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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첫날밤에 (1) (147/181)


#147. 첫날밤에 (1)
2023.02.24.



 
결혼식 날 아침. 레온과 태하는 옆방에서 일찌감치 메이크업을 마치고 신부들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되니?”

레온이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버지가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한날 결혼식까지 올리는 걸 보면 기억을 잃기 전에는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게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의지할 거라고는 아버지뿐이었다.

태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시현 씨하고 스킨십을 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레온이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너한테 있어서는 다짜고짜 첫날밤이겠구나?”

“그렇습니다.”

첫날밤을 맞이한 신부의 기분이 이럴까. 설레고, 기대되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물론 경험은 없겠고?”

태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까…… 그런 건 아직 먼 훗날의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도 그 나이 때 너를 가졌는걸.”

터무니없이 젊은 아버지는, 격려하듯 아들의 넓은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렴.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다 자연스럽게 되기 마련이란다.”

“…….”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워서 아는 게 아니거든.”

레온이 윙크를 날렸다.


“걱정 마렴. 네가 누구 아들인데.”

 

*



[신혼여행을 못 가게 됐으니까, 그 대신이라고 생각하렴.]

레온이 준비해준 방은 무려 프레지덴셜 스위트였다. 그랜드호텔의 수많은 스위트룸 중에서도 단 한 개뿐인 최고등급의 방으로, 각국 정상이 내한했을 때 묵는 것으로도 유명한 객실이었다.

객실에 도착하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예전에도 레온의 배려로 좋은 방을 써본 적이 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백 평이 훌쩍 넘는 크기의 객실은, 마치 영화에서 본 귀족이 사는 저택을 축소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 사람이 함께 앉아도 될 것 같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이라기보다 만찬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 같은 요리들은 하나같이 맛있었지만, 시현은 적당히 먹는 양을 조절했다. 들뜬 나머지 그다지 식욕이 없기도 했지만, 오늘 밤은 식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와 태하는 일곱 살 차이. 하지만 알고 지내 온 세월이 오래되기도 했고, 또 태하가 나이에 비해 워낙 어른스러웠기 때문에 여태 사귀면서 나이 차를 느껴본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 하나,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면 바로 침대에서였다. 아무리 사랑해도, 체력적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거였다. 결국은 늘 시현이 지쳐서 먼저 나가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 밤만은.’

설령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태하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자고 시현은 결심하고 있었다.

태하가 의식 없는 채로 누워 있던 지난 사흘이, 시현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끔찍한 기간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못 해준 것들만 생각나는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더 많이 키스해줄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밀어내지 말걸.

점괘 따위에 혹해서 두 달 전부터 태하를 멀리했던 것조차도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두 번 다시 저 넓은 가슴에 안기지 못하게 된다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함께했던 밤이 마지막이었다면……!


[제발 눈 좀 떠. 응? 눈만 뜨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줄게, 제발.]

대답 없는 남자를 붙들고 빌었던 게 바로 어제 아침의 일인데. 오늘 이렇게 멀쩡하게 결혼식까지 마치게 된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두 달 전부터 태하는 첫날밤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시현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잔뜩 겁을 먹고 있을 거였다. 난 오늘 죽었구나, 하고.

그러나 하마터면 태하를 잃을 뻔하고 난 지금의 마음가짐은 이랬다.

죽어도 좋다!

왠지 태하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눈치였다. 아마 같은 마음일 거라고 시현은 짐작했다.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겠지, 너도.

식사를 마치고 시현은 태하에게 다가가 은근히 속삭였다.


“같이 씻을래?”

지금껏 태하가 몇 번이나 같이 욕실에 들어가자고 졸랐지만 시현은 그때마다 펄쩍 뛰며 거절했었다. 즉 나름대로 큰맘 먹고 한 말인데, 뛸 듯이 좋아할 줄 알았던 남자는 왠지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또 얼굴이 새빨갛다. 걱정이 되어 이마를 짚자 역시나 불덩이처럼 뜨거워서 시현은 정색을 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열이 나? 사고 후유증이 이제 나타나는 건가?”

“괜찮으니까 걱정 마.”

태하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중얼거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사고 났을 때 잠깐이지만 심장이 멈췄었다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덜컥 겁이 나서, 시현은 다짜고짜 태하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심장이 제대로 뛰는지 확인할 셈이었다.


“잠……!”

화들짝 놀라 물러서는 남자의 가슴께를 반강제로 더듬어 보고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옷 위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 가슴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이건 분명히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싶어서 시현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찾았다.


“조금만 참아, 내가 얼른 119를……!”

“그게 아니야!”

그러나 태하가 얼른 손목을 붙잡고 말렸다.


“몸이 안 좋은 게 아니고…… 당신 때문에 그래.”

