으면 좋겠는데?”
당장 얼굴이 달아올라서 흘겨보는 희선을 향해, 레온이 시치미를 뚝 뗐다.
“음, 한복 말고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새빨개진 희선을 보고, 레온이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로즈 당신, 머릿속에 너무 야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 거 아니에요?”
“……!”
“조금만 참아요. 이따 밤에 제대로 놀아줄 테니까.”
의미심장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레온의 등을, 희선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어 때렸다.
“아야!”
때리는 대로 몇 대 얻어맞아 주고 있던 레온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잽싸게 도망쳐서 시현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 뒤에 숨었다.
“시현아, 아빠 좀 살려줘!”
“시현아, 좀 비켜보렴! 내가 정말이지……!”
“참으세요, 엄마. 이따 결혼식 때까진 살려 두셔야죠.”
시현이 웃으며 팔을 벌려 막아주었다.
티격태격하고 있는 세 사람을 어딘가 생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태하의 등을, 갑자기 누군가가 쿡 찔렀다.
돌아보자 미주가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태하는 잠시 망설이다 뒤를 따랐다.
비어 있는 방으로 태하를 이끈 미주가, 단둘이 되자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그동안 저 많이 미우셨죠?”
“……아닙니다.”
태하가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에이, 괜찮아요. 장장 두 달 동안이나 독수공방을 하게 만들었는데 미움 받아도 싸죠.”
미주는 사과하듯 말했다.
“사실은 첫날밤에 진짜 첫날밤처럼 보냈으면 해서 그랬던 거예요. 제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예.”
“말이야 안 했겠지만, 시현 씨도 그동안 본부장님이 엄청 그리웠을 거예요. 아마 속으로는 오늘 밤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걸요?”
쿡쿡 웃던 미주가 민망한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본부장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이따가 시현 씨랑 불타는 밤 보내세요!”
미주가 파이팅을 외치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방을 나간 후, 태하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
사실 태하는 방금 제게 뭐라고 한바탕 지껄이고 나간 여자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왜 사과하는 건지, 정확히 뭘 어쨌다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딱 알아들은 부분만 정리해보면 그런 이야기였다. 오늘 밤이 첫날밤이자,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시현과 같이 자는 밤이라고. 그러니까 시현이 무척 기대하고 있을 거라고.
아무리 정신적으로 갓 스무 살밖에 안 됐다 해도, 태하 역시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첫날밤에 신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걸.
문제는, 그전에 시현과 뭘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는 거였다.
태하는 어제 시현에게 입맞춤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죽는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진짜로 화낼 거야.]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한, 시현과의 첫 키스였다.
기껏해야 가볍게 입술이 맞닿은 게 전부였지만, 그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그에게 있어서는 스무 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너무 떨린 나머지 얼굴조차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얼음물이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허둥지둥 시현을 쫓아내야 했을 만큼.
‘입술만 닿아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대체 어떻게…….’
저 아름다운 신부 곁에 눕는 상상을 하는 순간,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확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누나와의 첫날밤.
“…….”
달콤한 고민에 휩싸여, 마음만은 스무 살인 청년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