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 눈 내리는 날 (146/181)


#146. 눈 내리는 날
2023.02.21.


새하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운동회에 참석한 부모들이 같은 반 친구들보다 훨씬 작은 혼혈 아이를 힐끔거렸다.


[쟤는 뭐야, 한국 애 맞아?]

[섞인 것 같은데.]

여기저기 수군대는 목소리 속에서, 그렇지 않아도 작디작은 아이의 어깨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모두가 부모님 손을 잡고 즐겁게 웃고 있는 가운데 혼자인 것은 오로지 아이뿐이었다.


[…….]

이대로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어디선가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하야!]

저만치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소녀가 눈부시게 웃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아이는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



“태하야!”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태하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뭐야, 그새 잠들었어?”

잠시 소파에 앉아서 깜빡 잠든 사이에 꿈을 꾼 모양이다. 방금 교복을 입고 있던 그 소녀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일어나, 이제 슬슬 결혼식장으로 이동해야 한대.”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그때 그 눈부신 웃음 그대로.

태하는 손을 내밀어 시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가자.”

자신의 구원이자, 이제는 세상의 전부가 된 여자의 손을.

*

하객들이 결혼식장에 하나둘씩 도착할 무렵부터, 바깥에는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늘 부부가 되는 이들을 축하하는 것처럼.

그토록 언론에 화제가 된 결혼식이지만 정작 하객의 규모는 그지없이 조촐했다. 양가 친지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거의가 신랑 신부의 직장 동료와 친구들뿐이었다.

태하를 알고 있는 하객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원래 표정이라는 게 별로 없는 남자가, 오늘만은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가 누구든 건네는 인사는 오로지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입가에는 내내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한편 신부를 본 사람들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송이가 내려앉은 것 같은 베일을 쓰고, 눈꽃 모양의 레이스가 뒤덮인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마치 눈의 여왕처럼 보였다. 파란 보석이 시리게 빛나는 티아라가 겨울의 신부를 더 한 층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박, 이게 누구야?”

“뭐야 강시현, 너무 예쁘잖아!”

주은을 비롯한 대학교 친구들이 시현을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가 준 결혼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뺨을 붉히는 시현의 귓가에, 주은이 속삭였다.


“고민 백번 때린 끝에 고른 거니까 신혼여행 갈 때 잊지 말고 꼭 챙겨가라.”

하객들이 모두 착석하고, 결혼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머뭇거리며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시현의 작은아버지, 강재호였다.


“내가 감히 여기 와도 되나, 오늘 아침까지 계속 고민을 하다가…… 그만 늦었구나.”

어색하게 말하며, 재호는 시현을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결혼 축하한다. 아무쪼록 힘들었던 일은 다 잊고, 행복하게 잘 살거라.”

그동안 또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던 걸까. 옷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지난 주말에 부모님의 산소에서 만났을 때보다도 한층 더 초췌해 보였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작은아버지.”

시현의 말에 태하의 얼굴에서 오늘 처음으로 미소가 가셨다. 왠지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조카사위를 향해, 재호가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다는 거 알지만, 부디 우리 시현이 잘 부탁하네.”

잠시 망설인 후에야 태하는 힘주어 대답했다.


“……잘 살겠습니다.”

잠시 후, 눈이 내린 듯 온통 하얀 꽃으로 장식된 홀 안에 신랑과 신부가 손을 잡고 함께 입장했다.


 
주례 대신에 부모가 차례로 올라와서 축사를 했다. 먼저 올라온 레온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떨리는 목소리로 레온은 입을 열었다.


“네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나는 네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지. 처음으로 너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는 마치 캄캄한 가운데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단다.”

옛일을 떠올리듯, 레온은 그리운 눈으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너를 만난 순간, 첫눈에 사랑에 빠졌어. 네 얼굴에서 네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거든. 아, 그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남겼구나. ……그때부터 내 인생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어.”

레온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하 너는 내 가장 귀한 보물이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많이 사랑한 사람이란다. ……뭐, 너에게도 내가 두 번째일 테니까 미안해하지는 않으마.”

하객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웃음이 흘러나왔다. 태하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레온은 갑자기 목이 메더니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런 너를, 하마터면…….”

태하가 사고를 당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객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지만, 물론 시현은 레온의 심정을 백 퍼센트 이해했다.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자칫 화장이 망가질까 봐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데 태하가 맞잡고 있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나 여기 있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이렇게 건강하게, 아름다운 부부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구나.”

잠시 후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레온이 다시 말했다.


“살면서 힘들고 막막할 때는 언제든지 아버지가 힘이 되어주마. 시현이하고 둘이서, 오래오래 행복하렴.”

말을 마치고 마이크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결국 회장님은 등을 돌리고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희선이 그의 등을 달래듯 토닥였다.


“예쁜 우리 딸.”

이어서 희선이 마이크 앞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하를 잃어버리고 나서 내 인생은 내내 암흑이나 마찬가지였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을 때 어린 너를 만나서 다시 숨 쉴 수 있었단다.”