시현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그러니까, 당신이랑…… 너무, 오랜만이라서.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제야 시현은 태하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단순히 수줍음을 타는 거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설레긴 하지만, 처음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괜히 덩달아 부끄러워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잠시 후 태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첫날밤, 조금만 미룰 수 있을까?”

“응?”

“다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손잡는 것부터.”

얘가 농담을 하나 싶어 빤히 쳐다봐도 태하는 어디까지나 진지해 보였다.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이제 정식으로 부부까지 된 마당에, 갑자기 손잡는 것부터 다시 하자니.

하지만 시현은 태하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자는 생각이 단단히 박혀 있는 상태였다. 좀 이해가 안 가면 어떤가, 태하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좋아, 그러지 뭐.”

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태하의 손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태하가 금세 흠칫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져서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구나, 싶었다.


“걱정 마. 네가 다시 나한테 익숙해질 때까지, 난 절대 먼저 안 건드릴게.”

“……응.”

태하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저보다도 더 어른스러웠던 남자가, 아주 오랜만에 연하로 보였다. 저러고 있으니까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잖아.

문득 시현은 그를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래도, 키스 정도는 살짝 시험해봐도 되지 않겠어?”

장난스럽게 속삭이고, 시현은 눈을 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

태하가 긴장해서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 치켜든 고개가 슬슬 뻣뻣해질 무렵에야 뺨에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와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사랑스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입술도 아니고 뺨에 키스하는 게, 그렇게나 떨리니?

살며시 눈을 뜨자 또다시 새빨개져 있는 태하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제 눈을 가렸다.

아무래도 그만 놀려야겠다. 시현은 깨끗하게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나 가서 씻고 올게. 오늘은 손만 잡고 자자. 그건 괜찮지?”

갈아입을 옷이 든 작은 트렁크를 가지고 욕실로 향하며 시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게 무슨 고등학생 같은 짓인지. 아니,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이런 연애는 안 할 것 같은데.

첫날밤에 손만 잡고 자게 된 마당에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 때문에 너무 설레 죽을 지경이라는데 왜 기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예쁜가?”

넓고 호화스러운 욕실 앞의 파우더 룸에는 전신거울도 설치되어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예쁜 척을 하다, 시현은 문득 트렁크 안에 챙겨온 속옷을 떠올렸다.

친구들이 결혼선물로 주었던 것을, 원래는 제대로 꺼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상자 안에 넣어둔 채였다.

물론 첫날밤에 입을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굶주린 남자의 눈에 이런 걸 보였다간 불에다 기름을 붓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태하의 사고를 겪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태하만 기뻐해준다면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돼도 좋았다. 그래서 큰맘 먹고 챙겨 왔던 건데…….


“결국 쓸모가 없어졌네.”

한숨을 내쉬며 시현은 트렁크에서 속옷이 든 상자를 꺼냈다.

워낙 얇고 하늘하늘한 망사로 되어 있어서 속옷인 줄 알았는데, 정작 꺼내서 제대로 펼쳐 보니 슬립 형태의 잠옷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누굴 죽이려고 이런 걸……!”

시현은 잠옷을 두 손으로 들고 펼쳐 보며 새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는다기보다 차라리 가린다는 표현이 적합한 옷이었다.

상표에 쓰여 있는 브랜드 이름은 무려 ‘섹시 다이너마이트’.

이름 한번 잘 지었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작은 불꽃만 닿아도 금세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


‘근데 이게 맞기나 할까?’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나름대로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시현은 괜히 아무도 없는 파우더 룸 안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한동안 점심마다 샐러드로 때운 보람이 있었는지, 작을 것 같았던 잠옷은 다행히 맞춘 듯이 몸에 딱 맞았다.

시현은 전신거울 앞에 섰다. 국내 최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받은 화장이 아직 그대로인데다, 거울마저도 고급인 탓인지 유난히 다리가 길어 보여서 꽤나 그럴듯했다.


“오, 나쁘지 않은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시현은 요리조리 포즈를 잡아 보았다.

모델처럼 허리에 손도 착 얹어 보고,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보기도 하고. 살짝 옷자락을 살랑거리기도 하고. 기분만은 빅토리* 시크* 패션쇼에 선 엔젤이었다.

한참 그렇게 거울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왠지 등줄기가 이상하게 따가웠다. 뭔가 싶어서 등을 돌렸다가, 시현은 그만 얼어붙었다.

살짝 열려 있는 파우더룸 문 앞에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며 못박인 듯이 서 있었다.


“태, 태하야……!”

시현은 보았다.

태하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여태 그녀가 수도 없이 보아 왔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

사자를 마주친 사슴처럼 바짝 얼어붙어 있는 시현을 향해, 태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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