문득 희선이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요즘도 가끔 그 생각이 나. 아직 태하가 내 아들인 줄도 모르고 있었을 때, 태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너를 보면서 답답한 나머지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 ……시현이 쟤는 대체 뭐가 문제라고 저럴까, 태하를 낳아준 엄마가 살아 돌아와도 쌍수를 들고 찬성할 텐데.”

또다시 하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시현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단다. 우리 태하 옆에 너 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니?”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웃는 시현과 그 옆에 듬직하게 서 있는 태하를, 희선은 새삼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마음으로 낳은 내 딸, 축하하고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태하 곁에서 행복하렴.”

혼인서약까지 마치고, 진지하고 감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회자가 말했다.


“다음은 신부의 친한 동료 되시는, 미래은행 이미주 대리님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가 쏟아졌다.


“휘익! 미주 대리 예쁘다!”

“이미주! 이미주!”

미래은행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 속에서 무대로 올라온 미주가 마이크를 잡았다.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은 미주는, 말마따나 몰라보게 예뻤다.


“제 영혼의 반쪽, 강시현 과장님께 이 노래를 바칩니다. 본부장님, 시현 씨, 행복하세요.”

방금 부모님의 축사로 만들어진 감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데.

미주를 아는 사람들은 왠지 노래가 시작되기도 전에 웃기 시작했다.


-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그 외의 사람들도 첫 소절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사실 미주는 회사 내에서도 유명한 음치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진지한 표정으로 부르고 있지만 선곡에서 이미 개그의 의도가 보였다.

역시나 감정은 흘러넘칠 만큼 풍부한데, 음정도 박자도 말이 아니었다. 고음불가는 물론이고 애초에 음의 높낮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구르거나 말거나 미주는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꿋꿋하게 노래했다. 표정마저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아서, 음소거만 하면 프로 가수가 따로 없었다.


- 신이여 허-락-하-소-서!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웃다 못해 거의 울고 있었다.

미주가 몸 바쳐 망가져 준 덕분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떠들썩하게 즐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남은 식순이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을 차례.


“하나, 둘, 셋, 던지세요!”

신부가 활짝 웃으며 한복 차림의 시어머니를 향해 부케를 던지는 장면이 사진 속에 영원히 남았다.

*

피로연까지 마친 후, 오후 늦게 레온과 희선의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랑 신부는 식장 앞에 나란히 서서 직접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이좋게 잘 살겠습니다.”

원래 하객 숫자는 자식들의 결혼식에 비해서도 훨씬 적었지만, 이쪽은 그랜드호텔에서 근무하는 룸메이드 전원이 참석하게 되어 아까보다 웨딩홀 안이 훨씬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초대받은 룸메이드의 숫자는 무려 150여 명. 그중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 몇을 빼고는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룸메이드들도 다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었다. 언론은커녕 재벌들도 초대받으려다 물만 먹었다고 소문난 결혼식에 정식으로 초대받아 앉아 있으니 더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었다.

결혼식장에는 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함께 입장했다.

한복에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희선은 더없이 우아했고, 레온의 얼굴에 어린 설렘은 그를 한층 더 젊어 보이게 했다. 어떻게 봐도 오늘 결혼시킨 자식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혼인서약을 하고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조촐하고 소박한 예식이었지만, 신랑 신부가 느끼고 있는 감동이 하객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이제 앞으로 남은 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레온에게, 희선이 조용히 대답했다.


“여태 못한 만큼, 앞으로 더욱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정확한 자초지종이야 알 수 없었지만, 둘 사이에 장가를 갈 정도로 큰 아들까지 있는데 이제야 결혼식을 올리게 됐으니 그 안에 담긴 사연이 오죽이나 많을까. 덩달아 울컥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은 시현은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순간부터 울고 있었고, 남자친구인 현우와 함께 참석한 미주도 참다 참다 결국은 아까 시현의 결혼식에서조차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감동적인 순간.

스테인드글라스 밖으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본 레온이 불쑥 중얼거렸다.


“벌써 해가 지네요.”

언제 울었느냐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네?”

“해가 지면 밤이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쳐다보는 신부의 귓가에 신랑이 속삭였다.


“아까 아침에 약속했잖아요? ……오늘 밤엔 나랑 제대로 놀기로.”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 희선이, 마침 눈이 마주친 미주를 향해 부케를 휙 던졌다.


“미주야, 받으렴!”

다음 순간. 새빨개진 신부가 주먹으로 신랑의 넓은 등짝을 인정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하객들이 일제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하나둘씩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얻어맞던 신랑이 신부를 옴짝달싹 못 하게 꼭 껴안자, 토라졌던 신부도 결국은 픽 하고 웃어버렸다.

창밖에 눈송이가 춤추듯 떨어지는 아름다운 날.

두 번째 결혼식도, 결국은 이렇게 흘러넘치는 웃음소리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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